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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 균형의 미학

윤진섭

균형의 미학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법관스님은 아카데믹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미술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유명작가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림에 타고난 재주가 있는지 현재의 그는 그 어느 직업적 화가보다도 더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그림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수많은 작품을 봤다고 한다. 손 공부에 앞서 눈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이다. 짐작컨대 그렇게 해서 미(美)에 대한 개안(開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법관스님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자신이 본 기성작가의 작품에 대한 품평의 깊이와 폭을 느낄 때가 있다. 서구의 어떤 이론을 잣대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심미적 안목에 기대어 작품을 분석한다. 그 내용은 주로 색과 선, 면 등 조형적 요소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 회화의 삼요소가 법관스님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것들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실로 색과 선, 면의 결합인 것이다.


 <접촉(Touch)>이라는 제목의 근작들은 붓질을 할 때의 느낌을 잘 전달해 준다. 그는 수행자로서 자신의 신분과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일치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의 그림 제작 방법은 선(禪) 수행의 방식을 닮았다. 수행의 방법으로써 동일한 행위의 반복을 그림의 작화(作畵) 방식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는 삼천 배를 행하듯 무수한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그가 화폭에 찍는 점과 긋는 선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삼라만상의 요체가 담겨있다. 우주에는 수많은 물상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며 그것은 다시 무한대로 확대돼 나간다. 


 <접촉(Touch)> 연작에서 드러나는 이 반복적 행위는 구도(求道), 즉 깨달음의 도정에 이르는 길이다. 청색을 주조로 황색과 연한 녹색, 연한 핑크색의 잔 터치들이 가해지면서 이루어지는, 마치 한 필의 피륙과도 같아 보이는 화면은 아른아른한 색의 효과를 자아낸다. 그것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닮았다. 그의 화면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른아른한 색의 뉘앙스가 자아내는 색의 띠를 느낄 수 있다. 그것들은 작은 세필로 앞서 칠한 색점들을 지워나갈 때 가해진 터치의 흔적이 모여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화면에서는 진한 몸의 체취(몸성)를 느낄 수 있다. 수공(手工)에서 오는 손의 맛, 그것은 마치 조선의 아낙들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할 때 느끼는 인내심과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내공을 연상시킨다. 


 법관스님은 작년 KIAF에 참가한 이후 약 50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주로 청색조 계통의 작품들이다. 그런데 그 작품들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다 같지 않다. 그 요체는 발색에 있다. 보색대비의 효과를 충분히 살려 청색을 순도 높게 드러내기 위해서 바탕을 적색으로 칠하는 식이다. 그는 탱화를 그릴 때 바탕에 빨강색을 전체적으로 칠하는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그렇게 빨강색을 칠한 후에 다른 색을 그 위에 칠하면 미세한 층이 형성되는데 그 누적의 결과 그의 작품은 다양한 색가(色価)를 지닌 면의 느낌을 드러내게 된다. 


 법관스님의 작품세계는 서너 개의 범주로 분류된다. 첫째는 색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뭉뚱그려 볼 때 청색조와 적색조, 그리고 이 둘의 결합으로 분류된다. 둘째는 선적인 것과 면적인 것, 그리고 이 두 요소가 결합된 양상으로 분류된다. 근작인 청색조의 <접촉(Touch)> 연작은 청색조에 선적인 요소가 결합된 결과이다. 이 자유자재로 이루어지는 범주들의 결합이 다양성을 낳는 요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선과 면, 그리고 색조가 자아내는 무수한 변주에 기대고 있다. 거기에는 시간의 축적이 있다. 조선의 목기(木器)에서 느낄 수 있는 고졸(古拙)한 맛, 그 시간의 축적이 가져다주는 깊은 아우라를 그의 작품에서 맡을 수 있다. 그는 “선이 빗겨서 만나면 거슬리거나 부딪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조선의 달항아리나 백자에서 느끼는 선의 미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가령 조선의 분청사기에 대한 그의 통찰은 “분청사기의 곡선에는 약간의 굴곡이 있는데 이 굴곡이 사람의 숨통을 트여주고 쉬어가게 한다.”고 말한다. 중국 도자기나 일본 도자기가 지닌 완벽한 대칭의 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질박한 느낌, 이는 우현 고유섭 선생이 말한 ‘무기교의 기교’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균형은 법관스님의 삶의 태도와 자세, 그리고 수행적 측면을 잘 보여주는 요체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우선시되어야 할 인간의 덕목이다. 인간은 삶을 영위하는 동안 타자와의 관계를 피할 수 없는데 그 만남을 통해 빚어지는 천태만상의 삶의 양태들이 미적으로 객관화된 것이 바로 ‘터치’인 것이다. 청색조의 화면에서 작은 붓에 의해 찍혀지는 무수한 터치들은 다름 아닌 삶의 양태들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부유하는 인간들의 부딪힘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 삶의 흔적들은 한 점 물감으로 환원되어 화면을 아름답게 채색한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화’라고도 할 수 있고 인간 사회의 한 축도라고도 부를 수 있다. 


 법관스님의 그림은 궁극적으로 마음의 그림이랄 수 있다.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문제는 그의 작업의 중심을 이룬다. 그는 균형의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본다. 균형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대상을 바라보는 심안(心眼)의 요체를 이룬다. 그는 “마음을 잘 쓰면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답다”고 말한다.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고사를 연상시키는 이 말은 그의 그림의 요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깨달음의 경지를 찾아나가는 그의 자세는 근작의 청색조를 통해 오롯이 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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