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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중 /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로서의 인체조각

윤진섭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로서의 인체조각

우호(又湖) 김영중의 작품세계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1. 김영중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서른 한 살에 홍익대학교 미술학부를 졸업했다. 1956년, 6.25 전쟁의 상흔이 미처 아물기도 전인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였다. 그는 한국 나이로 스물에 8. 15 해방을 맞았다. 말하자면, 일본어 세대인 셈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일본어를 익히는데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세대에게 있어서 일본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모국어보다 편하고 더 친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세대는 과도기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완전한 일본 유학세대도 아니고, 완전한 한글 교육 세대도 아니기 때문이다. 김영중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한창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물자도 귀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교육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세대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 현대조각의 양상은 미술평론가 이경성의 말처럼 ‘모방과 이식’의 극복으로 특징지워진다.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조각 수업을 받은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 김복진 이후 윤효중, 김경승, 김종영, 윤승욱, 문석오 등 초창기 조각가들의 활약은 이 땅에 아카데믹한 서양식 조각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제전(帝展, 후에 문전(文展)으로 개칭)과 선전(鮮展)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한국조각계를 형성해 나갔다. 

 김영중의 세대는 윤효중, 김경승, 김종영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유학 출신 작가들의 제자들이다. 1945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에 조각과가 설치되면서 김종영과 윤승욱이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 백문기, 김세중, 성낙인, 유한원, 박철준 등이 졸업하였으며, 홍익대학은 1949년에 설립허가를 얻어 같은 해에 조각과를 개설하였다. 불재 윤효중은 홍익대학 조각과에 근무하면서 많은 제작들을 양성하였다. 김영중은 초창기 홍대 조각과 출신이다. 

 이경성이 쓴 “한국조각의 근대적 과정”에는 김영중의 이름이 여러 곳에서 거명되고 있는데, 이 자료를 통해 볼 때 그의 초기 활동은 1949년까지 소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1949년 예대미술부 제3회전에 <우인상>을, 1954년의 대한미협전에 <적전(敵前)>을 출품했음을 알 수 있는데, 명제로 미루어 구상적 경향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또한 1954년, 제3회 국전에는 <복선(伏線)>을 출품하였음을 같은 글에서 밝히고 있다. 이 무렵의 각종 명단에 윤영자, 전뢰진, 민복진, 김정숙, 김찬식, 최기원, 김세중 등 한국 현대조각의 원로들이 거명되고 있어 김영중의 당시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김영중은 과도적인 세대에 속한다. 8. 15 해방 이후 근대적 조각 수업을 그것도 일본유학 세대에게서 받았던 만큼, 근대적 조형언어와 현대적 조형언어의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과 갈등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이경성의 글에는 1951년 이태리를 방문한 윤효중이 마리노 마리니를 만난 뒤에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영향이 자연스럽게 그의 제자들에게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조형언어에 대한 그의 탐색을 짐작해 볼 만 하다.



 2. 우호(又湖) 김영중의 활동 경력은 대략 세가지 방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순수한 창작활동의 측면, 둘째는 초상조각․환경조각․상징조형물 등과 관련된 공공미술적 측면, 셋째는 미술행정의 실제 및 연구와 관련된 측면 등이다. 그는 지난 40여 년간 이 세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중 어느 한 면만 강조하여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세간의 인식은 주로 공공미술과 관련된 측면에 한정되어 왔으며, 그나마도 그다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국내 조각계의 원로 가운데 한 사람인 김영중은 그동안 그가 보여준 왕성한 활동내용에 비해 거기에 상응하는 폭넓은 비평적 반응은 얻지 못한 편에 속한다. 그 이유는 여럿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주된 요인은 그가 개인전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하지 않나 생각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전념하여 그 성과를 개인전을 통해 발표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가 화단에서 흔히 통용되는 이 상례를 좇지않았다는 것은 그에 관한 평가와 관련지워 볼 때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작가보다는 미술행정가․초상조각가․상징조형물 제작가로서의 이미지가 보다 강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가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경력 내용은 순수한 작품활동 보다는 초상조각․환경조각․기념상징조형물 제작․미술행정분야의 활동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것들이 그의 세평을 형성하는 요인이 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그의 진면목과는 무관한, 일종의 편견을 유발하는 인자들이다. 

 그러나 원인이 어디에 있든 김영중이 세간의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비껴 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비록 그가 아무리 순수한 입장에서 조형물과 관련된 일에 종사해 왔다고 하더라도 상징조형물과 관련된 고정된 이미지가 그러한 순수성을 저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형식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편견과 억측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조형적 입장에서 그의 작품을 기술하고 평가하는 입장이야말로 어찌보면 한 작가에 대한 편견없는 접근일 수 있겠기 때문이다.    

 김영중의 본격적인 창작활동은 1963년 <원형조각회>로부터 비롯된다. 최기원, 김영학, 김찬식, 전상범, 이운식 등 서울대와 홍익대 조각과 출신의 소장 작가들로 구성된 이 그룹은 전위적 성격을 지닌 실험 그룹이었다. 추상조각에 경도되었던 이들은 창립전을 통해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새로운 조형행동에서 전위조각의 새 지층을 형성한다. 

   1. 일체의 타협적 형식을 부정하고 전위적 행동의 조형의식을 가진다. 

   2. 공간과 재질의 새 질서를 추구하여 새로운 조형윤리를 형성한다. 


 <원형조각회>의 이와같은 선언은 당시 구상 위주의 진부한 조각계에 충격을 주었다. 전위운동의 주요 요건인 선언문을 통해 전위조각의 발진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상에 맞는 조형실험을 선언했던 것이다. 김영중은 이 전시회에 <<해바라기가 살아서A.B.C>> 연작을 출품했는데, 이 작품들은 상하로 긴 선조적 구조를 지닌 추상조각이었다. 실험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후 꾸준히 이어져 1970년대 중반에는 김영학, 전상범 등과 함께 자동차를 파괴하는 해프닝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최근에 그는 7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젊은 작가들과 사이버 아트와 관련된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최근에 일어난 그의 이러한 활동은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기념하여 광주광역시 소재 중외공원 입구에 설치한 무지개다리(1995년 작)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러한 사례는 그의 실험정신이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들이다. 

 1958년 국전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한 김영중은 그 이후로는 국전과 결별을 하고 각종 단체전 출품과 함께 공공미술 분야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환경조각에 대한 투신은 매우 이른 편으로 1962년도의 마포아파트 시멘트 조각(평화행진곡)을 필두로 많은 수의 환경조형물을 제작한 바 있으며, 초상조각은 1958년 미국인 두상을 시작으로 백성욱 총장 흉상, 원효대사 동입상(1968), 강감찬 장군 기마동상(1971), 인촌 김성수 선생 동좌상(1978) 등 수십개의 초상조각을 제작하였다. 

 김영중의 초상조각은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준다. 머리카락에서 옷주름, 돋아난 힘줄에 이르기까지 대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개성의 부각이 특징이다. 초상조각과 관련하여 그는 “나의 초상조각 제작 방향”이란 글을 남기고 있는데, 거기에는 초상조각에 대한 그 나름의 철학이 담겨있다. 


 “초상조각을 위촉받으면 나는 먼저 내가 표현해야할 대상 인물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연구를 시작한다. 맨 먼저 그가 살아온 경력을 자세히 검토하고, 그의 생애동안에 있었던 일화들을 수집함으로써 그 인물의 인성, 지식 정도, 가치관, 생활습관 등을 면밀히 따져본다. 인간은 오랫동안 종사해온 직업이나 즐겨하는 운동 등에 따라서 골격이나 근육의 발달 정도가 다르게 된다. 특히 더 많이 사용한 골격이나 근육은 더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쇠퇴하게 마련인데, 이러한 해부학 적 특성은 곧 작품제작에서 핵심적인 요소로서 결코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되는 사항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그의 초상조각에 대한 철학은 매우 세밀한 사항까지 기술돼 있다. 가령, ‘전해오는 사진이 없는 경우에 어떻게 대상을 묘사할 것인가’라든지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방법 등 초상조각 제작과 관련된 까다로운 문제들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돼 있는 것이다. 실제의 그의 초상조각은 대상의 성격과 인품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있다. <<김상협 흉상>>(1986(c.1987), 56.0x34.0x22.0cm, 청동, 가족소장)에는 교육자의 후덕한 인품이 엷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통해 잘 표현되어 있으며, <<인촌 김성수 선생 좌상>>(1991, 210.0x150.0x210.0cm, 청동)을 통해서는 평생을 교육과 언론 분야에 몸담아온 고인의 높은 인격을엿볼 수 있다. 그러나 탁월한 묘사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상조각은 동시대의 조형의식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 것이 흠이다. 가령, 로댕이 발자크상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강인한 실험의식 같은 것을 그의 초상조각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생생한 묘사를 통해 대중들이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한 작가의 의도는 그의 초상조각이 지닌 장점임에 분명하지만, 기존의 초상조각의 관례를 파괴하고 새로운 미의식을 창조하려는 의지가 결여된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초상조각이나 공공조각 외에 김영중의 업적은 미술행정이나 제도, 기구의 창설에 기울인 그의 노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분야에 관한 한, 그는 선구자적인 입장에 서 있는데 여기서 그의 합리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다. 1969년, 현대미술진흥법을 제안, 입법추진운동을 벌인 것을 비롯하여 1976년, 조각작품 크기계산법(중수법)을 입안함으로써 그간 주먹구구식으로 통용되던 조각의 계산법을 계량화하였으며, 1982년 목포조각공원 건립을 건의함으로써 유달산조각공원의 개원을 보았고, 1989년에는 미술관법 제정 건의 및 입법추진운동을 벌이는 등 미술행정과 제도정비에 남다른 관심과 정렬을 쏟았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열정은 현재도 식지않아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 끊임없이 개선책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김영중의 활동은 고여송의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각가 김영중의 또 다른 면모는 한국의 ‘문화예술정책 부재의 시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문화의세기’를 외쳐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자발적으로 나서서 문화예술정책 혹은 미술행정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떠맡아 수행해 왔다는 점에서 언급될 수 있다. 김영중이 작품세계에서의 ‘한국성’ 연구뿐만 아니라 ‘국격 조성’ 혹은 ‘미술문화 공개념’을 주창하고 미술문화의 저변확대 혹은 미술의 대중화를 위해서 앞장서 왔다는 사실은 그가 한국미술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적 입장을 취해왔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김영중은 한국미술진흥을 위한 여러 가지 관련 법규나 제도의 입안과 정착에 앞장서 왔고, 한국 최초의 조각공원(목포유달산조각공원)과 한국 최대의 조각공원(제주조각공원)을 설립하였으며, 동아미술제나 광주비엔날레를 제안하여 창설에 크게 기여해 왔다. 그의 아트 매니저‘로서의 면모를 세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한 평생동안 국내 미술계의 발전에 적지않은 공헌을 해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고여송, 김영중의 인도주의와 한국적 조형성의 세계>



3.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조각가 김영중은 작가로서의 면모와 미술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미술행정가로서 김영중의 면모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에 피선되는 것으로 피크에 올랐지만, 그는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그 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후로도 그는 각종 미술관련 법규의 정비와 제도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개인적인 작업의 발표에는 소홀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각종 초상조각에 나타난 구상성을 제외하면, 김영중 작품세계의 요체는 선과 부드러운 곡면의 접합에 두어진다. 인체를 바탕으로 한 그의 반추상 작품들은 전통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과제에 부응하고 있어서 조각이 당대의 미의식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나름대로 고심한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반추상 작품들은 형태미적인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유산에 근거하고 있다. 가령, 여인들이 즐겨 입는 저고리 소매라든지 동정, 박쥐문양의 장석, 골무, 버선코, 기와의 추녀에서 보이는 날렵한 선의 자태가 응용되고 있는 것이다. 면을 머금은 선과 선이 만날 때 형성되는 입체는 필연적으로 볼륨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의 작품 속에서 풍만한 볼륨을 감싸고 흐르는 선은 광선을 받아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상대적 관계를 선명히 부각시킨다. 거대한 스케일의 기념비적인 부조가 됐든, 단일한 조각작품이 됐든 김영중의 조각에서 광선과 볼륨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경성은 그의 작품이 지닌 이러한 특징을 가리켜 ‘계산된 구조’라고 평한 바 있다.


 “조각가 김영중의 작품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굳건한 구조의식과 계산된 구성력에 있다. 대지에다 터전을 두고 저 높은 하늘로 올라가는 상승적인 형태나 선이 곧 그의 작품의 본질을 이룬다. 아울러 그가 작품을 제작할 적에 신경을 쓰는 것은 입체물에 구멍을 뚫어 입체물 뒷면에 까지 광선을 도입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형태의 성격은 모 즉, 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둥근 양감의 표현보다도 더욱 강렬한 힘의 상태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는 +양감을 -양감으로 처리하면서 생기는 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의 기조인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의 관계는 동양철학의 기본원리인 음양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두 개의 곡면이 만나면서 생기는 하나의 선은 광선에 따라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김영중은 이 네거와 포지의 미학을 추구한다. 그의 조각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 음과 양의 조화에 있다. 그는 “진․선․미가 아닌 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은 예술의 존재 이념으로서 이 삼요소의 통합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인체미의 표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김영중의 작품세계는 주제나 소재에 있어서도 ‘가족’이라든지 ‘인간애’와 같은,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구성원 사이의 근본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가령,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하늘나라 사람들>>(100.0x60.0x36.0cm, 옥천청석, 개인소장)은 인간을 소재로 인간 사이의 유대와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듯한 포즈를 한 이 작품은 인체를 몇 개의 곡면으로 대담하게 처리하여 선의 날렵한 맵시와 인체의 풍만한 볼륨을 강하게 대비시킨 작품이다. 구성적인 면에서 볼 때, 인체를 소재로 한 그의 반추상 작품은 대개 △형태의 안정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완전한 추상작품인 <<상호음>>(1970년 경), <<백의민족의 역사적 배경>>, <<싹>>(1982) 등에서 보이는 기본 형태인 수직형 구성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수직에서 삼각형 구성으로의 이행과 사물에서 인체로의 전이는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고 파악하려고 한 그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김영중이 한국성을 조형화하는 또 다른 방법은 천․지․인 3재(才) 사상을 구현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성리학설을 요약하고 있는 <천명도>에서 천(天)은 둥근 원(○)으로, 지(地)는 사각형(□)으로, 그리고 인(人)은 천․지의 양 형상을 모두 지닌 두원족방(頭圓足方), 평정직립(平正直立)으로서 둥근 머리를 꼭지점으로 하고 넓적한 발을 밑변으로 하는 직립의 삼각형(△)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여송, 김영중의 인도주의와 한국적 조형성의 세계>


 형태심리학에서 밑바닥이 넓은 삼각형은 다른 어떤 도형보다도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짚트의 피라미드는 이의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양 발을 벌리고 서있는 인간의 포즈가 가장 안정되고 보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인체를 소재로 한 김영중의 반추상 작품들은 대개가 밑면이 넓은 직립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비상하는 인간군상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상징조형물 <<큰 뜻>>(광주어린이상징탑) 역시 삼각형의 구도를 취하고 있어 이러한 형태가 우연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 안정과 사랑, 그리고 비상이야말로 김영중의 조각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진․선․미의 안정된 가치체계, 그리고 거기에서 배태되는 인간적 사랑, 그러한 사랑의 승화야말로 세계를 유지하는 핵심이며, 그러한 속에서 세계의 평화가 싹트리라는 믿음을 그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통찰과 이념이 외면화된 것으로써 우리에게 사랑에 관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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