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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예술개념으로서의 퍼포먼스와 신체의 의미

윤진섭


Ⅰ. 머리말

현대예술의 장르나 매체 중에서 퍼포먼스(Performance Art)는 흔히 가장 개방적인 형식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body)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는 일반적인 미술의 특성인 결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된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대부분의 미술 작품이 작가에 의해 작업실에서 만들어진 다음 화랑 벽에 걸림으로써 마무리되는 것에 비해 퍼포먼스는 직접 관객의 앞에서 실연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관객 참여(audience participation)’를 들 수 있다. 이 점은 연극이나 무용과 같은 기존의 공연예술(performing art)에서 찾아볼 수 없는 퍼포먼스의 한 특징적 양상이다. 실험성이 중시되는 퍼포먼스는 관객의 존재를 작품을 이루는 한 요소로 수용함으로써 비결정성(indeterminacy) 내지 즉흥성의 미학을 창조한다. 그러나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언급하자면, 모든 퍼포먼스가 즉흥성을 지닌 것은 아니며, 작가에 따라서는 관객참여가 없는 경우도 있고 면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 가령, 1975년에 실연된 더그 홀(Doug Hall)과 조디 프록터(Jody Procter)의 <미션 거리를 걷기>는 계산되고 절제된 행위를 통하여 마치 인체조각을 보는 듯한 착각을 가져다 주는 작품이다. 퍼포먼스의 이러한 단면은 퍼포먼스에 대한 정의를 보다 어렵게 만든다. 퍼포먼스에 관한 정의가 논자들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현상이라는 점이다. 현대예술상의 장르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매체이며, 예술의 개념 확장을 위한 실험적 현상이란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Chantal Pontbriand, Introduction:Notion(s) of Performance, Performance by Artists, edited by AA Bronson and Peggy Gale, Art Metropole, Toronto, Canada, 1979
그것은 전통적인 예술의 서열(hierarchy)이나 작품의 생산자와 작품, 수용자의 제도적 관계를 허무는 “포스트 모던의 통합 양상(Performance, the unifying mode of the postmodern)”이다. 2) Michel Benamou, 'Presence and Play', Performance in Postmodern Culture, ed Michel Benamou et Charles Caramello, Madison, Wisc., Coda Press, 1977.p vii, viii.


퍼포먼스는 또한 제의(ritual)와 관계가 깊다. 그것은 연기에 의해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공연예술과는 달리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분을 철폐한다. 이 경우에 관객참여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의 원형은 고대의 제의 형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제의나 축제의 일반적 공간구조는 원형인데, 제인 해리슨(Jane Harrison)에 의하면 이는 농경 사회 특유의 생활양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3) Jane Harrison, Ancient Art & Ritual, Oxford Univ. Press, England, 1951

농경사회에서 춤은 어떤 성스러운 것을 둘러싸고 도는 형태를 지녔는데, 처음에는 오월제의 기둥이나 추수한 옥수수더미 등의 형태로 나타나다가 나중에는 신상이나 제단을 둘러싸고 돌게 되었던 것이다.

관객참여의 입장에서 볼 때, 고대의 제의에서 처음부터 배우와 관객의 구분이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해리슨은 드라마의 어원에서 배우와 관객의 분리가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음을 밝혀냈다. 드라마의 어원은 ‘dromenon’ 인데, 이는 ‘행해진 것’을 의미하였다. 드로메논에서 관객이 실제의 행위를 통해 예술의 기쁨을 맛보았다면, 드라마에서는 배우를 통한 대리 체험이 나타나게 되고 직업의 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배우와 관객의 분리라는 형식이 공연예술의 긴 역사를 통해 고착되게 되고 자율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관객참여는 점차 사라지게 된다. 관객참여가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은 1960년대의 실험연극과 해프닝에 이르러서이다. 주디스 말리나(Judith Malina)와 줄리앙 베크(Julian Beck)를 중심으로 한 리빙시어터(The Living Theatre), 아르토의 잔혹극, 헤르만 니치의 행위극, 플럭서스(Fluxus) 그룹의 실연, 앨런 카프로의 해프닝이 여기에 속한다. 4) 윤진섭, 행위예술감상법, 대원사, pp21-3.



본고에서는 퍼포먼스가 지닌 관객 참여적 특징이 현대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을 고(故)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자유국제대학 프로젝트와 플럭서스 작가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고찰되어야 할 것은 현대미술에서 소위 몸(body)의 의미이다. 그 이유는 회화, 조각, 공예, 디자인, 건축 등 미술의 제 장르는 이제까지 상상력을 매개로 한 인간의 정신활동으로 간주돼온 탓에 정신성이 강조되어온 반면, 그러한 활동의 직접적 매개체인 몸, 다시 말해서 신체는 상대적으로 폄하돼 왔기 때문이다.

현대회화사에서 본격적으로 신체성을 부각시킨 작가로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을 들 수 있다. 그의 드리핑 작품은 비록 그것이 결과로서의 작품으로 존속되는, 따라서 고전적 범주에서의 회화적 개념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에 주목한다면 시간의 지속 개념으로서의 퍼포먼스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가 폴록 작업의 이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행동회화(Action Painting)’로 부른 것은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폴록의 이러한 행위를 통해 화가를 단순히 캔버스 앞의 방관자가 아닌 행위 자체를 회화의 주제로 만든 행위자로 간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프랑스의 누보 레알리즘 작가인 이브 클랭(Yves Klein)은 인체를 붓으로 삼아 실연을 함으로써 신체성을 더욱 강조한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인체측정(Anthropométries)>은 벌거벗은 여자 모델의 몸에 자신의 고유한 청색 물감(IKB:International Klein Blue)을 묻혀 바닥에 펼쳐진 큰 종이에 찍은 대표적인 그의 작품이다. 그는 이런 일련의 행위 작품을 통하여 신체의 건강은 정신적 초월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현대미술에서 몸이 하나의 주제로 부각되게 된 것은 포스트 모던 문화 현상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몸은 고대 희랍 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서구 지성사에서 대체로 정신 혹은 영혼 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미술계에서 그 중요성이 다시 부상된 것은 20세기 후반부에 들어서이다. 미래파, 다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액션 페인팅, 보디 아트, 비엔나 액션 그룹, 해프닝 등 20세기에 나타난 다양한 신체 미술적 경향은 현대 퍼포먼스의 줄기를 이루는 동시에 미술에서 몸을 주제로 삼은 선례들이다.
미술에서의 몸의 의미와 그러한 몸이 직접적으로 예술의 현장에 뛰어듦으로써 이루어지는 관객참여는 역동적인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미술교육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결과로서의 작품에 대한 미적 향수가 관조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에 비해 참여적 형태를 띠며, 환경미술이나 해프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관객이 작품의 제작과정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창작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기도 한다. 요셉 보이스의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발언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깊숙이 숨어있는 창조적 재능을 계발하자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미술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여겨진다.


Ⅱ. 요셉 보이스의 자유국제대학(Free International University) 프로젝트

자유국제대학(FIU)이란 개념은 요셉 보이스의 제안으로 캐롤린 티스달(Caroline Tisdall)에 의해 ‘창조성과 인접 학문간의 공동연구를 위한 자유국제대학(Free International University for Creativity and Interdisciplinary Research)’의 설립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제출했던 한 보고서에 근거한다. 1972년에 이 프로젝트를 구상한 요셉 보이스는 국가 경영의 제도 기관들이 전문가 양성에만 급급한 나머지 이의 구현에 필요한 각종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분석에 주목하게 된다. 그에 의하면 학생들의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역할을 함양하는데 있어서 현재의 교육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5) Performance by Artists, pp 49-50.

이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의 구절이 들어있는데, 여기서 보이스의 현대교육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창조성은 예술의 전통적 형식들 가운데 하나를 실천하는 사람들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예술가들에게 있어서도 창조성은 예술의 훈련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우리들 각자는 경쟁심과 성공에 대한 억압된 추구에 가려진 창조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을 인식하고, 탐구하고 계발시키는 것이 곧 이 학교의 역할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1977년 카셀 도큐멘타(Documenta 6 Kassel)를 통해 실천에 옮기게 되는데, 이때 더블린에 본부를 둔 자유국제대학의 카셀 분교가 설치되어 100일간의 회기동안 다양한 주제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육적 실천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학생들로 하여금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데 현대의 교육이 실패하고 있다는 사려 깊은 진단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즉, 전문가들에 대한 요구가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는 점차 소멸돼 가고 있다는 점, 또한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이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로부터 국가 경영의 제도교육기관에게 전문가들을 끊임없이 양성하도록 하는 정치적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는 국가 경영의 제도교육기관이 지닌 이러한 문제점과 전통적 교육구조와 방식은 궁극적으로 사회의 각 분야들이 파편화되고 고립되는 상황을 영속화시킴으로써 현재의 사회적 위기를 더욱 고조시킬 우려가 있다고 전망했다. 6) 윤진섭, 퍼포먼스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 부산국제아트페스티발 세미나 자료집.
그는 그러한 위기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 연유한다고 진단하였다.

가) 전문가의 훈련을 위한 교과(disciplines)의 분리가 오직 전문가들만이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들, 즉 경제학, 정치학, 법, 문화에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강화시키고 있다.

나) 창조적인 분야들과 사회 및 과학적인 분야들과의 구분이 오히려 창조성은 예술가, 건축가, 음악가 등의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제한되어 있다는 생각을 강화시키고 있다.

다) 학생은 독립적이며 유기적이고 비교적인 사고의 모델을 발전시키기 어렵다.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상상력이 풍부한 기여를 하거나 그것을 사회생활과 연계시키는 데 있어서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라) 아카데믹한 연구의 사회적 고립 때문에 학교, 대학, 연구기관들은 공동체 내에서 에너지 센터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이 경우 그 손실은 상호적이다.

마) 사회의 위계질서와 기회의 불평등은 보다 수준 높은 교육에 대한 제한된 입문에 의해 더욱 영속화된다. 이러한 제도에 의해 생성되는 경쟁은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비유기적이며, 비창조적이다.

바) 사립학교에 대한 실험적이며 진보적인 학습방법의 제한은 특권적인 제도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7) Performance by Artists, pp.51-2.


현대교육이 지닌 이러한 문제점에 주목한 요셉 보이스는 이에 대한 대안적 교육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자신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하인리히 뵐 등을 포함, 저명한 문화예술계의 인사들과 함께 1972년에 ‘더블린 프로젝트’를 발표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유국제대학이다. 그는 이 대학의 설립 개념을 통해 열린 형식의 교육을 주창하였다. “창조는 단순히 재능이나 직관, 상상력 등을 포괄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연관된 다른 영역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 자료를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므로 여기에는 노동자, 가정주부, 농부, 의사, 철학자, 판사 등등 직업의 귀천과 전공을 따지지 않고 참여하여 창조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창조적 민주주의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관료주의이며, 규격화된 대중문화의 공격적인 증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8) Performance by Artists, pp.55-6.


보이스의 이러한 견해는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입장과 유사하다. 하버마스는 모더니티 이후 서구사회에서 진행된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성과가 20세기의 문화적 상황에서는 지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음을 우려한다.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물질의 공정한 배분과 이를 통한 복지의 실현을 꾀하고자 했던 계몽주의 프로젝트는 과학, 윤리, 예술의 분화로 말미암은 사회 각 분야의 전문화·자율화를 초래함으로써 결국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추구를 불가능하게 함은 물론 전문가의 문화에 대한 불신과 부정을 초래하였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막스 베버(Max Weber)의 관점에서 찾고 있다. 주지하듯이 베버는 문화적 모더니티를 종교와 형이상학 분야에 나타난 실체적 이성이 과학, 도덕, 예술이라는 세 가지의 자율적 영역으로 분화되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자율적 영역으로의 분화는 종교와 형이상학에 의한 통일된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한다 9)Jürgen Habermas, Die Moderne ein unvollenedetes Projekt , 1981. 모더니티:미완성의 프로젝트, 이영철 역, <<현대미술비평 30선>>, 중앙일보사, 1987, pp.166-7, 윤진섭, ‘퍼포먼스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서 재인용.

그런데 이러한 통일된 세계관의 붕괴는 학문, 종교, 예술이 제도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세계에 대한 총체적 전망이 불투명하게 되었으며, 이제 개별 문화영역에서의 과학적 언술, 도덕과 법률이론, 예술의 생산 및 비평과 같은 문제들은 전문가들의 관할 영역으로 전가되게 되고 더욱 전문화됨에 따라 인식적-도구적(cognitive-instrumental), 윤리적-실천적(moral-practical), 미적-표현적(aesthetic-expressive) 합리성의 담론들은 일반인보다 더욱 전문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됨으로써 그들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 10)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책, p. 166, 윤진섭,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특정한 담론의 전문가 계층에 의한 장악은 일상적 담론의 소통을 어렵게 함으로써 생활세계를 더욱 황폐화시키게 된다. 계몽주의에 의한 모더니티 프로젝트가 세계에 대한 몽매와 비의를 해소함으로써 무지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자승자박을 하는 패러독스를 야기하고 만 것이다. 카셀도큐멘타에서 열린 100일간의 자유국제대학에서 보이스는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을 나누고 공유하는 새로운 교육방식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의 이러한 시도는 전문화 시대에 불어닥친 담론의 위기적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11) 윤진섭,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Ⅲ. 플럭서스(Fluxus): 일상적 삶과 예술의 결합

보이스도 참여한 바 있는 플럭서스는 아직도 그 정의가 내려지지 않고 있는 모호한 하나의 예술현상이다. 플럭서스는 시작된 이래 40년이 경과하였지만, 회고전의 형식으로 지금도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이미 노경에 접어든 생존 작가들은 현재도 다양한 형태의 공연이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흐름”을 의미하는 플럭서스는 말 그대로 1962년 비스바덴에서의 첫 콘서트 이후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으며, 후대의 예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더 케프케,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예술혼은 후예들의 사고와 작품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플럭서스를 가장 플럭서스답게 만드는 속성은 ‘예술과 삶의 결합’이다. 예술과 삶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플럭서스 멤버들의 사고는 실연(實演), 전시, 콘서트, 집회, 출판을 통해 표출되었다. 딕 히긴스(Dick Higgins), 알리슨 놀스(Alison Knowles),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 백남준(Nam June Paik), 벤자민 패터슨(Benjamin Patterson), 에멋 윌리암즈(Emmett Williams), 볼프 포스텔(Wolf Vostell) 등 비스바덴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초기 플럭서스 멤버들을 비롯하여 에릭 엔더슨(Erik Andersen),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헨닝 크리스찬센(Henning Christiansen), 필립 코너(Philip Corner), 요코 오노(Yoko Ono), 다니엘 스포에리(Daniel Spoerri) 등 다소 늦게 합류를 했던 다양한 전공의 예술가들은 유우머, 개그, 놀이, 퍼즐, 조크와도 같은 실연을 통하여 예술과 삶의 통합을 실천에 옮겼다. 20세기 초엽의 다다(Dada)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반예술 지향의 보헤미안들은 매체간의 다양한 결합(Intermedia)을 통해 예술에 있어서의 위계질서(hierarchy)를 파괴함은 물론 나아가서는 예술과 삶 사이에 굳게 잠겨있던 빗장을 열고자 하였다. 고상하기만 한 것으로 치부되던 예술이 일상적 삶의 맥락으로 들어섰을 때, 거기에는 늘 평범한 시민들, 즉 관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딕 히긴스는 ‘인터미디어’란 새로운 개념의 매체를 통해 예술과 삶 사이의 인위적 경계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예술과 삶 사이에 경계가 없다면, 각기 다른 예술 형식들 사이에도 역시 경계가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12) 켄 프리드만, 플럭서스 1992, 플럭서스, 김홍의 편저, 에이피인터내셔널, 1993, p. 029.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프로시니엄 아치’의 형태는 예술과 삶의 사이에 엄격한 칸막이를 세움으로써 삶으로부터 예술을 분리시켰다. 그것은 조각에서의 대좌, 회화에서의 액자처럼 예술을 하나의 허구로 인식하는 전제주의적 지배논리의 산물이다. 억압으로부터의 예술의 해방과 삶 속으로의 침투는 ‘드로메논’을 향한 현대 예술가들의 마음에 내재된 무의식적인 사고의 발로이다. 보이스의 사회 조각, 플럭서스 멤버들의 실연, 앨런 카프로의 해프닝 등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관객참여는 원시종합예술이 지녔던 삶의 본연성, 삶의 리얼리티 회복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Ⅳ. 끝맺는 말

생전의 보이스는 거리청소를 비롯하여 식목행사, 정당의 결성 등 넓은 의미의 예술 내지 사회활동을 통하여 인간 삶의 본연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플럭서스 작가들은 일상적 삶에 깊숙이 침투하여 예술을 삶과 동일시하고자 하였다. 앨런 카프로를 비롯한 해프너들은 실제 사람들을 콜라주의 일부로 사용함으로써 가상을 실제로 치환시키고자 하였다. 게릴라 아트 그룹은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예술의 직접적인 효용성을 추구하였다. 이들의 예술 행위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양상은 예술 자체의 목적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목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이 삶에 대한 정서의 구현인 반면, 제의는 실제적인 목적을 지닌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넓은 의미의 예술을 추구하는 현대의 퍼포먼스가 점차 제의의 형태를 닮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가상과 실제의 거리 좁히기’의 양상을 띤 퍼포먼스가 역사의 선조적(linear) 진행으로부터 원환적(circular)인 모습으로 선회하고 있는 듯한 현상은 지금은 잃어버린 ‘드로메논’으로의 회귀를 시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출처 / 광주교육대 세미나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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