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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연가(戀歌) : 김아타

윤진섭

2002 상파울로비엔날레 참가기념 김아타 작품집


Ⅰ.

'광기가 없으면 밧줄을 끊고 자유로워 질 수 없다.'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소설 <희랍인 조르바>에 나오는 이 말 만큼 김아타의 작품세계를 대변해 주는 경구는 없다. 종교적 금기, 사회적 관념, 신체의 한계,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하는 김아타 작업의 요체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자유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집단생활을 통해 어떻게 사회에 순응해 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주목한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그가 이러한 관점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순응의 대척점(對蹠點)에 있는 저항의 힘에 주목한다. 그는 인간이 사회에 동화되면서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유와, 그것을 포기하면 할수록 점점 증대되는 사회적 억압과 통제가 다름 아닌 인간의 굴레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억압의 상징이 바로 그가 즐겨 사용하는 아크릴 박스가 아닐까? 아크릴 박스로 대변되는 <뮤지엄 프로젝트>(1995-현재)가 자연에 누드 상태의 인체를 널어놓은 <해체 시리즈>(1992-1995) 다음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이러한 분석은 매우 자명해 보인다. 즉, <해체 시리즈>가 인간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고자 한 시도였다고 한다면, <뮤지엄 프로젝트>는 인간을 억압의 상징체계로 환원시킨 일종의 가역적(可逆的) 풍경인 것이다.
이 글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인간과 자연을 소재로 꾸준히 작업을 펼쳐온 김아타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볼 때 확연히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이력이다. 특히 대학시절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며, 사진에 매료되었는가 하는 점은 나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그에 대한 나의 의문은 그와의 오랜 교분을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범상치 않은 그의 인생 편력과 예술에 대한 열정, 작업 과정에서 느껴지는 그 특유의 카리스마 등등 그릇이 큰 예술가에게서 볼 수 있는 예술적 천품(天稟)이 한 몫을 했다.


Ⅱ.

탁월한 재능을 지닌 예술가들이 항용 그렇듯이, 김아타 또한 정신적 방랑과 유적(流謫)으로 얽힌 삶을 살아왔다.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인자들이 배면의 층을 이루고 있다. 대학시절 전공인 기계공학보다는 사진에 탐닉했다든지, 철학 강의실을 기웃거리는 빈도가 잦았다는 그의 술회는 그때부터 이미 내면에 예술에 대한 열정이 싹트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대학시절, 전공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면서 문학을 비롯하여 철학, 심리학, 예술, 사진, 여행 등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김아타는 이 기간동안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을 쌓게 된다. 또한 비슷한 또래들 보다 약간 늦게 대학에 진학한 그는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동안 국내 여행을 통해 다양한 인간과 사물을 접하게 되는 기회를 갖는다. 사진 촬영과 시작(詩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무렵의 정신적 방황과 육체적 방랑의 경험은 그의 작품세계를 숙성시킨 가장 큰 요인이다.
인간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김아타의 예술적 노력은 인간을 소재로 전개되는 작업들 속에 녹아 있다. 인간은 그에게 있어서 마를 줄 모르는 영감의 원천이자 하나의 화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선과 악, 어둠과 밝음, 강인과 나약, 고귀와비천, 거짓과 진실의 야누스적 얼굴을 지닌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의 일곱 가지 본능을 지닌 채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반복하는 인간의 진면목은 과연 무엇인가? 김아타는 이 풀기 어려운 화두를 사진 작업을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비교적 초기작업에 해당하는 <정신병자 시리즈>(1985-86)는 인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몰입했던 연구의 결과물이다. 경남에 위치한 모 정신병원에서 약 1년 간에 걸쳐 350여 명의 정신병자들을 관찰하며 찍은 다큐멘타리 형식의 이 사진들은 비단 예술사진으로서 뿐만 아니라, 일종의 사회학 내지 임상의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정신병자들과의 교유를 통하여 김아타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나누는 기준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이성과 광기가 혼재된 인간의 행동, 일상과 일탈을 둘러싼 인간의 보편적 행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정신병자에 대한 관찰을 통해 실현된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보는 정신병동의 단면들은 세계를 끊임없이 분절하고 경계짓길 즐겨하는 이성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이룩한 제도적 산물에 다름 아니다. 미셀 푸꼬의 말을 빌리면, 광기와 이로 인한 감금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지식과 권력의 공생 관계, 그리하여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성적 전략의 산물이 바로 감옥(정신병원) 아닌가. 그는 정신병원에서 수많은 광인들을 만났다. 정상과 비정상, 일상과 일탈에 대한 면밀한 관찰은 훗날 그의 작업에서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로 연결되기에 이른다. 최근 그는 자신의 예명을 아타(我他)로 개명함으로써, 나와 타자 사이의 대립을 허묾으로써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인간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다진 바 있다.




Ⅲ.

내가 있음으로써 타자가 존재한다는 실존적 의식은 그의 전 작업을 관류하는 근본정신이다. 자신이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에 존재함으로써 타자의 존재 의의가 있다는 이 자명한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처럼 보인다. '나는 실존주의자다'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천명해 온 그는 지금 그리고 여기를 시(時)?공간적(空間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날줄과 씨줄로 이루어진 세계인식의 가늠자로 이해한다. 칼 야스퍼스의 말을 빌리면, 그는 삶의 도정에서 만나는 타자들에게 마음을 개방하는 사람이다. 그는 독단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언제나 가슴을 열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의 정신적 방황은 궁극적인 진리의 부재에 대한 확인으로 점철되어 있다. 다시 야스퍼스의 말을 인용하면, '세계는 역설(paradox)이며, 인간의 인식은 토막들의 집합'이다.
김아타의 작업은 부정을 통한 변증법적 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물의 존재에 대한 부정, 사태의 현전(現前)에 대한 부정이 작업의 바탕을 이룬다. 인간을 찍되 인간을 부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부정은 다시 다른 사물로 나아간다. 그러나 사물은 다시 부정되며, 그러한 부정은 다시 제3의 타자를 향해 나아간다. 양파를 쪼개고 쪼개면 눈앞의 양파는 사라지나 개념으로서의 양파는 남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가 흔히 사물을 가장 정확하게 재현하는 수단으로 알려진 사진 매체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역설이다. 그러나 그는 '사진으로 진실을 말하거나 사진이 진실을 잘 대변해 준다고 믿지'(김아타, 작업노트)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진은 '진실을 위장한 진실과 반대되는 것에 더 솔직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찍었다. 그것은 과연 진실인가? 혹시 미리 설정된 어떤 관념을 찍은 것은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롤랑 바르트가 말한 스투디움(studium)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그의 이런 방법적 회의는 다시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에서 인간문화재로, 인간문화재에서 대지 위의 풀, 나무, 돌 등등으로 옮겨간다.
순수에 바치는 그의 열정은 때로 무한한 인고(忍苦)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대학시절, 정신적 방랑기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타자에 대한 관심이 결실을 맺은 것이 <정신병자 시리즈>와 <아버지 작업> 이후에 이루어진 <인간문화재 시리즈>(1989-1990)이다. 약 2년 간에 걸쳐 그는 밀양 백중놀이의 기능보유자 하보경 옹을 비롯하여 발탈의 이동안 옹, 단청장 만봉스님, 진도 씻김굿의 김대례 여사, 서해안 배연신굿의 김금화 여사, 동해안 풍어제 별신굿의 김석출 옹 등 인간문화제 150여 명의 인물사진을 찍었다.
김아타는 인간문화재들을 만난 시절이 '많은 공부를 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전 작업과정을 볼 때, 이 <인간문화재 시리즈>는 관념적인 작업의 마무리에 해당한다. <정신병자 시리즈>에서 드러나는 문화적인 취미(가령, 롤랑 바르트가 말한 스투디움과 같은 의미에서의)에서 벗어나 <아버지 작업>에서 엿보이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보다 집약적으로 삼투된 것이 바로 이 <인간문화재 시리즈>이다. 그러나 인물의 정면 모습을 다룸으로써 초상사진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작품들은 너무 평범하여 사진 미학적인 의미에서의 새로움을 찾아보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일련의 시리즈 작업이 그의 작품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그 이유는 <해체 시리즈>(1992-95)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실험들이 이 시기에 터득한 세계와 인간의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 <정신병자 시리즈>에서 <인간문화재 시리즈>로 이어지는 5-6년 간은 그 이전 습작기의 연장선상에서 마음을 열고 작업을 한 순수한 시간이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정신적 방랑자 특유의 열린 가슴으로 편견 없이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궁극적 진리에 대한 부정을 통해 시야를 넓혀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Ⅳ.

<인간문화재 시리즈>와 <해체 시리즈> 사이에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 시리즈>(1990-92)가 있다. 인간에게서 사물로 관심을 돌리는 시기이다. 이 작업은 <아버지 시리즈> 시기를 전후하여 한바탕 정신적 질곡을 겪은 뒤 인간에게서 자연으로 시선을 돌려 자연과의 교감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을 새벽 3-5시에 해당하는 인시(寅時)에 수행했다. 석가모니가 득도한 시간으로 알려진 이 때는 24시중 가장 명징하며 새로운 하루가 탄생하는 청정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희미한 별빛과 달빛에 의존하여 1-2시간동안 노출시간을 유지하며 대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작업을 통해 그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많은 체험을 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은 지금 그리고 여기의 수많은 단면들의 조합이라는 것, 그 사이에 사물이 시시각각 새로운 옷을 입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사물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 세계는 결코 조작될 수 없으며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흑백사진으로 이루어진 <세계 내 존재 시리즈>는 박명(薄明)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자태를 드러낸 자갈, 나무뿌리, 풀 등을 촬영한 것이다. 하이데거(그의 세계 내 존재라는 작품 명제도 하이데거에게서 따온 것이다)의 기초적 존재론의 중심개념인 세계 내 존재에 있어서 현존재(Dasein)는 고립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 속의 여타 존재와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이며, 하나의 가능태(M glichkeit)로서 지향성을 지닌 존재이다. 김아타가 인간의 이해에서 출발하여 사물에 대한 이해에로 나아가고, 거기서 다시 인간과 자연의 통합 과정을 거치는 국면의 이행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변증법적 부정의 확인에 다름 아니다. 즉 세계에 대한 이해는 필연적으로 <해체 시리즈>로의 이행, 다시 말해서 미래로의 열린 지평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체 시리즈>(1992-95)는 자연과 인간이 통합된 지평을 보여준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해체는 관념 덩어리인 인간을 자연의 밭에 씨 뿌리는 행위'이다. 그의 전 작업에서 <해체 시리즈>가 지닌 의미는 이 작업에 들어서 비로소 낯설게 하기(소외) 기법이 등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 시리즈 작업이 주는 충격은 무엇보다 자연에 널브러진 누드에 기인한다. 경사면을 타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에 누운 벌거벗은 남녀의 모습은 무엇보다 그것이 지닌 비현실적인 장면 때문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도로의 양쪽이 차단된 상태에서 연출된 이 장면은 하나의 퍼포먼스이다. 밭에서, 황량한 산야에서, 습지에서, 폐선이 나뒹구는 선착장에서, 각기 장소를 달리하며 연출된 <해체 시리즈>에는 기록의 결과물로서 사진의 이면에 숱한 일화들이 숨겨져 있다. 이 작업에 이르러 그는 무리를 이끄는 그룹 리더로서의 예술가적 면모를 보여준다. 촬영과 관련된 스탭진과 남녀 참여자들을 지휘하는 연출자로 변신한 것이다.
'해체는 진정 자유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진보는 진보에 의해 파멸된다'고 말한다. 이 말을 할 때 그는 현대의 기술문명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반성 없는 진보는 결국 진보에 의해 파멸될 것이며, 나의 작업은 그 진보의 원심력을 제어하는 반성에서 출발한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리하여 기술 중심의 진보로부터의 인간 해방은 진정으로 자유를 획득하는 순간에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이런 관점은 다소 나이브한 측면이 있지만, 자연에 벌거벗은 인간군상을 대비시키는 과감한 전략은 이후 <뮤지엄 프로젝트>와 <니르바나 시리즈>의 바탕이 되고 있다.




Ⅴ.

'뮤지엄 프로젝트는 나의 사유와 실존의 집이다.'
<뮤지엄 프로젝트>에 부쳐 작가 김아타는 이렇게 같이 말하였다. 1994년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 기획은 <해체 시리즈>의 연장이다. 이 작업은 설치작업과 병행하여 퍼포먼스로 이루어지지만, 관객들은 오로지 사진으로만 만나게 된다. 8x10인치(20.3x25.4cm) 대형 필름에 기록되는 그의 퍼포먼스 장면들은 극명한 리얼리티를 지닌다. 그가 이동하기에 거추장스런 대형 카메라를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이 리얼리티 때문이다. 흔히 퍼포먼스의 기록 매체로 스냅 사진에 편리한 35밀리 소형 카메라를 선호하지만, 단순한 기록적 기능보다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그는 굳이 대형 카메라를 택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퍼포먼스의 특징인 사건보다 사진미학을 더 추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작품의 구상에서 장소의 선정, 등장인물의 섭외에 이르는 과정은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이다. 그의 작업이 워낙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예외적인 것인 까닭에 뜻하지 않은 사태들이 왕왕 발생하기도 한다. 가령, 법당의 연꽃 보좌 위에 부처 대신 벌거벗은 남녀를 앉히기까지에는 지난한 설득과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이 힘겨운 작업을 극복해 낸다. 그의 투철한 작가의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뮤지엄 프로젝트>>는 주제에 따라 <필드 시리즈>, <전쟁기념관 시리즈>, <섹스 시리즈>, <홀로코스트 시리즈>, <창녀 시리즈>, <결혼 시리즈>, <가족 시리즈>, <동성애 시리즈>, <자살 시리즈>, <니르바나 시리즈> 등으로 나뉜다. 이들 시리즈의 등장인물들은 니르바나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크릴 상자 속에 갇힌다. 그는 설정된 국면과 등장인물에 아크릴 상자를 덧씌움으로써 이 모든 것들을 사유화 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사전적인 의미의 박물관을 사적(私的)인 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박물관의 기능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을 수집, 보존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그의 박물관은 사적인 관심사에 대한 의미부여, 즉 밑줄긋기이다. 말하자면 아크릴 상자는 대상과의 거리두기, 곧 소외효과의 유발을 위한 장치인 셈이다. 바닷가, 새벽 도심의 거리, 백화점, 법당, 작업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그의 퍼포먼스는 그 자체 일련의 초현실적 풍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진은 일상과 상상력, 현실과 초현실 사이를 이어주는 중개자이다. 관객들이 맞닥뜨리는 이 진기한 광경은 김아타의 예술이 주는 감동적인 선물이다. 예술이 열어 보여주는 신선한 지평을 통해 관객들은 새로운 세계에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김아타의 <뮤지엄 프로젝트>에서 아크릴 박스는 기존의 관념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혁파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는 고정된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저항적 태도를 보인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주요 기제가 바로 고정관념과 이데올로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부처와 같으며 그것은 또한 미물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그의 말속에는 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외침이 담겨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언명이 다시 상기되는 대목이다. '광기가 없으면 밧줄을 끊고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는 불교의 선수행(禪修行) 방식과도 통한다.
<뮤지엄 프로젝트>중에서 비교적 평범한 축에 속하는 <필드 시리즈>(해변이나 도심의 거리 등지에서 누드의 남녀를 촬영한 작품) 이후, <홀로코스트 시리즈>, <전쟁기념관 시리즈>는 형식상 보디 아트적 경향이 강하며, <자살 시리즈>, <창녀 시리즈>, <가족 시리즈>, <결혼 시리즈>, <동성애 시리즈>는 작가의 사회적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홀로코스트 시리즈>는 보디 아트적 경향이 강한데, 신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제시하고 있다. 마치 도살장에 매달린 소처럼 일련번호가 적인 꼬리표를 부착한 채 천장에 매달린 신체는 홀로코스트가 보여주는 인류의 잔학상에 대한 고발처럼 보인다.


Ⅵ.

<니르바나 시리즈>는 <<뮤지엄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불교적 색채가 강하며, 아울러 동양적인 문화의 정수(精髓)가 잘 녹아든 김아타 작업의 결정판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작업에 와서 비로소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서의 아크릴 박스가 제거된다는 것이다. 이미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한, 그래서 자칫하면 그것이 또 다른 하나의 이데올로기, 즉 작품 감상에 따른 걸림돌(고정관념)로 작용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취한 조치이다. <니르바나 시리즈> 중에는 법당의 연꽃 보좌 위에 삭발한 채 벌거벗고 앉은 남녀의 몸에 아크릴 박스를 씌운 작품이 더러 있기는 하나, 대부분은 박스가 제거된 상태이다. <니르바니 시리즈>는 그 어느 것보다도 화려하며 기교적인 동시에, 설치미술적인 측면이 강하다. 다시 말해서 세팅의 미학이 잘 드러난 것이 <니르바나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때로 <홀로코스트 시리즈>와 <전쟁기념관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엽기적인 관심을 서슴없이 표현하기도 했던 그는 <니르바나 시리즈>에 들어와서 에로티시즘이 주는 탐미주의에 더욱 경도된다. 일찍이 <섹스 시리즈>에서 실험했던 미학적 성과들이 잘 집약된 느낌이다. 탄트라에 연원을 둔, 모델들의 절제된 포즈(특히 손은 불상의 손의 포즈를 재현하고 있다)와 완벽한 분장은 설치된 장식물들과 함께 미장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니르바나 시리즈>는 형식적인 면에서 대략 네 부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기존의 아크릴 박스를 사용하여 벌거벗은 남녀의 모델들을 법당이나 숲, 정원 등지에 배치하고 촬영한 것, 둘째는 푸른색의 배경에 남녀간의 성적 결합을 암시하는 다양한 포즈를 찍은 것, 셋째는 밀랍으로 주조한 천불상을 배경으로 벌거벗은 남녀 모델이나 개를 촬영한 것 등이 그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조선왕조 궁녀의 화려한 궁중대례복을 입은 모델을 벌거벗은 남자와 대비시킨 것과 십자가로 상징되는 기독교적 이콘과 연꽃 보좌로 상징되는 불교적 이콘을 결합한 것이다. 이 <니르바나 시리즈>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김아타는 고정관념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감한 해체를 시도한다. 기독교적 상징인 십자가가 불교적 이미지와 결합된다든지, 부처를 안치해야 할 연꽃 보좌에 개를 앉히는 따위의 도발적인 발상은 종교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인정과 함께 '만물이 곧 부처'라는 불교의 심오한 교리에 대한 용인처럼 보인다.
낯설음의 효과에 의한 거리두기의 전략은 <니르바나 시리즈>에서도 볼 수 있다. 도심의 도로 한 가운데나 해변에 산처럼 쌓인 밀랍 천불상을 비롯하여 숲 속에 부처의 포즈를 취하고 연꽃 보좌 위에 앉아있는 남자 모델, 황토 언덕 위에 설치된 밀랍 천불상을 배경으로 연꽃 보좌 위에 앉아있는 개 등의 장면은 작가적 상상력이 일상 현실과 결합됨으로써 소외 효과를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를 가리켜 실험작가 혹은 전위작가로 부를 수 있다면 그 기반은 탁월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형식, 기법, 전략들을 구사하는 데 있다.
<니르바나 시리즈>의 불교적 세계에서 기독교적 이콘으로 전환된 것이 최근에 그가 시도하고 있는 <지저스 시리즈>이다. 총 14개의 작품 중에서 현재 9번째까지 완성된 이 연작은 스타일리스트로서 김아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자주색 벨벳 커튼을 배경으로 높이 230 센티의 투명 아크릴 십자가를 설치한 뒤 예수의 제자를 암시하는 열 두 명의 모델을 십자가에 매다는 작업이다. 십자가의 밑에는 50센티의 높이에 80센티 길이의 아크릴 상자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자궁 속의 태아를 암시하는 벌거벗은 여자가 웅크리고 있다. 상자 위에 놓인 거대한 십자가에는 다양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벌거벗은 남녀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쇠사슬에 묶여 있다. 귀부인처럼 화려한 목걸이로 치장한 팔등신 미녀를 비롯하여 배꼽과 음부에 피어싱을 한 여자, 유두에 피어싱을 한 여자, 귀걸이를 한 남자, 노랗게 머리를 염색한 남자 등등 등장인물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이들의 몸에는 주사바늘이 꽂혀 있다. 지금 십자가의 맨 위에 장착된 링게르 병에 연결된 투명 비닐 호스를 타고 흘러나오는 다양한 색깔의 포도당이 막 주입되고 있는 중이다. 모델들 중에는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도 보인다. 마지막 사진은 모델들이 사라지고 십자가만 남은 풍경을 보여준다. 링게르병, 비닐 호스, 주사바늘, 쇠사슬 등 소도구들만 눈에 띈다.
이 <지저스 시리즈>는 종교적 관점을 떠나 한국의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충격으로 다가온다. 현재 한국에는 머리 염색, 피어싱과 같은 외국의 유행이 유입되면서 새로운 혼성문화(hybrid culture)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20대의 신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파급되고 있다.
기독교의 대표적 이콘인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김아타의 이 <지저스 시리즈>는 구원과 대속으로 상징되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 자칫 성상모독으로 읽힐 수도 있는 이 연작에서 기독교적 거룩의 개념은 현실적이며 값싼 키치의 개념으로 치환된다. 그의 작품에서 예수는 사라지고 없다. 손의 못 자국으로 대변되는 대속의 개념은 삶의 열락으로 대치되어 있다. 성(聖)은 세속적인 내용으로 치환되며, 십자가는 현실적인 인간들로 채워진다. <니르바나 시리즈>에서 엿보이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무화(無化)와 가치의 전복, 부정의 정신이 주요 전략으로 다시 차용되고 있는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도 죽여버리겠다(殺佛殺組)'는 선불교의 정신이 이 연작에도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김아타는 대기만성형의 작가이다. 처음에 평범한 인물사진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해체 시리즈>에 이르러 연극적인 세팅의 미학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 독창적인 기법은 <뮤지엄 시리즈>를 통해 더욱 대담해지며 보다 큰 스케일로 발전해 간다. 작은 시냇물이 대하를 이루듯, 지난 수년간에 걸쳐 그는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항해를 거듭해 왔다. 지금 그의 가슴은 원대한 포부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현재 중국의 천안문, 자금성, 만리장성 등지에서 전개될 <차이나 시리즈>를 기획하는 중에 있으며, 머지 않은 장래에 <뉴욕 시리즈>, <뉴욕에 온 부다 시리즈>를 실천에 옮길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개성이 강한 이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출처 : 2002 상파울로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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