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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영역 : 이강소

윤진섭

이인성미술상 수상기념전 - 이강소


Ⅰ.

흔히 이강소는 오리를 그리는 작가, 혹은 배를 즐겨 다루는 작가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작품세계가 지닌 소재적 측면이나 인상을 강조할 때 쓰는 말에 지나지 않을 뿐, 작품의 본질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이는 곧 그가 무엇을 그리든 그림의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대상의 직접적인 묘사에 있지 않음을 말한다. 캔버스에 바탕칠을 한 뒤 적당히 물기를 머금은 화면에 순간적인 필치로 담아내는 그의 그림은 다름 아닌 마음 속의 풍경이다. 평소에 보고 느꼈던 물상의 모습과 인상, 그 나타날 듯 하면서 사라지는 풍경의 한 자락이 그의 그림의 소재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대상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없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영역이 곧 그의 작품에 표현된 공간의 특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강소의 그림에 나타난 이 특질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색의 계조(gradation)에 의한 공간 층위의 암시이다. 그의 그림에는 회색조의 미묘한 뉘앙스가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마치 전통 수묵화에서 먹의 농담만으로 사물간의 거리감을 표현하는 것처럼, 그의 그림에서 색의 미묘한 톤(tone)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물상의 이미지나 거리감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의 그림에는 대상을 그렸다 지운 흔적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화면의 중간 톤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간의 층위에 대한 표현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타난 공간의 층위가 서양의 풍경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허상(illusion)이 아니라는 데 이강소 회화의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 그의 그림은 마음의 영역을 표현한 심의(心意)의 그림이기 때문에 허상이 자리잡을 여지도, 까닭도 없는 것이다. 그가 화면에 무수히 베풀어 놓은 필획들은 그 자체로 즉자적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전체 풍경에 종속된 것이라기보다는 각기 파편화한 것이며, 그런 까닭에 자율성을 획득한다. 오늘날 이강소를 가리켜 동양회화와 서양회화의 종합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면, 이는 다름 아니라 그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심의의 영역과 개념적 요소의 혼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하다.
이강소는 필획을 그을 때 두 번을 반복하지 않는다. 개칠을 하지 않는 그의 묘법은 서예의 법식(書法)에서 온 것이다. 그는 서예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유년시절을 한학과 서예를 중시한 집안의 분위기에서 자랐고, 그런 연유로 서예적 전통이 자연스럽게 몸 속에 체화된 것으로 짐작된다.
개칠을 하지 않는 것과 일필휘지에 가까운 즉발적인 필획은 작가의 말을 빌면, 아시아의 회화를 지향하는 태도의 표명이다. 그가 말하는 아시아의 회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서양의 회화에 결핍된 요소를 동양의 회화 전통 속에서 찾아낸 다음, 상호 종합의 과정을 거쳐 현대적으로 육화해 내는 문제를 가리킨다. 겸재 정선이 중국적 전통을 탈피하여 한국의 진경을 그리고자 했듯이, 그는 서양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는 오늘 한국 현대회화의 문제를 아시아적 전통 속에서 풀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Ⅱ.

이강소가 60년대에 앵포르멜 류의 그림을 그린 적이 있고, 70년대에 개념미술과 해프닝에 경사된 적이 있다는 사실은 현재 그의 화풍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곧 그가 어떻게 해서 서양회화와 동양회화간의 변증법적 종합을 지향하게 되었는가 하는 데 대한 정신적 배경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평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강소의 작업 영역은 비단 회화뿐만 아니라 판화, 설치, 퍼포먼스, 조각, 사진, 비디오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지난 40여 년에 걸친 그의 매체 편력은 현재 그의 회화에 고르게 반영되어 있다. 그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그의 회화와 조각에 나타나고 있는 개념적 요소와 행위성, 무작위성, 그리고 우연성이다.
우선 개념적 요소로는 70년대의 <무제> 연작이 현재의 그림에 미친 영향을 들 수 있다. 70년대 개념미술의 경향을 보여주는 이 연작은 캔버스에 실크스크린으로 리퀴텍스 튜브를 찍은 사진을 전사한 것이다. 그는 이 연작에서 회색조로 인쇄된 물감튜브의 이미지 옆에 실제의 물감을 듬뿍 찍어놓았는데, 이는 허상의 이미지와 실제의 사물을 대비시킨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경향에 속하는 다른 하나의 작품은 페인트 통에 꽂혀있는 붓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전사한 뒤, 사진 속의 바로 그 물감과 붓을 사용하여 캔버스의 절반을 녹색으로 거칠게 칠한 작품 이다.
이처럼 실제와 이미지간의 동떨어져 보이는 거리감의 표현은 90년대 이후의 <무제(Untitled)> 시리즈를 비롯하여 <강에서(From A River)>, <섬에서(From An Island)> 연작에 나타나고 있는 거리감의 표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연작들에 나타나고 있는 거리감의 표현은, 가령 그림의 상단부는 진한 회색조의 터치로 거칠고 크게 표현한 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품의 하단부에 배나 집, 오리 등을 작고 흐리게 표현하여 공간상의 현저한 거리감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정착한다. 이강소의 그림에서 이러한 표현법은 매우 독자적인 것이다. 단순히 몇 개의 선묘로 이처럼 선명하게 공간의 층위(거리감)를 암시한다는 것은, 그의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인 단색조가 야기한 미니멀한 느낌의 평면성과는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그림을 서양의 표상적 전통이 해체된 최후의 결과물인 미니멀 회화의 평면성과 비교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간상에 여러 층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표현기법과 유사한 사례를 전통 산수화에서 찾자면, 버드나무 가지가 휘휘 늘어진 아래로 배가 보이는 강가의 풍경을 그린 그림일 것이다. 이 그림에서 배는 거리감을 나타내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수화가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는 반면, 이강소의 그림은 아크릴릭 칼라라는 현대적 재료를 사용하여 추상적이며 단색조로, 평면적이며 미니멀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다소 진부한 표현을 빌면, 전통과 현대의 접맥 혹은 전통의 현대화라고 부를 수 있다.
예로부터 거리나 시간을 나타내는 우리말 표현에는 정확성이 부족한 것이 특징이다. 시, 분, 초와 같은 시간의 단위나 미터법의 표기는 서양의 문물이 전래된 이후에 생활화한 것이다. 십리가 채 못되는 거리를 가리키는 마장이나 한 차례 음식을 먹을 만한 시간을 대충 어림잡아 부르는 한식경은 모두 대충주의 문화의 소산이며, 동트면 밭에 나가던 농경시대 사고의 잔재이다. 예를 들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저∼기 할 때의 거리는 경우에 따라 오리도 될 수 있고 십리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강소의 회화 공간에 나타나는 거리감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의 그림에서 산의 능선을 표현한 선과 집의 거리는 실제 작품에서 몇 십 센티, 커봐야 일이 미터 남짓 하지만, 보는 이의 마음의 영역에서는 십리도 될 수 있고 백 리도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심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이기 때문이다. 그 무한의 공간을 그는 회색 단색조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닭을 이용한 퍼포먼스 작업 (1972)에서 보여주었던 행위의 우연한 흔적은 붓질을 할 때의 격렬한 동작과 함께 이강소 회화의 행위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의 그림 중 특히 1999년 무렵의 <강에서(From A River)>연작은 일필휘지의, 폭발하는 듯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흰 색 바탕에 짙은 회색 아크릴릭 물감으로 그린 이 연작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연상시킨다. 한 바탕 휘갈긴 필획들 아래 한가하게 떠다니는 두어 마리의 물오리를 그린 이 작품은 그러나 문자 그대로 풍경화가 아니다. 오리와 난마처럼 뒤엉킨 필획은 어떤 풍경도 재현하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필획 따로 오리 따로 인 셈이다. 이 그림의 원형을 보여주는 작품이 1978년에 제작한 비디오 작업 <78-1 Paint>이다. 이 작품은 흰색 페인트로 유리판을 칠해 가는 과정을 찍은 것이다. 비디오 모니터는 유리판 뒤에 서서 처음에는 가는 붓으로 횐 색의 선묘를, 그 다음에는 넓적한 붓으로 유리판 전체를 하얗게 칠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TV 모니터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완전히 하얗게 칠해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오직 흰색의 면이다.
이강소는 이 작업에서 보이는 유리판에 그려진 횐 선과 등장인물과의 거리를 그 이후의 판화나 회화작품에서 여러 차례 응용해 보여준 바 있다. 붉은 색 드리핑과 오리를 대비시킨 을 비롯하여 사진 이미지를 이용한 최근의 판화 연작들이 그것이다. 닭을 이용한 퍼포먼스에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바닥에 흩어지는 석고가루의 자취는 그의 회화에서 필획을 휘두름에 따라 캔버스 표면에 튀는 물감의 흔적을 연상시킨다. 행위가 야기하는 이 우연한 효과는 그의 그림이 지닌 또 다른 묘미이다.
무작위성은 이강소의 조각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미적 특질이다. 네모난 점토 덩어리를 두붓모를 자르듯, 잘라서 쌓거나, 원래의 점토 덩어리 자체를 여기 저기 자연스럽게 배열한 것이 그의 조각이다. 이때 모서리가 약간 이지러진 상태로 몇 개의 네모난 점토 덩어리를 역시 같은 점토로 만든 배와 함께 늘어놓음으로써 한가해 보이는 정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의 점토 조각에서는 우현 고유섭 선생이 한국미의 특질로 든 구수한 큰 맛 같은 것이 느껴진다. 우리의 메주나 잘 다듬어진 주춧돌에서 보는 것과 같은 비균제적이나 반듯하고 잘 생긴, 듬직한 맛이다. 최근에 그는 우리의 전통 가옥이나 풍경, 주춧돌, 성벽, 쪽마루 등을 소재로 한 사진작업에 심취해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시도와 그의 조각에 나타난 무작위성의 표출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어 보인다.


Ⅲ.

마음의 영역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말이 얼핏 이상하게 들릴는지도 모른다. 초현실주의처럼 무의식의 세계가 아닌, 이심전심의 마음의 영역을 어떻게 선과 색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강소는 분명히 그 영역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서있는 이 곳이 그대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보면 거기가 아닌가. 행위예술가 이건용은 그래서 여기, 저기를 가리키다가 결국에는 어디, 어디하고 찾아 헤맨 것이 아닌가. 이 언어의 상대성은 장소의 상대성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이강소는 복잡한 필획의 난마에서 벗어나 한 두 개의 선을 긋고 그 아래 자그마한, 집 같지도 않은 집을 그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의 화두는 중첩된 산과 산, 들과 들, 강과 강을 어떻게 하면 한 화면에 집어넣을까 하는 것이다. 도대체 마음의 영역에 있는 대상들을 화면에 집어넣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것은 '유리병 속의 파리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하는 비트겐쉬타인의 명제와 닮은꼴이 아닌가.

텅 빈 그림 속에 집 한 채가 있다. 그렇다면 내가 위치해 있는 곳은 여기쯤일까, 아니면 저만치 일까?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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