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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목소리-자연을 향하여

윤진섭

이 글은 원래 2000년 3월 27일부터 6월 7일까지 열렸던 제3회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 [한ㆍ일 현대미술의 단면전]의 서문으로 집필된 것이다. 그러나 동 카탈로그의 지면 사정상 원고의 상당부분이 생략된 채 게재되었으므로 이번 기회에 전문을 복원, 수록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이 글은 출전은 [미술평단](한국미술평론가협회 발행) 2000년 여름호이다.



Ⅰ. 한국의 단색화(單色畵)와 일본 모노하(物派)의 만남

한국의 단색화와 일본의 모노하(物派)는 지금까지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없다. 지리적으로도 매우 가깝고 그 동안 두 나라 사이에 많은 문화 교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그 어디에서도 서로 만난 적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단색화 작가와 일본의 모노하 작가 사이에 개별적인 접촉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한국의 단색화 작가인 박서보와 일본 모노하 작가인 이우환의 경우만 하더라도 70년대 이후 <에꼴 드 서울>을 비롯한 여러 전람회에서 전시를 함께 한 적이 적지 않다. 또한 70년대의 <파리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전에서 두 나라의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만났던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회고전 형식으로 특정한 시기에 양국의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사조가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 마련된 <한ㆍ일 현대미술의 단면전>을 가리켜 역사적인 자리하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의 단색화는 1970년대 초ㆍ중반에, 일본의 모노하는 이보다 조금 이른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 두 나라의 미술에 나타났던 대표적인 미술운동으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이 둘은 그동안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개별적으로는 자국(自國)이나 혹은 해외의 미술관으로부터 몇 차례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동안 한국의 단색화가 해외의 미술관에서 조명을 받은 것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992년 영국 테이트 갤러리 리버풀의 <자연과 더불은 작업:한국의 현대미술(Working with Nature:contemporary art from Korea)>과 1998년 프랑스 몽뻴리에 미술관 주최의 <침묵의 회화들(Les peintres du silence)>을 들 수 있다. 일본의 모노하를 위한 해외의 기획전은 수적인 면에서 이보다 다소 많은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1988년 퐁피두센터가 기획한 <일본의 전위미술 1910-1970:Japon des avant-gardes 1910-1970>과 1994년 구겐하임 미술관 주최의 <1945년 이후의 일본미술:하늘을 향한 절규(Japanese Art after 1945:Scream against the Sky)> 등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사조의 역사를 살펴볼 때,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후반에 걸쳐 한국의 단색화가 일본에 집중적으로 소개됐던 반면, 모노하의 경우 국제전의 주된 발표무대는 한국이 아닌, 유럽이었다는 사실이다. 70년대 이후 한국의 단색화가 일본에 소개된 대표적인 전시로는 동경화랑 주최의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 색전>(1975)을 비롯하여 최초의 대규모 기획전인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동경센트럴미술관:1977), (동경화랑:1978), 대규모 순회전이었던 <한국 현대미술-70년대 후반:하나의 양상전>(동경도미술관, 도지키현 근대미술관, 후쿠오카시립미술관:1983)> 등이 있다.

일본의 모노하가 유럽을 비롯한 해외에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은 1974년에 독일 뒤셀도르프 시립미술관(Stadtische Kunsthalle Dusseldorf)이 주최한 <일본:전통과 현대(Japan-Tradition und Gegenwart)를 필두로 앞서 언급한 퐁피두센터의 전시회와 이태리 로마대학 부설미술관(Museo Laboratorio di arte contemporanea dell universita degli studi di Roma) 주최의 <모노하전(Monoha:La scuola delle cosa)>(1988), 1989년에 벨기에의 앤트워프에서 열린 <제20회 비엔날레 미들하임·일본전(20ste Biennale Middelheim·Japan)> 등의 기획전을 통해서였다.

이처럼 한국의 단색화가 수 차례의 전시회를 통해 일본에 소개된 반면, 일본의 모노하가 한국에 소개될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은 모노하가 한국의 미술인들에게 피상적으로 알려지게 된 한 원인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실 이제까지 모노하는 한국의 학자나 미술평론가에 의해 깊이 있게 연구된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한국의 단색화는 전문적인 학자나 평론가에 의해 심도 있게 다루어진 적이 없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단색화와 모노하가 차지하는 위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미술저널이나 전시회 카탈로그를 위한 서문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언어의 문제도 큰 비중을 차지했겠지만, 문화에 대한 편견이나 민족감정 등 역사적인 요인도 적지 않았다. 이는 80년대에 들어서 일본의 미술관들이 각종 기획전을 통해 한국의 단색화를 대대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했던 점에 비해 한국에서 모노하를 비롯한 일본의 현대미술이 조명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일본의 현대미술이 대규모 기획전의 형식을 갖춰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81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주최로 열린 <일본현대미술전>이었다. 그러나 이는 모노하와 관련된 전시회라기보다는 일본 현대미술의 전반을 다룬 것이었다는 점에서 한 가닥 아쉬움을 남긴다. “70년대 일본미술의 동향”이란 부제를 단 이 기획전은 하라구찌 노리유키(原口典之)와 세끼네 노부오(關根伸夫) 등 대표적인 모노하 작가가 포함돼 있었지만, 모노하의 소개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었다.

자료연구가 김달진이 조사한 ‘1980년대 한일교류전 일지’(월간미술, 1989년 9월호)는 한국과 일본간의 미술교류가 결코 소원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통계에 의하면 1980년대 10년 간의 미술교류는 한국에서 열린 일본측 전시회가 121건, 일본에서 열린 한국 측 전시회가 127건으로 서로 엇비슷한 상황인데, 여기에는 한국의 단색화가 일본에 소개된 사례가 적지 않게 포함돼 있다. 반면에 일본 모노하가 대대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예는 거의 전무하여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단색화가 일본에 소개된 이면에는 일본의 메이저 급 화랑인 동경화랑을 비롯하여 무라마츠 화랑(村松畵廊) 등에서의 연이은 한국 단색화 작가들의 개인전과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를 비롯한 이우환,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의 단색화에 대한 높은 관심과 비평이 자리잡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나카하라 유스케는 “한국의 현대미술이 일본과는 분명히 다른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봄으로써 한국 단색화의 예술적 독창성을 인정한 바 있다.


Ⅱ. 주제에 대하여

제3회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 형식으로 열리는 <한ㆍ일현대미술의 단면전>의 주제는 “침묵의 목소리-자연을 향하여(The Voice of Silence-Towards Nature)”이다. 여기서 ‘침묵’이란 단어는 한국의 단색화와 일본 모노하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정적(靜寂)의 상태를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침묵이란 단어는 ‘모노하’ 보다는 ‘단색화’에 보다 잘 어울리는 말이다. 한국의 단색화는 주로 흰색이나 검정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유채색에 비해 상대적으로 금욕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색을 아낀다’는 어사(語辭)를 ‘말을 아낀다’는 어사와 같은 맥락에서 새길 수 있다면, ‘말을 아낀다’는 어사 속에는 ‘할 말을 다하지 않고 남기는’ 어떤 여운이 잠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침묵의 목소리’라는 표제어에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에서 엿볼 수 있는 동양적 사유 내지 자연관이 내재돼 있는 것이다.

문화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부단히 변화하는 일종의 유동체(流動體)이다. 그것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늘 접변(接變)을 일으킨다. 오늘의 한국문화는 외부로부터 유입된 여러 문화와 한국 고유의 문화가 접변을 일으킨 결과물, 혹은 그러한 문화적 접변의 총화(總和)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과, 구한말 개항으로 비롯된 구미 제국, 혹은 일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점은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근본적인 면에서 서로 이질적인, 독특한 문화를 가꾸어 왔다. 이처럼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적 특색이 이 전시회에 출품한 두 나라 작가들의 작품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고유한 자연관이란 무엇인가?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과 더불은’, ‘자연을 다치지 않는’ 등등의 어구(語句)로 표현할 수 있다. 한국인의 이러한 자연관에는 인간 중심적인 서양의 것과는 판이한 고유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려는 시각이다. 이러한 자연관은 필연적으로 자연 속에서 살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인생관을 낳았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가꾸지 않는 한국의 독특한 정원양식(庭園樣式), 공간감이 뛰어난 전통 건축양식, 돌의 모양새가 고르지 않은 석축술(石築術), 순박한 모습의 각종 석물이나 도자기,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룬 취락구조 등등에는 이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한국인의 자연관이 반영돼 있다.

이처럼 자연을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한국인의 의식구조 속에는 늘 ‘자연을 향한(towards nature)’ 뚜렷한 방향성이 잠재돼 있게 마련이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주제인 ‘人+間’과 연관시켜 볼 때 ‘사이’를 의미하는 한자어 ‘간(間)’ 만큼 이 전시회의 내용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상형문자인 ‘간(間)’은 ‘문(門)’ 뒤에 사람이 서서 떠오르는 ‘해(日)’를 바라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서양의 원근법적 측면에서 볼 때, 해(日)가 문(門) 가운데 들어있으니 해를 바라보는 주체인 인간의 시선이 문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이 글자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에 너무 근접하면 문의 일부와 해만 보일 것이요, 문을 완전히 벗어나면 오직 해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이’ 또는 ‘틈’을 의미하는 ‘간(間)’에는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구획이 설정되게 마련이다.

이는 물리적인 공간(空間)을 나타내는 뚜렷한 예지만, 비슷한 예가 언어에도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두런대는 말소리가 간간이 들리다”했을 경우, ‘간간(間間)’은 미세한 시간차와 미묘한 거리감을 다 같이 내포하고 있다. 즉, 공간적인 요소와 시간적인 요소가 겹쳐진 상황인 것이다. 이 문장은 어두운 밤, 밖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며 두런대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끊어질 듯 하면 다시 들리는 말소리를 창호지 ‘사이’로 듣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두런대는’과 ‘간간’이란 말에서 우리는 끊일 듯 하면 다시 이어지는 청각적 연상과 함께 소리의 미묘한 여운을 느끼게 된다.
신라시대의 향가(鄕歌) 가운데 하나인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는 “열치매 나토얀?리(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라는 첫 구절로 시작되는데, “(문을) 열어젖치매 나타난 달이”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이 구절에는 문을 여는 행위와 함께, (문을 열자) 나타난 공간에 대한 탁월한 언어감각이 스며 있다. 문을 열어젖히니, 벌어진 문 사이로 휘영청 밝은 달이 보이는 장면을 이 구절은 회화적(繪畵的)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어에 ‘마(ま)’라는 것이 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이(間)’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일상적으로는 방의 칸을 표시할 때 주로 사용하지만, 일본의 전통적인 음악이나 춤에서는 체박(體拍)이나 구(句)와 구(句) 사이의 간격 등 리듬감을 표현할 때 쓰기도 한다. 또한 연극의 경우는 여운을 위해 대사와 대사 사이에 두는 무언(無言)의 시간을 의미한다.
언외(言外)의 표현, 무언의 시간, 그림의 여백, 음악에서 가락의 정지 등은 유현(幽玄)과 함께 일본 전통예술의 본질이 되어온 여정(餘情)과 밀접한 어사들이다. 이것들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어떤 부분, 즉 불립문자(不立文字)와도 일맥 상통하는 말들이다. 정신주의에 바탕을 둔 10세기 이후 일본의 문예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 여정에 대해 일본의 국문학자 야스다 아야오(安田章生:1917-1979)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김학현, 마음?여정?유현의 일본미술, 가나아트, 1992, 1/2호)

“여정의 자각 존중이 습기 많고 음영(陰影)이 짙은 일본 풍토나 직관적 능력이 뛰어난 일본인 기질과 결부되어 있는 것은 명백하다. 여정은 단형시에 있어 특히 중요한 것으로서 오늘날까지 강조되고 있으며 일본의 예술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본 기획전의 주제가 되는 ‘침묵의 목소리’는 일본의 ‘여정’과 한국의 ‘여운(餘韻)’, 혹은 ‘울림’과 같은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물질이 아닌 ‘정신’에 두어진다. ‘침묵의 목소리’는 쓴 메를로 퐁띠의 말처럼, “말하고 있는(say) 것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말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해서도 표현”이 가능한 어떤 것들을 염두에 두고 붙인 것이다. 도대체 ‘침묵의 목소리’란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침묵이 어떻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일차적 언어로서의 재료와 매체이다. 단색화의 표층을 이루는 흰색 또는 검은 색 물감과 캔버스, 일본 모노하 작가들이 사용하는 나무, 철판, 기름, 돌, 흙, 시멘트, 유리 등등의 생생한 재료들이 내는 웅얼거림을 우리는 ‘침묵의 목소리’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그래서 가령, 언어의 직물로 ‘여정’의 정서를 표현한 일본의 화가(和歌)처럼 일차적 언어가 내는 언외(言外)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가체(歌體)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의(奧義)를 전한 고서(古書)등에도 어려운 것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가체에 대해서는 자상한 설명은 없다. 하물며 유현체(幽玄體)가 되면 우선 그 명칭부터가 망설이게 한다. 나 자신도 충분히 이해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지 잘 모르지만,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말한 취지는 결국, 말로는 직접 표현되고 있지 않는 여정, 형태로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아취(雅趣) 같은 것일 줄 믿는다. 내용에 도리(道理)가 깊이 깃들고 표현상 화려한 아름다움이 더할나위 없이 되면 그러한 장점을 자연히 갖추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을의 저녁 하늘은 빛도 없고 소리도 없어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를 일이나, 어쩐지 눈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취를 모르는 자는 이와 같은 아취에는 조금도 감동하는 바가 없고, 오직 똑똑히 눈에 보이는 꽃이나 단풍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하고 있다.”(김학현, 위의 글에서 재인용)

12세기 일본의 가인(歌人)인 가모노쵸메이(鴨長明:1155-1216)의 글에서 인용한 이 글은 언어의 이면에 가려진 일본 고유의 정서, 즉 여정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정의 ‘여(餘)’는 말 그대로 ‘나머지’를 의미한다. 여백(餘白), 여유(餘裕), 여가(餘暇), 여운(餘韻)에 있어서처럼, 본래 있던 어떤 부분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여광(餘光)은 ‘해나 달이 진 뒤의 은은한 빛’을 연상시킨다. 해나 달과 관련된 자연현상을 묘사한 이 문장은 빛의 단절이 아닌 연속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무게중심은 빛의 나머지 부분(餘)에 실려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인용한 글 속에서 가모노쵸메이는 “가을의 저녁 하늘은......어쩐지 눈물이 흐르는 것”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정취를 모르는 자는......꽃이나 단풍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하고 있다”고 은근히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모두 언어에 의한 표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문장들이다.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설법을 마친 뒤에 한 송이 꽃을 손에 들고 제자들을 바라보니 오로지 가섭 만이 빙그레 웃었다는 이 경지. 불립문자, 이심전심의 이 오묘한 경지를 ‘물자체(Ding an sich)’만을 신봉하는 부류들이 어찌 알 것인가. 진리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똑같은 색, 똑같은 돌을 사용하여 각기 다른 사람이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했다고 해서 똑같은 작품이 나오지는 않는다.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olfflin)이 [미술사의 원리(Principles of Art History)] 첫머리에 소개한 화가들의 일화는 바로 이 점을 대변한다. 네 사람의 화가가 해변에 나가 같은 풍경을 그렸는데, 결과는 각자 개성에 따라 서로 달랐다는 일화 말이다. 필자는 어떤 서예가로부터 같은 먹을 써도 글을 쓰는 사람에 따라 품격이 서로 다르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하물며 풍토와 역사, 문화가 다른 경우야 두말하면 무엇하겠는가.

한국의 단색화와 일본의 모노하를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변별성이다. 같은 물감을 썼더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고, 똑같은 나무와 시멘트, 흙, 돌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했더라도 그것이 나오게 된 문화적 맥락이 다르다면 그 의미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똑같아 보이는 검정색일지라도 애드 라인하르트의 작품에서 맡아지는 향취와 김기린의 그것이 같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의 단색화 작품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비트겐슈타인이 “말되어질 수 없는 것에는 침묵을 지켜라”고 했듯이, 그것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느낌의 대상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할 때만이 느낄 수 있는 정신의 에센스, 이는 모노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리라.




Ⅲ. 한국 단색화의 미적 특질

전후 한국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단색화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대체로 본격적인 ‘미적 모더니티’의 획득이란 말로 설명된다. 이는 단색화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인 미적 전형의 창출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70년대에 단색화를 실험한 화가들은 평면에 한국 고유의 미적 정서와 정신성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이들은 대개 흰색이나 검정 등 무채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1975년, <에꼴 드 서울전>을 계기로 집단적 양상을 띠기 시작한 단색화는 한국 현대미술사상 특정한 색을 매개로 나타난 최초의 미술 양식이었다. 이러한 회화 양식이 전후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회화를 통일된 이념의 발현을 위한 매개체로 삼은 최초의 선례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말하자면 단색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구 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에 있어서처럼 회화의 요건인 평면을 하나의 매체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70년대 후반기, 우리는 이 시기를 흔히 미니멀 아트의 시기 또는 단색의 시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시기에 있어서처럼 회화가 자기 한정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회화의 평면화(平面化)를 철저하게 밀고 나가면서 반(反)일루저니즘· 반표현성·반구성을 그처럼 철저하게 추구한 경우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회화는 대개의 경우 모노크롬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은 또한 국제적인 경향으로서의 회화(즉 평면)와 일치하는 회화, 회화 그 자체가 주제인 회화, 기본 회화, 자기 자신으로 환원된 회화 등등으로 불리는 이른바 후기 미니멀적인 경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 박서보, 하종현, 서승원, 최명영 등이 중심이 되어 창설한 <에꼴 드 서울전>(1975)이다.”(이 일, 한국 미술에서의 모더니즘, 현대미술에서의 환원과 확산, 열화당, 1991, 133쪽)

이 전시회의 제1부를 차지하는 70년대 단색화 작가들에 내려진 이 일의 이러한 평가는 회화에 있어서 근대적 각성이 회화의 존립 근거인 평면성, 즉 매체 자체를 하나의 매체로 인식하면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회화 고유의 매체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이 한국 고유의 미술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데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딜레머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평면성이야말로 1960년대 초엽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의해 ‘모더니스트 페인팅’의 본질로 규정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회화에 있어서 환원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으로 평면성과 평면성의 한정이라는 두 개의 관습 내지 규범을 들며, “이 두 가지 규범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그림으로 경험될 수 있는 대상을 창조하기에 충분”하다는 논리를 펴나갔던 것이다. 칸트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여겼던 그는 모더니즘을 자기 비판이 심화된 역사로 보고 회화에 있어서 평면성과 순수성을 강조하여 모더니즘의 역사를 ‘자기 환원적 경향의 극대화’로 보았다. 하인리히 뵐플린에서 클라이브 벨로 이어지는 형식주의의 비평적 전통을 계승한 그린버그는 인상주의 이전의 서양미술을 가리켜 유사성의 규범에 충실한 재현적 환영주의 미술로 간주하며 “예술을 은폐하기 위해 매체의 존재와 중요성을 감추었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 전시회에 초대된 정창섭, 윤형근, 박서보, 정상화, 김창렬, 하종현, 윤명로, 김기린, 심문섭, 서승원, 최명영, 이동엽, 허 황, 최병소, 김종일, 김장섭, 김형대, 김태호 등 단색화가들의 작품이 그 형식에 있어서 서구 모더니스트 페인팅이나 미니멀 회화와 다소간 연계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평면적인 성격은 이 일이 언급한 것처럼, ‘자기 한정적’인 경향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연관시켜 볼 때,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제국의 문화적 딜레머는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차용 컴플렉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차용 컴플렉스’의 극복은 70년대 들어서자 일단의 단색화 작가들에 의해 서서히 시도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서구적 ‘형식주의’를 한국 고유의 전통에 뿌리박은 정신성으로 대체하면서 이에 대한 극복의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은 이를 가리켜 ‘원초주의’라고 부르고 있는데, 표현이야 어떻든 한국 고유의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면면히 계승돼 온 어떤 정신적 실체를 의미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70년대부터 한국의 단색화에 익숙했던 일본의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의 다음과 같은 술회는 단색화에 대한 국외자적 시각을 보여준다.

“한국의 현대회화가 모두 구미와 똑같은 맥락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화가의 작품에는 다른 나라의 현대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봄, 서울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어떤 화가의 작품을 접했을 때, 나는 중간색을 사용함과 동시에 화면이 매우 데리키트하게 처리되어 있는 회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특질에 대한 나카하라의 이러한 지적은 일단 한국 단색화의 미적 특질을 서구 모노크롬 회화의 그것과 구분짓는 것으로 한국 단색화의 차별성이 드러나 있다. 여기서 나카하라가 지적한 ‘델리키트하게 처리되어 있는’ 회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한국 단색화에 대한 그의 또 다른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색채에 대한 관심의 표명으로서 반(反)색채주의가 아니라 그들이 회화에의 관심을 색채 이외의 것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나카하라 유스케,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 전평, 미술수첩 1977년 9월호)

여기서 나카하라가 언급하고 있는 ‘색채 이외의 것’이 다름아니라 이 일이 언급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정신성’을 지칭한다고 간주할 때, 그것은 한국 단색화에 나타난 미적 특질이 서구의 미니멀 회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물질적 속성에서 야기된 독특한 지각방식으로서의 미적 특질과는 큰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궁극적으로 한국의 단색화에서 엿보이는 정신적 특질 혹은 비물질화(非物質化)가 유독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서만 도출될 수 있는 미적 특질인가 하는 질문을 도출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같은 동양권에 속한 일본이나 금세기 초엽 러시아의 절대주의 작가 말레비치, 혹은 프랑스의 이브 클랭의 모노크롬 회화와 견주어 볼 때, 결코 간단치만은 않다고 판단된다.

미술사가인 정무정은 ‘1970년대 후반의 모노크롬 회화’란 논문에서 이브 클랭(Yves Kein),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 브라이스 마든(Brice Marden) 등의 작품에 나타난, 물질을 넘어선 초월적 정신성의 속성을 들어 ‘정신성’을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고유한 속성으로 인정하는 데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색채를 넘어선 정신적 세계의 추구’라고 하는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독자성을 다소 유보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여러 평론가 및 미술사가들이 제시한 한국 단색화 작가들의 방법론을 인용하며 구체적인 작품의 구조나 제작방식에는 독자성을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70년대 후반을 통해 모노크롬 회화의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한 작가들 중에는 특유의 재료와 화면구조, 회화적 방법론을 제시했던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정창섭은 ‘귀(歸)’ 연작을 통해 흡수력이 강한 한지의 물성적 특질을 이용하여 단조로우면서도 깔끔한 공간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대칭적 화면구조는 전통 수묵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발묵효과와 더불어 정일하며 안정된 평면공간을 창출한다. ‘歸-78W’(200x100cm)는 상하로 긴 직사각형의 화면 속에 같은 크기의 정사각형 두 개가 대칭을 이룬 것으로 흰색과 검정색의 대비를 통해 음양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종현은 걸쭉하게 갠 무채색 안료를 팽팽하게 맨 마대의 성긴 틈새로 캔버스의 뒤에서 밀어 넣는 기법을 구사한다. 그의 ‘접합(接合)’ 시리즈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안료와 캔버스가 합일된 상태를 보여준다. 안료는 하나의 물질로서 캔버스의 표면에 얹혀지는 것이 아니라, 안료 본연의 물질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캔버스 표면과 등가적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캔버스라는 회화적 관례를 좇고 있을 뿐, 실제적으로는 회화와 비회화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그에게 있어서 마대의 뒷면에서 안료를 밀어 넣는 행위는 회화적 표현을 적극 배제한 오직 자연스럽고 순수한 행위 자체만의 의미를 지닌다.

윤형근의 ‘엄버 블루(Umber-Blue)’ 연작은 밑칠을 하지 않은 아사천에 묽게 갠 엄버색 안료를 침투시킨 것이다. 화면의 중앙 혹은 좌우에 대칭적으로 배치된 넓은 색역(色域)은 밑부분부터 점진적으로 덧칠된 색가(色價)의 차이로 인한 그라데이션이 침잠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부드럽게 희석된 갈색 톤의 물감을 머금은 천은 물감과 천 자체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일의 관계에 있음을 말해 준다. 드넓은 색역이 가져다주는 델리키트한 서정적 느낌은 회화를 인격도야의 수단으로 삼는 동양적 사고의 반영으로써 금욕적이며 절제된 생활 윤리로부터 배태된 것이다.

이상 기술된 작품세계는 독자적인 방법론과 화면구조를 지니고 있다. 반복적 행위를 작업의 주된 방법론으로 삼았던 여타의 단색화 작가들을 포함하여 이들의 작업세계는 미국의 미니멀 작가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그러한가.

미국의 미니멀리스트들에게 있어서 주된 관심사는 회화를 회화이게끔 하는 본질적 관습이나 규범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1959년도 작품인 줄무늬 회화(stripe painting)는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지지했던 모더니스트 페인팅과 모더니즘적 관습을 뛰어넘으려고 했던 미니멀 아트의 경계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미니멀 아트라는 정식 명칭이 붙여지기까지는 ‘임의의 물체(Abitrary object)’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회화로도 조각으로도 보기 어려울 만큼 벽으로부터 돌출돼 애매한 상태를 유지한 스텔라의 두꺼운 캔버스는 모리스 루이스나 쥴스 올리츠키의 회화적 관습에 익숙해 있던 그린버그의 미적 취향으로는 회화로 인정하기에 몹시 난처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형식주의자로서 그린버그의 한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린버그의 태도에 대해 일말의 당혹감을 느낀 미술가들은 모더니스트 회화 이념을 극단적으로 밀어부치므로써, 제3의 영역에 대한 창조의 가능성을 제시하게 된다.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전통을 계승한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에 의해 경멸적인 의미에서 ‘문자적 오브제(Literal Object)’로 불리운 미니멀리스트들의 ‘임의의 물체’는 결국 그린버그의 교조적 형식주의 미학과 단절되기에 이른다. 당황한 것은 그린버그였다.

“모더니스트 페인팅이 지향하는 평면성은 결코 완전한 평면성이 될 수 없다. 그림의 평면(picture plane)에 대한 고양된 감각은 조각적 환영이나 눈속임(trompe-loeil)을 허용하지 않을 지는 몰라도 시각적 환영(optical illusion)을 허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Clement Greenberg, Modernist Painting)

미니멀 아트에 대해 이처럼 한걸음 물러선 그린버그는 곧 미니멀 아트에 대한 공격에 나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3차원에서 찾아야 된다”면서 미니멀 아트를 비예술로 몰아부친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와 도널드 저드(Donald Judd)로 대변되는 리터럴 오브제들은 드디어 감상에 필요한 적절한 환경, 즉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조명, 관객이 작품주변을 걸어다닐 수 있는 넓은 공간 등을 통해 급기야 예술작품으로 승인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한국의 단색화는 모더니스트 페인팅의 극단적인 상태, 즉 문자적 오브제의 전통에 입각해 있다기보다는, 그린버그적 의미에서의 평면성의 용인이라는 측면에서 미니멀 아트보다는 모더니스트 페인팅의 회화적 관습에 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적 내지 역사적 전통에서 비롯된 개념이라기 보다는 서구의 회화적 관례에 고유의 자연관에서 파생된 정신성을 접맥시킨 것이며, 한국 작가들 특유의 회화적 방법론을 실천하는 가운데 고양된 예술적 성과를 획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Ⅳ. 일본 모노하의 특질과 장소성

“지금 모노파는 다시 상기(想起)되는 가운데 있다. 그리고 작품을 다시 제작하도록 몰아세워지고 있다. 지난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의 모노派가, 상기와 재제작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1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옛날 일 같기도 하고, 또 앞으로 지속되는 듯도 하다. 그리고 모노하란 새삼스러이 불가사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글은 모노하 운동의 주역을 담당했던 이우환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쓴 글(모노派에 관해서, 空間, 1990, 9월호)에서 인용한 것이다. 같은 글 속에서 그는 모노하가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 인식된 측면이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모노하를 조명하는 전시회와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그 까닭은 모노하에 대한 곡해가 커가는 만큼 이에 대한 신화도 증대해가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모노하를 조명하는 전시회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아마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술사조치고 이만큼 각광을 받은 것도 드물 것이다. 그 이유는 이우환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팔방으로 열려진 생명력을 갖고 환기력이 강한” 탓도 있겠지만, 모노하 특유의 어떤 매력이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모노하는 60년대 후반, 급속한 경제적 부흥으로 인하여 고도 산업사회에 진입할 수 있었던 당시 일본의 사회적 산물이다. 1960년대 후반은 일본에 있어서 전후 최대의 문화적 전환기로서 1964년 동경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누리게 된 경제적 풍요와 이의 반대급부로 나타났던 공해 내지는 각종 사회?정치적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사회적 소요가 끊임없이 야기된 시기였다. 특히 모노하 운동이 첫 징후를 드러내기 시작한 1969년은 미?일 안보조약으로 비롯된 학원투쟁이 급기야는 동경대학의 입시를 중단시키고 마는 사태를 불러일으킨 해였다. 국민총생산(GNP)이 약 8천 달러에 달하는 가운데 고도 성장 사회의 가도를 달리던 일본 사회는 극좌로 치닫는 학생운동과 지식인들의 자기비판으로 인하여 유례 없는 사상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대항문화의 물결이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문학, 음악, 연극, 무용, 미술 등 예술의 각 장르에서 기성문화에 대항하는 아방가르드 운동이 전개되었다.

모노하는 당시 예술의 궁극적인 본질에 대해 고민하던 당시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작가들이 기존의 예술에 도전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면서 표출된 아방가르드 운동이다(이우환은 모노하가 운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현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모노하의 주역들은 대부분 다마(多摩)미술대학 출신의 작가들이었다. 1987년에 세이부(西武)미술관에서 <모노하와 포스트 모노하의 전개-1969년 이후의 일본미술>을 기획한 미술평론가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의 분류에 의하면, 모노하는 광의(廣義)의 모노하와 협의(狹義)의 모노하로 구분되는데, 협의의 모노하 작가로는 이우환을 비롯하여 다마미술대학 출신의 세끼네 노부오(關根伸夫), 스가 기시오(關木志雄), 스스무 코시미즈(小淸水漸), 요시다 카츠로(吉田克朗), 나리타 가츠히코(成田克彦) 등이다. 일본대학 철학과 출신인 이우환을 제외한 이들은 일본의 원로 전위작가인 사이토 요시시게(齊藤義重)의 제자들로서 조각을 전공한 세끼네와 코시미즈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화를 전공하였다. 광의의 모노하에는 이들 다마미술대학 출신의 작가들 외에 동경예대 출신인 에노쿠라 코우지(?倉康二), 다까야마 노보루(高山登)와 일본대학 출신의 하라구찌 노리유키(原口典之) 등이 포함된다.

이 전시회에 초대된 14명의 작가들 중에서 위의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작가는 엔도 토시가츠(遠藤利克), 쯔지야 기미오(土屋公雄), 토야 시게오(戶谷成雄), 하야시 타케시(林武史), 구로가와 히로다케(黑川弘毅) 등 5명인데, 이들은 모두 포스트 모노하 작가들이다.
모노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1969년에 한국에서는 본격적인 전위그룹인 ‘A.G’가 결성되었다. 1975년, 제1회 <에꼴 드 서울>이 결성되면서 대다수의 동인들이 이 전시에 참여하게 되는 ‘A.G’ 그룹은 50년대 후반에 시작된 앵포르멜 운동이 60년대 중반 무렵 쇠퇴해지자 실험을 표방하면서 등장한 2세대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그 보다 조금 앞선 1967년에는 구미의 팝아트와 누보 레알리즘, 옵아트 등 신사조를 수용한 <청년작가연립전>이 열렸는데, 이 전시회는 ‘무’, ‘신전’, ‘오리진’ 등 3개 그룹의 연립전이었다.

모노하의 대표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세끼네 노부오가 기념비적인 작품 ‘위상-대지(Phase-Mother Earth)’를 발표한 것은 1968년이었다. 거대한 원통형의 땅을 판 뒤, 파낸 흙을 똑같은 모양과 부피의 원통형으로 세워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형태를 대비시킨 작품이었다. 조각의 요체인 공간의 탐구를 위해 위상수학(topology)을 공부하던 그는 마침내 거대한 크기의 대지예술인 이 작품을 <제1회현대조각전>에 출품하게 된다.

모노하의 주도적인 이론가 겸 작가인 이우환은 1969년에 정육면체 형태의 부드러운 솜뭉치에 철판을 부착한 ‘관계항(Relatum)’을 1970년에는 전시장의 기둥에 각목을 대고 로프로 묶은, 같은 제목의 오브제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이 작품이 처음으로 발표된 것은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Germamo Celant)에 의해 주도된 아르테 포베라(LArte Povera)(1967)가 이탈리아에서, 미니멀 아트 전시회가 뉴욕의 유태인 미술관(Juish Museum)(1966)에서 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로버트 스밋슨(Robert Smithson)이 미국 유타주의 대염호(Great Salt Lake)에 나선형 방파제를 구축한 것이 1970년,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가 네바다주의 평원에 구멍을 파고 거대한 암석을 넣은 작품을,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가 네바다 남부 사막에 1마일 길이의 직선 길을 낸 대지예술 작품 ‘라스베가스 피스(Lasvegas Piece)’를 발표한 것이 1969년이었다. 1970년이면 ‘A.G’의 김구림이 한강변 살곶이 다리 둑의 잔디를 불태워 거대한 삼각형의 도형을 만든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발표하던 해이다.

아르테 포베라의 대표작가인 코우넬리스(Kounellis)는 1967년에 솜과 철판, 선인장, 흙, 석탄 등을 이용한 작품을, 1969년에는 여러 마리의 말을 전시장에 비끌어 맨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이런 사실은 이태리의 아르테 포베라와 미국의 대지예술 내지 미니멀리즘이 모노파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주는 단서들이다.

솜이라든지 흙, 석탄, 철판 등을 가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시장에 설치하는 방법은 모노파와 아르테 포베라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코우넬리우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르테 포베라의 작품이 그 자체의 완결성을 갖는 반면에, 모노하는 주변적인 요소를 작품 속에 끌어들인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가령, 하라구찌 노리유끼의 철판으로 만든 큰 입방체 속에 검은 기름을 가득 채운 작품은 주변의 풍경이 기름의 표면에 투영되고 있는데, 이는 주변적인 요소를 작품에 끌어들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모든 모노하 작가들이 주변적인 요소를 작품에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 스스무 코시미즈의 ‘표면에서 표면으로’(1971)와 같은 작품은 같은 크기의 나무판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조각한 것이며, 세끼네 노부오의 많은 작품들은 비록 주변의 풍경이 작품의 반질거리는 표면에 투영되고 있으나, 형태 면에서는 명백히 조각작품에 가깝다.

스가 기시오의 작품은 대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일찍이 ‘예술로부터의 벗어남’을 작업의 목표로 삼았던 그는 전시장에 파라핀 더미를 쌓아놓는다든지 생나무를 여러 개 잇대놓는 설치작업을 통해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애매하게 하는 작업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에노쿠라 코우지의 천에 기름을 먹인 작품이나 다까야마 노보루의 기름을 머금은 침목 작품은 폐기물로 찌든 산업사회의 단면을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에노쿠라의 경우는 물질(matter)을 매개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문제를 제기한 바 있으며, 다까야마의 경우는 사회의 이면에 가려진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방부제, 타르, 응고된 혈액 등에서 발산하는 강렬한 체취를 통해 환기시키는 사회비판적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대부분의 모노하 작품이 전시장의 조건이나 상황에 맞춰 새롭게 제작되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현상이다. 일견 그것은 ‘미술의 죽음’을 의미하는 미술관의 존재와 역사, 관행에 대해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면 모노하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흙이나 나무처럼 모든 것은 썩어서 자연의 품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점을 은연중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자연의 이법(理法)이다. 세끼네 노부오의 거대한 흙더미로 이루어진 ‘위상-대지’는 다시 메워져 자연의 품으로 회귀했다. 다까야마 노보루의 침목(枕木)은 전시가 끝나면 철거되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스가 기시오의 설치작업에 사용된 나무, 파라핀, 가시철망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우환은 어디선가 말했다. “만드는 일에서 벗어나 모노하가 대결한 것은 교묘하게도 사물(les choses)에 관해서가 아니었다”고. 모노하는 다시 그의 말을 빌리면, 만드는 행위와 사물의 조응을 통해 공간, 상태, 관계, 상황, 시간 등이 파생되는 비대상적 세계의 표출에 주목하였다. 작품이 자기완결성을 지양하고 보다 열려진 세계를 지향할 때, 주변의 여러 요소와 만나 다양한 관계가 파생된다는 것이다. 이우환의 이러한 발언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존재방식을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결국 삶의 존재방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술 또한 하나의 존재방식,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표현이 아닌가.

이우환의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Rendre tel quel tel qu il est)”는 그가 말한 것처럼 “일정한 방법이나 신체를 개재시켜서 사물이나 위치, 장을 다시 짜서 빗겨놓아 반향하게 하는 일”이다. 어디선가 그는 천리휴(千利休:Sen-rikyu)의 예를 들었다. 뜰을 깨끗이 쓴 다음, 그 위에 낙엽을 흩뿌리고 떨어진 낙엽의 모습을 즐겼다는. 혹시 이것이 그가 말하는 임시임장성(臨時臨場性)에 가까운 모습은 아닐까.




Ⅴ. 결어(結語)-다시 자연을 향하여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은 자연스러움을 작품의 한 요소로 받아들인다. 이 점은 앞서 언급한 작가들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김환기의 마포(麻布)에 침투된 푸른 색 반점들을 비롯하여 이강소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붓질, 윤명로의 균열, 김장섭의 툭툭 쳐바른 검은 안료 등에서 인공적인 꾸밈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이인현, 문 범, 박기원, 장승택, 오이량, 등 후기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물감의 번짐이라든지 반복된 행위, 빛의 그라데이션 효과 등이 자연스럽게 발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나무와 흙의 결합을 통해 자연의 신체성을 강조한 이건용과 생나무 가지를 조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매스를 만들어내는 이재효가 가세하고 있다.

한국의 단색화에서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거나 도널드 저드의 미니멀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각이나 선이 분명한 기능적 합리성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인공성에 대한 배제, 자연을 분석하거나 해체하려는 태도를 지양하는 일 등은 단색화 작가들에게도 흔히 발견되는 요소들이다. 박서보는 끊임없이 선긋기를 반복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신을 비우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행위의 무목적성을 통해 행위 그 자체에 살고자 함”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발언 속에는 자연과의 합일, 자연에의 귀의(歸依) 사상이 깃들어 있다.

반면에 같은 자연관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은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 사뭇 다르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쓴 이어령의 분석에 의하면, 일본의 자연관은 ‘해체’적 성격이 강하다. 그는 일본 문화의 정수 가운데 하나인 꽃꽂이의 예를 들어 이 점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해체된 자연을 재구성하는 문법은 역시 ‘축소’ 정신에서 태어난 것이다. 병 하나의 꽃이 들과 산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 가지가 원근의 법칙을 지니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이어령, 축소지향의 일본인, 갑인출판사, 158쪽)

이어령의 이어지는 설명은 더욱 흥미진진하다. 꽃꽂이에서 가지의 배치는 광대한 우주공간을 축소해 보여주는 상징법이라는 것이다. ‘리까(入華)’에서는 그것을 음(陰), 양(陽), 영(嶺), 악(岳), 폭포, 시(市), 미(尾)라고 불렀다.

“공간을 차지하는 가지의 모양과 방향에 따라 그것은 하늘과 땅(陰陽)은 물론이고 산봉우리 ‘영(嶺)’과 산언덕의 ‘악’도 되며 수천척의 폭포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수직으로 세워진 가지와는 달리 그것을 수평으로 뻗게 하면 ‘나가시마(流し)’라 하여 시미(市尾)를, 즉 지평선으로 흐르는 평야와 강이 되는 것이다.”(이어령, 앞의 책, 139쪽)

천리휴(千利休)의 일화와 함께 생각나는 것은 일본의 독특한 정원 양식이다. 광대한 자연을 몇 만분의 일로 축소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이 축경(縮景) 기법은 멀리 있는 자연을 ‘밧줄로 잡아 끌어온 것’으로 빗대지기도 한다. 일본의 전통적인 ‘세끼데이(石庭)’ 양식은 돌과 모래로 자연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인데, ’다이도꾸지 다이셍잉(大德寺大仙院)에서 보이는 석정이 대표적이다. 곱게 깔린 흰모래의 표면에 물결치는 듯한 흔적을 내서 바다를 표현한 조원술은 인공미의 극치를 보여줌과 동시에 ‘사물을 다시 짜서 살짝 빗겨놓는’ 행위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예는 대상 하나 하나의 모습보다 그 대상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를 중시하는 일본인 특유의 사고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 전통문화의 본질은 ‘절로주의’, 또는 ‘적당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위적인 것을 피하게 되고, 자연 친화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한국의 농촌에서는 지금도 집을 지을 때, 격자형으로 엮은 수수깡에 진흙을 이겨 발라 적당히 벽을 만든다. 꾸밈이 없고 순진 무구한 표현법이다. 철학자 조요한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이 점에 관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인위를 거부하는 것이 한국미의 정신이다. 한국의 예술가는 비가 내리는 것같이 달이 비치는 것 같이 작품을 무리 없이 제작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나무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집을 세우는 것이 우리 소박미의 한 단면이다. 미학상의 표현으로는 의지결여성(Willenlosigkeit)이 한국의 소박미일 것이다. 한국의 주택은 연봉(連峰)과 대강(大江)을 원경에 넣고 그 자리를 택하였다. 그것을 주위의 자연풍경에 조화시켜 설계하여 왔다. 집뜰과 둘러싼 자연이 담에 의해 격리되지 않고, 집 뜰이 담을 넘어 자연 속으로 번져 나가는 것이 한국 주택의 생리이다.”

이처럼 인위를 거부하는 정신과 의지결여성이 많은 한국 작가들의 제작방식에 스며있다. 이 점은 단색화 작가들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연에 대한 직관과 자연에의 귀의, 자연과 합일하려는 정신이 무의식중에 물질 속에 내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랜 이미지 사상(捨象)의 과정을 거쳐 ‘물자체’에 도달한 서구의 미니멀리즘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70년대에 중반, 한국의 단색화 작가의 작품을 접한 동경화랑 사장 야마모토(山本孝)씨는 말했다. 백자항아리를 연상시킨다고. 나는 어떤 일본작가의 작품에서 샤미셍의 섬세한 선율을 들은 적이 있다. 문화란 그런 것이다. 남이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더 잘 맡는 것처럼,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자연관이 근대 서구문명의 충격을 경험한 두 나라의 현재 문화와 예술에 어떻게 반영이 되고 있으며 굴절을 이루었는지 명백히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구의 문화와 문명이 야기한 영향과 충격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전통과 정신만은 나타나고 있는 현상의 이면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가 삶의 한 존재양식이자 그 표명이라고 한다면, 부단히 계속되는 문화의 접변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본다. 본 전시회는 서구 문화와 문명의 유입에서 비롯된 근대의 초극과 문화적 대응 양상이 두 나라에서 각기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점을 한국 단색화와 일본 모노하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자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밝혀 둔다.



※ 본문 가운데 Ⅲ장에 해당하는 ‘한국 단색조 회화의 미적 특질’은 본인의 박사학위 논문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에서 부분 개작 내지 일부를 전재한 것임을 밝혀 둔다.




참고문헌
ㆍ에꼴 드 서울 20년, 모노크롬 20년, 관훈아트디자인연구소 발행, 1995
ㆍ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사, 2000
ㆍ한국추상미술 40년, 재원사, 1997
ㆍ김달진, 1980년대 한일교류전 일지, 월간미술, 1989, 9월호
ㆍ김학현, 마음ㆍ여정ㆍ유현의 일본미술, 가나아트, 1992, 1/2월호
ㆍ이어령, 축소지향의 일본인, 갑인출판사
ㆍ양주동, 고가연구, 박문출판사, 단기 4290
ㆍ1970年-物質と知覺, もの派と根源お問う作家たち, 1995, 전시 카탈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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