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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보다 동키호테가 더 아름답다 - 용어의 표기에 대한 하나의 제언

윤진섭




윤진섭(호남대 교수, 미술평론가) 



언어가 의식을 지배한다. 


이 논의의 대상에 해당하는 한국 현대미술의 연대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후반에 걸친 약 10여 년간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년작가연립전](1967. 12. 11-17, 중앙공보관)이 열렸던 해가 그 기점이 된다. 한국 현대미술의 본격적인 출범을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으로 보는 통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시기의 미술운동은 현대미술 제 1세대에 해당하는 <현대미술가협회> 중심의 앵포르멜 열기가 시들면서 나타난, 오브제, 설치, 해프닝과 같은 탈(脫)타블로적인 방법론의 대두로 특징지을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당시 신세대에 해당하는 앵포르멜 주체들이 기성작가가 되면서 화단을 장악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어서 새로운 세대인 [청년작가연립전] 멤버들이 새로운 미학을 주장하면서 도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의 한국사회는 점차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967년 두 번째 대통령에 당선, 제 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야심차게 추진해 나갔다. 외환보유고는 3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바캉스'와 '레저'라는 말이 유행하고, 미국에서 귀국한 가수 윤복희에게 자극을 받은 젊은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이었다. 50년대에 시판되기 시작한 칠성사이다는 매우 귀한 음료로 취급되어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가서나 맛볼 수 있었다(졸저,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67-9 쪽 참고). 


전후의 '앵포르멜'이 6·25 전쟁을 겪은 세대들에 의해 당시의 황폐한 사회상과 본인들의 처참한 실존적 체험을 바탕으로 태동된 것이라면, [무]동인과 [신전]동인에 의해 제시된 연탄과 유엔성냥(김영자), 미니스커트(심선희), 선글래스, 바디 페인팅(정강자), 연통, 맥주병(최붕현), 네온(강국진), 태극문양(정찬승), 고무장갑, 방독면(이태현) 등의 오브제들은 산업사회의 산물로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앵포르멜 세대와는 썩 차별되는 것들이다. [청년작가연립전]에 나타난 이러한 사조를 두고 당시의 비평은 팝, 네오 다다, 환경미술, 해프닝 등의 용어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식의 비평적 기술은 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출범을 본 일본의 '모노하(物派)'는 이태리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작가들과 유사한 재료를 사용하고 있지만, 일본 고유의 명사를 사용함으로써 브랜드화 하는 주체의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알다시피, 모노하는 60년대 후반 일본의 독특한 문화적 산물이다. 당시 일본은 급속한 경제적 부흥으로 인하여 고도 산업사회에 진입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은 일본에 있어서 전후 최대의 문화적 전환기였다. 1964년 동경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누리게 된 경제적 풍요와 이의 반대급부로 나타난 공해 내지는 각종, 사회·정치적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사회적 소요가 끊임없이 야기된 시기였다. 모노하는 예술의 궁극적인 본질에 대해 고민하던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작가들이 기존의 예술에 도전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표출된 아방가르드 운동이다(이우환은 모노하가 운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현상'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에 의해 주도된 아르테 포베라가 시작된 해는 1967년으로 이는 최초의 모노하 작품으로 간주되는 세끼네 노부오의 작품 '어머니의 땅'보다 약 1년정도 빠르다. 여기서 필자의 관심은 시기가 아니라 명칭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애석하게도 수입된 용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쓰고 있는 형편이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까지 한국 화단을 점유하다시피 했던 앵포르멜은 유럽의 'Art Informel'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는 수입어의 퍼레이드가 계속된다. 팝 아트, 옾아트, 네오 다다, 하드 에지, 해프닝, 이벤트, 하이퍼 리얼리즘, 모노크롬, 모노톤, 미니멀리즘,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그 예이다. 반면에 일본의 모노하는 서구에서조차 'Monoha'라는 고유 브랜드로 통용되고 있어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 하다. 이는 '스시(Sushi)', '가라데(Karade)', '사시미(Sashimi)' 등이 영어권 국가에서 그대로 소통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태권도(Taekwondo)', '김치(Kimchi)' 등은 고유명사로 통용되고 있지 아니한가. 미술의 경우에는 80년대의 민중미술이 해외에서 'Minjoong Misul(People's Art)로 표기된 바 있다. 


필자는 제 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가운데 하나인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 서문을 쓰면서 영문에 70년대의 단색화적 경향을 가리켜 'Dansaekhwa'로 표기한 바 있다. 'monochrome painting'이란 표현을 애써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70년대의 한국미술을 점유했고 현재까지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독자적인 미술양식을 영어식 표현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왜 일본의 모노하는 해외에서 그대로 통용이 되는데, 우리의 단색화 내지 단색조 회화는 '모노크롬' 혹은 '모노톤'으로 스스로 불러야 하는가 하는 것이 그 당시에 품었던 의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식의 기술이 또 하나의 비평적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자리가 생산적인 담론을 위한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위의 예에서 보듯이 용어의 문제가 적극적으로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필자는 50년대 후반 이후의 미술사조 혹은 양식에 대한 미술사 내지 비평적 기술에 있어서 이 자리가 용어에 대한 가능한 합의의 출발이 되길 기대한다. 필자는 중국을 여행하면서 'Art Center'를 '예술중심(藝術中心)'으로 표기하는 중국인들의 당당함과 대륙적 사고에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것을 우리식대로 표기하는 의연함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의식에 만연된 사대주의 내지 식민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한국현대미술 다시읽기 II, 6,70년대 미술운동의 비평적 재조명,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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