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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의 세계, 정신, 촉각, 행위

윤진섭


Ⅰ.
 나의 유년 시절, 동네의 어른들은 흰옷을 즐겨 입었다. 단오절이면 흰 옷을 입은 아낙네들이 마을 뒷산에 구름같이 모여 그네를 타곤 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푸른 풀밭 위에 흰색 물감 칠을 한 것 같았다. 내가 1955년생이니, 아마도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한 번은 저녁을 먹고 나서 동구 밖에 서 있자니 들판너머 저 멀리 시커먼 기차가 흰 연기를 뿜으며 지나가는데, 지붕 위까지 흰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 했다. 나는 그 장면이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영화에서나 보던 6.25전쟁 시절의 피난 행렬도 아닐 텐데 사람들은 왜 지붕 위에까지 올라가야 했을까? 다만 아마도 추석 귀성열차가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 볼 따름이다. 
 나는 충청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 때만 해도 마을에는 6. 25 전쟁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었다. 전장(戰場)에서 군인들이 쓰던 철모는 나무 작대기에 묶어서 인분을 푸는 바가지로 사용했으며, 마을 뒷산의 나무에 매달린 종은 포탄의 탄피였다. 그것은 동네의 어느 집에 불이 나거나, 부역을 소집하거나, 마을 청년이 징집을 당해 군대에 갈 때 울었다. ‘댕, 댕, 댕....’하고 빠르게 울면 어느 집에 불이 났다는 비상 신호였고, ‘댕...댕...댕....’하고 느리게 울면 마을 장정이 군대에 간다는 신호였다. 장정이 군에 입대하는 날이면 아침에 동네사람들은 동구 밖에 하얗게 모여 ‘만세 삼창’을 불렀다. 
 마을의 공동 우물과 가까운 우리 집 앞에는 실개천이 흘렀는데 아버지는 구멍이 뚫린 조립식 활주로 철판을 구해다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었다. 어느 날 동네 고철장수가 쇠죽을 끓이는 아버지 옆에 앉아 그걸 팔라고 채근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무렵 동네 꼬맹이들은 집안에 굴러다니는 국방색 미제 기관총 탄통의 뚜껑을 반으로 잘라 썰매를 만들어 얼음을 지쳤다. 동네의 이장 집 마당에는 성조기가 선명하게 찍힌 ‘악수표’ 원조 밀가루 부대를 잇대서 만든 빛바랜 이불 호청이 바람이 펄럭였다. 

Ⅱ.
 나는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는 일종의 ‘초혼(招魂)’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의 혼을 오늘 이 자리에 불러내는 일이다. 그 의식(儀式)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되풀이 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한국의 단색화가 비단 70년대에 성행한 미술 운동에 그치지 않고 오늘 다시 되살아난 이유일 것이다. 
 1970년대의 단색화는 훗날 장성하여 미술대학에 진학한 나의 체험과 맞물려 있다. 70년대 중반, 홍대 서양화과 학생이던 나는 당시 전위그룹으로 명성을 날리던 [S.T]의 멤버로 여러 전시회에 참가한 적이 있으며,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등 단색화 작품들이 많은 대형 전시를 보며 학생이자 작가로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제3공화국의 엄혹한 군부통치 하에서 단색화와 같은 ‘침묵의 언어’가 탄생한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대학 시절, 장발에 수염을 길렀던 나는 어쩌다 시골 고향집에 다녀오기라도 하면 버스가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진입하기 직전, ‘반포’ 검문소에서 마주치는 경찰의 검문이 두려워 가슴을 졸이곤 했다. 그 무렵 장발 단속은 여자들의 미니스커트 단속과 함께 경범죄의 주 메뉴였다.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賊)’으로 대변되는 민주화에의 열망은 대학가의 소요를 불러왔고 잇단 계엄령과 위수령의 선포는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70년대 단색화 운동의 중심인물인 박서보는 70년대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미협(한국미술협회의 약칭)의 국제담당 부이사장(1970-77)과 이사장(1977-80)의 직함을 이용, 국제전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미협의 막강한 조직력을 등에 업은 그는 1972년에 무심사 전시회인 [앙데팡당]전을, 1975년에는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 드 서울]등 실험미술 계열의 대규모 전시회를 연이어 창설했다. 단색화의 주 무대가 된 이 전시회들은 당시 전위내지는 실험미술 계열의 작가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던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 인도트리엔날레, 방글라데쉬비엔날레, 카뉴현대미술제 등 세계 유수의 국제전 참가 작가들을 선정하는 중요한 장(場)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작가가 되기 위한 주 등용문인 국전의 위세가 사그라들기 전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초반에 박서보가 미협을 장악하면서부터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급증, 언론도 힘이 쇠약해진 국전보다는 해외 국제전 쪽으로 점차 보도의 방향을 바꿔가고 있었다. 이 무렵의 사정에 대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이우환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나의 입장에서 단색파를 서술하자면, 72년 [앙데팡당]전을 본 야마모토와 그를 내세우는 나카하라, 그들의 통로인 나를 데리고 서울의 대장격인 박서보 선생이 앞장을 섰고, 서울 명동화랑이 거점이 되어 단색화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자기 발견의 충동질이었고 그 계기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말이지 다른 뜻은 없다. 간절한 잠재성의 꼬투리에 외부의 충동질로 불이 붙자 폭발적, 집단적 양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국내 쪽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박서보 선생의 존재와 역할 없이 단색파는 거론 될 수 없고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현실과 소외된 비제도의 상황을 무릅쓰고 가냘픈 내외 동풍을 중계삼아 단색계통의 작가들을 부추기며 쏟은 그의 열정과 행적은 실로 눈부시다.”
                     
 1970년대에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과 같은 대규모 현대미술 전시회는 덕수궁의 석조전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당시의 미술계 사정은 미술 인구에 비해 전시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공공미술관이라야 조계사 건너에 있는 미술회관이 고작이었고, 명동화랑을 비롯하여 현대화랑, 동산방화랑, 문헌화랑, 선화랑, 통인화랑 등 약 10여 개의 상업화랑들이 인사동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1960년대에 [청년작가연립전]과 같은 실험적인 전시회가 주로 열렸던 중앙공보관은 소공동에서 덕수궁 근처로 이전하면서 활력을 잃는 가운데 덕수궁 석조전의 국립현대미술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경복궁 시절인 1970년대 초반 [A.G]와 같은 전위단체의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이 1973년에 덕수궁으로 이전하면서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A.G], [S.T], [서울비엔날레] 등등 전위적인 전시회들이 이곳에서 자주 열렸다.   

Ⅲ. 
 한국의 단색화는 타자적 시선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는 내가 나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잘 맡지 못한 상태에서 남이 먼저 나의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1970년대에 한국의 단색화에 대해 가장 먼저 주목한 측은 일본인들이었다. 1975년, 일본의 정상급 화랑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과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가 기획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이 동경화랑에서 열렸는데, 초대작가는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 등 5인이었다. 전시서문에서 나카하라 유스케는 “색채에 대한 관심의 한 표명으로서 반(反) 색채주의가 아니라 그들의 회화에의 관심을 색채 이외의 것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미술평론가 이일 역시 서문에서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빛깔 이상의 것이다......백색이기 이전에 백이라고 하는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라고 썼다. 
 나카하라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한국 단색화 작가들은 색채 그 이상의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무엇’을 가리켜 정신이라고 해도 좋고, 이일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우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비록 한국의 단색화가 1970년대 초반에 서구의 모더니즘, 보다 정확히 말해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스트 페인팅이나 미니멀 아트와 같은 해외 사조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그것을 발효시켜 독자적인 양식을 창출한 주체는 백색파 작가들이란 사실이다. 야마모토 다카시와 나카하라 유스케와 같은 일본의 미술관계자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 한국의 ‘백색’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나카하라는 “한국의 현대회화가 모두 구미와 똑같은 맥락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화가의 작품에는 다른 나라의 현대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봄, 서울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어떤 화가의 작품을 접했을 때 나는 중간색을 사용함과 동시에 화면이 매우 델리키트하게 처리되어 있는 회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고 쓴 바 있다. 이처럼 일본인들의 백색에 대한 주목은 구한말에 한국 땅을 밟은 벽안의 서양인들이 인상 깊게 본 백색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19세기 말, 근대화의 여명기에 이 땅을 밟은 서양인의 눈에 조선은 조용한 ‘은자(隱者)의 나라’로 비쳐졌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고 구한말에 조선을 찾은 한 서양인 기자는 쓰고 있다.”

 이 서양인 기자의 눈에 비친 흰색 또한 타자적 시선이란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른바 ‘백의민족’의 표상으로서 한국의 백색이 지닌 문화적 상징성은 장구한 역사를 배경으로 배태된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상징성은 다양한 문화적 자료체를 통해 수렴된다. 가령, 우리의 조상들이 입었던 흰옷을 비롯하여 “달 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백자, 백일이나 돌 등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 때 상에 놓이는 백설기, 문방사우에 속하는 화선지와 각종 빛깔의 한지” 등등이다. 그러나 한국의 단색화에 반드시 백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기린의 경우에 보듯이 검정색이나 청색, 노랑색, 빨강색, 녹색 등 오방색이 있으며 다갈색의 흙벽을 연상시키는 하종현의 배압법에 의한 단색화도 있다. 

Ⅳ. 
 이번에 국제갤러리가 주최하는 [단색화의 예술]전에는 1970년대 단색화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일곱 작가가 초대되었다.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이 그들이다.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중반 태생인 이들의 연령은 대부분 80대에 이르렀으며, 그중에는 윤형근, 정창섭 등 이미 작고한 작가도 있다. 이들은 화단의 원로로서 40여 년 이상의 세월을 오로지 단색화의 제작에만 매진해 온 작가들이다. 그 결과 이들은 각자 독자적인 화풍을 수립, 거장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한국의 단색화]전 초대작가 중에서 이들보다 한 세대 위인, 이미 고인이 된 김환기와 곽인식을 제외하고 80대의 원로급 작가들 거의 전원이 초대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70-80년대에 제작된 초기 단색화로 국한, 한국 단색화 운동의 생생한 면모를 보여주고자 힘썼다. 그만큼 작품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고 일부 작가의 경우에는 공립미술관과 사립미술관에서 작품을 대여, 가능한 한 초기 단색화의 풍경을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한국 단색화의 요체는 무엇보다 정신성, 촉각성, 행위성에 두어진다. 이 요체가 일곱 작가의 작품 속에 고르게 스며있다. 이들은 그러나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 안에서 서로 겹치거나 스며드는 가운데 궁극의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가령, 촉각성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 마치 선(禪) 수행하듯 종국에는 고도의 정신성을 획득한다. 과정으로서의 단색화의 제작 방식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수행(performance)’이라고 할 수 있다. 이우환의 반복되는 선과 점의 행렬, 박서보의 반복되는 선묘, 정상화의 반복되는 물감의 뜯어내기와 메우기, 윤형근의 반복되는 넓은 색역(色域)의 중첩, 정창섭의 반복되는 한지의 겹칩, 하종현의 반복되는 배압(背壓)의 행위, 김기린의 반복되는 물감의 분무(噴霧) 행위 등 반복적 행위는 이들의 작품 속에 고르게 녹아 있다.  
 1970년대 초 중반을 점유한 단색화의 초창기에 이들은 백색을 비롯한 흑, 적, 청, 황, 녹 의 오방색, 혹은 갈색과 회색, 베이지를 비롯한 중성색을 통해 ‘색의 부정’을 실천해 나갔다. 이들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색 자체가 아니라 ‘색을 넘어선’ 그 무엇이었다. 60-70년대 당시 한국과 일본의 가교 역할을 한 이우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와 관련해 볼 때 의미심장하다. 
 
 “70년대의 단색은 결코 색채론으로서의 색깔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백색만이 아니었고 검정, 갈색, 노랑, 붉은색, 푸른색, 회색 등등 다양했다. 그런 색이 스스로의 톤만으로 수렴된 단색이었는데 그것들은 현실과 이어지는 색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색 자체를 주장한 색도 아니었다. 다른 색과의 조화나 구체성을 띤 색, 즉 현실로서의 복합적이고 긍정적인 색깔의 발로는 아니었다. 최병소의 작품이 대표하듯이 초창기에는 부정 혹은 거부 혹은 버팀의 추상성이 강한 의지의 물감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군정현실의 구체성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색의 부정이었다.” 

 반복되는 행위가 물감을 통해 이루어질 때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두터운 물감과 질료의 층은 시각보다는 촉각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종의 ‘몸성’의 구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촉각성이 서구 모노크롬 회화의 시각 의존적인 방식과 차별되는 부분이다. 연필로 긋거나 색을 칠한 부분에 같은 행위를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는 방식은 결국 무(無)를 지향하는 의식의 발로이다. 그것은 한국 문화예술의 근간이 되는 유교와 불교, 즉 마음을 비움으로써 인격의 도야를 꾀하는 수신(修身)과 수행의 예술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단색화의 이러한 특징에 대해 호의적인 타자적 시선은 비서구적 문맥에서 단색화를, 가령 ‘흰색의 우세를 조선시대의 백자나 전통 불화’(Simon Morley), 혹은 ‘조선시대의 문화적 전통과 도교, 유교, 불교가 결합된 동양적 정신주의’(Henry Meyric Hughes)로 파악한 서구 비평가들의 견해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단색화(Dansaekhwa)의 영어식 표기에 대한 서구 비평가들의 수용은 이제 점차 보편화돼 가는 추세이다. 현재 구글에서 'Dansaekhwa‘란 단어를 검색하면 약 2천개의 항목이 뜬다. 단색화(Dansaekhwa)는 목하 세계를 항해 중이다. 국제갤러리는 작년에 영국의 프리즈 아트페어에 [The Art of Dansaekhwa]란 타이틀로 단색화를 소개해서 호평을 받았는가 하면, 뉴욕에 소재한 알렉산더 그레이 어소시에이츠 갤러리는 최근 [근대의 극복, 단색화:한국의 모노크롬 운동]전을 연 바 있다. L.A 소재의 블럼 앤 포 갤러리 역시 올 하반기에 단색화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해외 유수의 미술관들이 단색화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왜 이처럼 세계가 단색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단색화, 그 중에서도 특히 70-80년대의 초기 단색화가 지닌 예술적 우수성 때문이다. 서구의 미니멀 아트와는 다른 한국 고유의 미학적 특성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정신성, 물성(촉각성), 수행성(행위성)은 한국 단색화의 미적 특성으로서 시각중심적인 서구 미니멀 회화의 그것과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요소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구의 이론가들이 모두 한국 단색화의 미학적 특질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이자 아트 인 아메리카의 수석 편집장인 리차드 바인은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단색화의 미적 특징이 서구인의 눈에는 한낱 장식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의 현상을 놓고 나타나는 상반된 견해의 차이는 형태심리학에서 흔히 예로 드는 토끼와 오리의 도형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단색화를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서구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매우 온건한 형태의 미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도전과 부정의 정신으로 점철된 서양의 아방가르드 전통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 국제미술평론가협회의 명예회장인 헨리 메이릭 휴즈 역시 글 속에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해 단색화를 보는 서양인의 관점과 기준이 다름을 알 수 있다.   

Ⅴ.
 한국의 단색화 역시 국전이라고 하는 아카데믹한 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비롯되었다. 1970년대의 단색화 혹은 백색파는 당시만하더라도 현대미술과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통했다. 195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운동의 주역이었던 단색화 작가들은 1967년의 <청년작가연립전>에서 <A.G>와 <S.T>로 이어지는 오브제, 설치, 해프닝, 이벤트 등등의 실험적 내지는 전위적인 운동에서 빗겨나 있다가 70년대 초반에 이르러 다시 현대미술의 고지를 점령한 반동 세력이었다. 70년대의 단색화가 지닌 회화에 대한 부정의 정신은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볼 때 평면성이란 서구적 개념에 한국의 정신성을 접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단색화 작가들의 이 같은 서구 모더니티의 수용과 절충은 국제적 보편주의를 향한 행진의 서곡이었다. 이른바 회화에 있어서 현대성의 획득이 이루어지면서 지역적인 한계로부터 벗어나 국제적인 열린 지평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로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40대에 불과했던 단색화의 주역들은 이제 80대의 노경에 접어들었다. 이 전시에 초대받은 작가들 중에서 정창섭과 윤형근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한지(韓紙)는 추운 겨울에 만져야 제 맛이라는 의미에서 ‘한지(寒紙)’라고 불렀던 정창섭과 평소에 인간적 덕목을 강조했던 윤형근은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을 남겨놓은 채 말이 없다. 이우환은 구겐하임미술관의 전시에 이어 최근 베르사이유 궁에서 대규모 설치작업을 선보여 국제적 주목을 받고 있다. 배압법이란 독특한 기법을 창안한 하종현과 격자형의 패턴을 기본으로 뜯어내기와 메우기를 반복하는 정상화는 최근 들어 더욱 왕성한 창작열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의 단색화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거기에는 부정과 긍정의 두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과연 초기의 정신을 견지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내려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다가올 미래보다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리차드 바인의 조언처럼 세계의 무대에 뛰어들어 “준비된 자세로 자신의 비평적 관점과 신념에 대해 논박”할 수 있어야 한다. 바인의 다음 글이 인상적이어서 여기에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고자 한다.

 “이 세계무대에는 한국 미술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이 다수일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무대는 상호 교류의 기회가 있어서, 고집 센 반대자로부터 배우고 또 역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유쾌한 기회가 광활하게 펼쳐 있는 곳이다.”

                     <2014 국제갤러리, 단색화의 예술전 도록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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