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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아트/사이버공간/가상현실/사이버모험...../사이버레스토랑 (2)

윤진섭

드디어 선임하사의 차례가 왔다. 선임하사가 문을 나섰다.
아아, 그 때 선임하사의 눈에 들어온 그 광경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문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그 장엄하고 웅장한 광경을......그것은 정말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상상조차 못 했던 장엄한 광경이었다.
밖은 엄청나게 넓은 광장이었다. 사위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지름이 3백 미터는 실히 돼 보이는 둥근 광장이 거기에 있었다. 광장에는 잔디가 덮여 있었고 광장의 주변에는 마치 로마시대의 원형극장처럼 대리석으로 만든 높은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성벽은 까마득히 높아 보였다. 여기저기에 약간씩 허물어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유서 깊은 유적지 같아 보였다. 고색이 창연했다. 온갖 기묘한 동물형상을 조각한 석상(石像)들이 계단식으로 된 성벽 맨 윗 부분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계단식 건물이었는데, 5층으로 이루어진 층마다 아취형의 문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꼭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켰다.
선임하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성채의 규모나 모양보다 원형 광장에 운집한 군중들이었다. 몇 만 명은 족히 돼 보이는 군중들이 온몸에 흰색 호분을 뒤집어 쓴 채 거기에 모여 있었다. 조금전의 포로들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한마디로 쇼킹했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빅 퍼포먼스였다. 그들은 선임하사가 방금 빠져나온 아취형 문의 반대편 끝에 있는 무대를 중심으로 모여있었다. 그들은 잔디에 앉거나 눕는가 하면 떼를 지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어디선가 휘익 하는 휘파람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대는 원래 있었던 건축물을 이용한 것이었다. 약간 부서지긴 했지만 죽죽 솟아있는 열주들이 장엄해 보였다. 무대 위에는 휘황찬란한 조명이 빛나고 있었다. 밑에서 위를 향해 쏘아대는 강렬한 조명을 받아 줄이 죽죽 간 열주들이 장엄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무대의 뒤에는 붉은 바탕에 흰색의 원이 새겨진 깃발이 세로로 길게 걸려 있었다. 엄청나게 큰 깃발이었다. 흰색의 원형 마크가 생소했다. 깃발 옆에는 역시 엄청난 크기의 대형 스크린이 설치돼 있었다. 그 밑으로 다양한 종류의 악기들과 대형 스피커가 조명기기들과 어우러져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붉은 색 대형 깃발과 스피커, 조명기기들은 무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건물의 맨 윗 부분을 뺑 둘러가며 깃발과 조명기기, 스피커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돼 있었다. 건축물의 맨 밑에는 아취형의 문들이 원형광장을 따라 빙 둘러가며 나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수 백 개는 될 것 같았다. 그 많은 포로들은 모두 그 문들을 통해 나온 것 같았다. 선임하사가 사방을 둘러보니 총을 든 병사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선임하사가 다시 군중을 둘러보았다. 군중 속에는 많은 수의 여자들도 섞여 있었다. 비록 호분을 칠해 온몸이 하얗게 보였지만, 불룩한 가슴과 긴 머리가 여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딘가에 여자 감옥이 따로 있는 모양이군, 선임하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귀를 찢는 듯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들어 무대를 바라보니 번쩍번쩍 광이 나는 무대 의상을 입은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머리가 어깨까지 치렁치렁 했다. 빠른 템포의 락 뮤직이었다. 우아아, 군중 속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여기저기서 휘파람소리가 진동을 했다. 신나는 음악이었다. 건물의 꼭대기에 설치된 수 십 개의 서치라이트가 허공을 가로질러 교차됐다. 그와 동시에 건물 꼭대기에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조명등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일순 장내가 대낮같이 밝아졌다. 와아 하는 탄성이 장내를 물결처럼 뒤덮었다.
선임하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부하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군중들이 똑같이 흰색 호분을 칠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전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찾는 걸 포기하고 고개를 다시 무대 쪽으로 돌렸다. 고막을 찢는 듯한 앰프기타 소리가 열정적으로 두드리는 드럼 소리에 뒤섞여 들려왔다. 장내는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분위기에 맞춰 조명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 때 무대 왼쪽에 걸린 대형 스크린이 밝아졌다.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한글 자막이 크게 보였다.
선임하사는 낯선 땅에서 낯익은 글자를 접하자 자신도 모르게 우쭐해 졌다. 한국도 이젠 국력이 많이 신장됐군, 기분이 좋아진 선임하사가 벌쭉 웃으며 말했다.
한글 자막이 서서히 희미해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한글 자막에 이어 이번에는 “WE DO NOT WANT WAR”라는 영문 자막이 나타났다. 영문 자막이 사라지자 난데없이 베트남어 자막이 나타났다. 스크린에는 이어서 똑같은 방식으로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자막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각기 10초 정도 꼴이었다. 그럼 여기에 세계 각 나라 인종들이 모두 있단 말인가, 선임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스크린에는 그런 식으로 다양한 구호들이 계속해서 점멸했다. 구호는 매우 다양했다. “빈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라”, “일본은 정신대 문제를 해결하라”, “지구상에서 AIDS를 몰아내자”, “미국은 중동문제에 개입하지 말라”, “고래를 남획하지 말라” 등등.....
“오존층의 파괴는 지구를 파멸시킬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스크린의 왼쪽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지더니, 곧 이어 뮤직 밴드가 등장했다. 머리가 허리께 까지 차는 사내들이었다. 몇 명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5인조 밴드였다. 악사들은 하나같이 검은 라이반을 끼고 있었다. 서양사람들이었다. 무대 뒤에는 반나체의 미녀들이 음악에 맞춰 현란한 춤을 추고 있었다. 열 명은 족히 되는 무용수들이 늘씬한 다리를 번쩍번쩍 들더니 무대 앞을 한바퀴 돌고 나서 제자리로 갔다.
타타타타타..... 이 때, 어디선가 프로펠라 굉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엄청나게 큰 소리였다. 프로펠러 소리가 노래 소리를 삼켜 버렸다. 한두 대가 아니라 수십 대 인 것 같았다. 선임하사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거기, 칠흑처럼 어두운 하늘 저 편 쪽에서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헬리콥터들은 원형극장을 넘어 군중들의 머리 위에 머물며 프로펠러만 열심히 돌리고 있었다. 타타타타타......순간 회오리바람이 강하게 일었다. 헬리콥터들은 가운데 있는 단 한 대만 빼고는 모두 국방색이었다. 가운데 있는 헬리콥터는 빨간 색이었는데 중앙부에 하얀색의 원이 선명히 보였다. 깃발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도안이었다. 그 헬리콥터는 다른 것들보다 크기가 훨씬 큰 특제였다. 일순 군중들이 갑작스런 헬리콥터의 출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장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장내에 계신 여러분! 방금 우리의 친애하는 지도자이신 황금곰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다같이 우뢰와 같은 환호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볼륨을 한껏 높였는지 프로펠러의 진동에도 불구하고 아나운스멘트는 또렷이 들렸다. 방송을 들은 군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우아아 황금곰님! 우아아 우리의 지도자님이시여! 군중들은 팔딱팔딱 뛰면서 울부짖었다. 대단한 열광이었다. 손뼉을 치며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번쩍 치켜든 양팔을 좌우로 흔들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면서 일제히 황금곰님을 외쳤다. 와아, 황금곰님! 하늘을 찌를 듯한 환호가 일었다. 와아, 우리의 지도자님이시여! 천지를 진동하는 열광의 물결이 해일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한참동안 군중의 머리 위에 머물던 헬리콥터 떼가 잔디밭 뒤편쪽의 공터를 향해 날아갔다.
헬리콥터에서 내린 것은 빨간 색 가운을 걸친 황금곰님이었다. 육중한 거구인 황금곰님의 얼굴은 흰색 도랑으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곱게 빗어 넘긴 검은머리는 완전히 올백이었다. 짙은 검은 색 라이반을 끼고 있어서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다. 오른 손에는 황금으로 만든 홀을 쥐고 있었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컸다. 홀의 끝에는 흰색 원반이 달려 있었다. 깃발에서 본 그대로였다. 황금곰님의 주변을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에워싸고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그 뒤를 일단의 추종자들이 뒤따랐다. 얼핏 봐도 수 십 명은 돼 보였다. 그들의 뒤를 헬리콥터를 타고 온 미녀들이 뒤따랐다. 늘씬한 금발의 여인들이었다. 백 여명은 족히 돼 보였다. 거의 가슴이 드러난 순백의 야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황금곰님이 중앙의 단상을 향해 걸어가면서 오른 손을 흔들었다. 또 다시 물결처럼 환호가 일었다. 오오, 황금곰님! 오오, 우리의 지도자님이시여! 군중들은 잘 훈련된 펭귄 떼처럼 눈물, 콧물을 흘리며 열광했다. 선임하사는 군중의 뒤쪽에서 환호했다. 오오, 황금곰님! 오오, 우리의 정신적 지도자시여! 순간 선임하사의 머리가 쭈뼛해지며 이상한 법열감이 느껴졌다.
이윽고 황금곰님이 무대에 마련된 황금빛 보좌(寶座)에 앉았다. 헬리콥터에서 내려진 거대한 황금곰 조각상이 여섯명의 경호원에 의해 들려져 황금곰님의 옆에 놓여졌다. 그것은 황금곰님의 상징이었다. 선임하사는 거리가 너무 멀어 존경하는 황금곰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 때 스크린에 황금곰님의 거룩한 얼굴이 비쳤다. 거대한 얼굴이었다. 흰 얼굴에 검은 올백의 머리가 금실로 꼬아만든 술이 달린 붉은 색 망토와 썩 잘 어울렸다.
황금곰님의 얼굴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독특한 카리스마가 황금곰님의 온 몸에서 풍겨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황금곰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붉은 입술이 아름다웠다.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울려나오는 황금곰님의 말소리는 원형극장의 공간을 감돌아 진한 메아리를 남기고 잦아들었다.
“이 자리에 만장하안 나의 불쌍한 영혼들이여어! 드디어 우리가 일어설 때가 도래하였도다아! 이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여 그대들은 성스러운 마음으로오 인류를 위해 희생할 태세를 갖출지어다아. 지금 인류느은 살륙과 약탈로오 멸망의 직전에 있으니이 그대들의 살신성인하느은 마음가짐이 요구되는 때이니라아! 내 그대들을 어여삐여겨어 구원의 기회를 줄찌니이, 부디 실천하여 영생의 기회를 얻도록 하라! 알겠느냐아?”
말을 마친 황금곰님은 입으로 연신 쉬잇! 쉬잇! 하는 쇳소리를 내면서 군중들의 손뼉치기를 유도했다. 군중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하자 무대 위에서 우렁찬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둥 두둥둥둥......황금곰님은 군중들을 향해 두 손바닥을 좌악 펴더니 계속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리드미칼한, 그러나 절도가 있는 동작이었다. 쉬잇! 쉬잇! 하는 황금곰님의 입에서 나는 쇳소리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군중들의 박수소리도 덩달아 바빠졌다.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믿씀니까아?” 황금곰님이 물었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믿씁니다!” 군중들이 일제히 외쳤다. 스크린에는 열광하는 군중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군중들의 열기는 더욱 거세졌다. 황금곰님은 계속 쉿쉿 하는 소리를 내면서 군중들의 흥을 돋구었다. 쉿쉿쉿, 쉿쉿쉿, 쉿쉿쉿! 믿씀니까아? 믿씀니다아! 우렁찬 대답소리와 함께 군중들의 환호가 천지를 진동할 정도로 울려퍼졌다.
군중들은 정말 황금곰님이 내려주신 성령에 감읍(感泣)한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울음소리는 여자들이 모여있는 쪽에서 더욱 크게 들려왔다.
그 때였다. 군중속에서 대 여섯 명 정도의 남자들이 일어나더니 계단을 올라 황금곰님이 있는 연단 쪽으로 가고 있었다. 경호원들이 채찍으로 계단을 오르는 남자들을 후려쳤다. 남자들이 채찍에 밀려 계단을 내려왔다. 한 명은 채찍을 견디지 못해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번엔 좀 더 많은 남자들이 연단 쪽으로 몰려갔다. 더욱 많은 경호원들이 연단 쪽에서 계단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호원들이 기관단총으로 위협을 했다. 그러나 중과부족이었다. 남자들이 꾸역꾸역 연단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모여들자 당황한 경호원들이 황금곰님 쪽을 쳐다봤다. 명령만 내리면 발포하겠다는 눈치였다. 황금곰님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손을 들어 막지 말라는 신호를 했다. 남자들이 다시 계단을 올라가서 황금곰님 옆에 안치돼 있던 황금곰 조각상을 어깨에 메고 내려왔다.
우! 군중들이 외치며 황금곰 조각상 쪽으로 몰려들었다. 순금제 황금곰이었다. 크기가 송아지만 했다. 조각상이 조명을 받아 번쩍번쩍 빛났다. 남자들이 조각상을 머리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우! 다시 한번 환호성이 일었다.
“황금곰님에게 영광을!”
군중들이 외쳤다. 선임하사도 군중들을 헤치고 조각상 쪽으로 다가갔다. 군중들은 서로 조각상을 만져보려고 심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경호원들이 황급히 연단에서 내려왔다. 경호원들이 채찍으로 몸싸움을 벌이는 군중들을 후려쳤다. 군중들이 병아리 떼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으쌰, 으쌰, 으쌰, 조각상을 멘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군중들이 뒤따랐다. “황금곰님에게 축복을!”
다시 군중들이 외쳤다.
황금곰님의 흰 얼굴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황금곰님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그러나 군중들은 이제 그런 황금곰님의 외침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황금곰님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황금곰님이 다시 외쳤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그런 황금곰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소동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으쌰, 으쌰 외치는 남자들이 잔디밭 위에서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그 뒤를 군중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저 황금에 눈이 먼 자들을 매우 쳐라!”
황금곰님이 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경호원들이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군중들도 흩어지지 않았다. 으쌰, 으쌰 하고 외치는 군중들이 경호원들을 압박해 들어왔다. 엄청난 힘이었다. 경호원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경호원들과 군중들의 몸싸움이 시작됐다. 경호원 몇 명이 군중들의 발 밑에 깔렸다. 비명소리가 발 밑으로 잦아들다가 이내 잠잠해 졌다.
그 때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저 황금곰님은 가짜다! 저 황금곰님은 가짜다! 진짜 황금곰님은 왼쪽 턱의 아래에 혹이 있다. 저기를 보라. 없잖은가?”
군중들이 일제히 스크린에 비친 황금곰님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말 혹이 없었다. 집회 때 마다 늘 봐왔던 주먹만한 혹이 오늘은 없었다. 그렇다면 가짜?
우우! 화가 난 군중들이 벌떼처럼 연단 쪽으로 몰려갔다. 보좌에 앉아있던 황금곰님이 벌떡 일어나면서 외쳤다.
“경호원! 발포하라! 발포하라!”
타타타타탓, 타타타타탓 경호원들의 기관단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총을 맞고 순식간에 쓰러졌다. 겁을 집어먹은 군중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황금곰님이 왼손을 번쩍 쳐들었다. 어느 틈에 숨어있었는지 연단 위에서 더욱 많은 병사들이 나타나 총을 쏘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잔디밭을 향해 총구가 불을 뿜었다. 몇 명이 고꾸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총을 맞고 쓰러진 군중들의 흰 몸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배어 나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평화롭던 잔디밭은 어느새 연옥(煉獄)으로 바뀌어 있었다. 생지옥도 그런 생지옥이 없었다.
드르륵 드르륵, 타타타타탓, 경호원들의 엄호를 받으며 가짜 황금곰님이 계단을 내려와 헬리콥터 쪽으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타타타타타타 하는 프로펠라의 굉음과 함께 헬리콥터들이 이륙하기 시작했다. 이 때였다. ‘꺄아악’하는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대 위였다. 거기서 여흥을 준비하고 있던 미녀들이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가 일단의 남자들이 몰려가자 놀라서 지른 비명소리였다. 하늘을 보니 요란한 프로펠라 굉음을 내는 헬리콥터 떼가 새카맣게 떠 있었다. 타타타타타타, 헬리콥터들이 처음에 온 방향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여자들을 잡아라! 가짜 황금곰놈의 기쁨조들이다. 저 여자들을 잡아라!”
한 남자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남자들이 우하고 몰려가 순식간에 옷을 찢고 여자들을 바닥에 쓰러트렸다.
선임하사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정신 없이 뛰었다. 어디로 향해야 될지 몰라 급한 마음에 아무 문이나 열고 뛰어들었다. 대리석이 깔린 산뜻한 복도가 나왔다. 옆에 있는 문을 열고 무조건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박물관 같은 방이 나왔다. 할로겐 조명등이 벽 위에 움푹 파인 진열대를 비추고 있었다.
저벅저벅, 선임하사가 걸을 때마다 그런 소리가 났다. 아래를 보니 분명히 맨발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든 선임하사가 다시 몇 발짝 발걸음을 떼 보았다. 저벅저벅.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한번 더. 저벅저벅. 햐, 미치겠군. 저벅저벅.
유령인가? 순간 선임하사는 겁이 덜컥 났다. 그 때였다. 호호호호. 어디선가 간드러진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앞을 바라보니 한 여자가 우뚝 서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백의 아오자이. 바로 그 간호원이었다.
“아니 다, 당신은?”
선임하사가 놀라서 물었다.
“여기서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환영합니다. 중사님”
여자가 간드러지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내가 오, 올 줄을 알고......?”
선임하사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이렇게......”
그러면서 여자가 선임하사의 손을 잡고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리모콘의 버튼 하나를 눌렀다. 여자가 다시 버튼을 누르자 반대편 벽 전체가 천천히 밝아졌다. 대형 스크린이었다. 거기에 밖의 광경이 투사되고 있었다. 밖은 상황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아수라장이었던 조금 전의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환상적인 락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이제 막 펑하는 연기와 함께 크레인에서 걸어 내려온 남자 가수 한 명이 격렬한 춤과 함께 열창을 하고 있었다. 꼭 해골처럼 생긴 사내였다. 긴 머리에 검은 벙거지, 검은 안경이 독특했다. 얼굴의 피부가 녹아 내린 것 처럼 이지러져 있었다. 희한하게 생긴 모습이었다. 군중들이 박수를 치며 ‘미라클, 미라클’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기계는 우리 특수부대에서 개발한 것인데,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마음대로 볼 수 있죠”
여자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 녀석은 미라클 존슨이라는 가순데, 결벽증이 있죠. 밥도 무균질 채소만 먹는다나요?”
여자가 손가락으로 화면에 보이는 가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
선임하사는 그저 어안이 벙벙해서 넋을 잃고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디 조금전의 당신 모습을 한 번 볼까요?”
여자가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웬 벌거벗은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온몸에 흰색 호분이 칠해져 있어서 누군지 분간이 안 갔지만 선임하사는 그게 자기일 거라고 직감적으로 생각했다. 괴상한 모습이었다. 공포에 질려서 정신 없이 뛰어가는 모습이었다. 그 뒤로 이리저리 흩어지는 벌거숭이 군중들이 보였다. 하늘에는 잠자리 떼처럼 헬리콥터가 날고 있었다. 프로펠러 소리도 들려왔다. 타타타타타타타타.
“그, 그만!”
선임하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호호호호.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여자가 말했다.
“혹시 보고 싶으신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다 보여드릴테니......”
여자의 말에 선임하사의 호기심이 은근히 발동했다.
“조, 조금 전에......미, 미래도 볼 수 있다고 그랬죠?”
선임하사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그래 어떤 걸 보고 싶으신가요? 중사님?”
여자가 시원시원하게 말하며 생끗 웃었다.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게 매력적이었다.
“사, 사, 삼 십 년 뒤.....”
선임하사가 말을 더듬었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야죠, 중사님?”
여자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처, 천 구박, 아니 구백 구십 칠 년, 치, 칠월 칠일......”
“좋아요. 그 많은 걸 다 보여드릴 수는 없고......저녁 9시 뉴스를 보여드릴께요. SBC 방송국 걸로 할까요?”
...........................중략...............................
“자, 이젠 저쪽으로 가실까요. 또 보여드릴 게 있으니까요”
여자가 선임하사의 손을 잡았다. 선임하사가 스크린에서 눈길을 거두고 말없이 여자의 뒤를 따랐다.
선임하사가 안내된 곳은 박물관 같은 전시실 안이었다. 거기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가 하는 실례를 그 유물들은 보여주고 있었다. 유물들은 인간의 신체를 이용하여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들은 가죽, 뼈, 털, 기름, 살, 힘줄, 피 등 일곱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돼 있었다.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비롯하여 사람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 사람의 뼈로 만든 바늘, 사람의 가죽에 그려진 문신에 이르기까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의 아우슈비츠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의 크레타 섬에서 유카탄 반도에 이르기까지 수집품의 범위는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많은 유물들 중에서 가장 선임하사의 눈길을 끈 것은 하나의 조끼였다. 겉모습은 평범한 것이었는데, 모피처럼 털로 되어 있었다. 한 변이 5센티 정도 되는 삼각형의 작은 조각들을 잇대어 만든 것으로 얼핏 봐도 수백 장의 조각이 소용돼 보였다.
“이 조끼는 여자의 성기 가죽을 모아 만든 것입니다. 5백년 묵은 것인데 중동에 있는 한 부족이 전리품으로 얻은 것이죠. 약 2백 명의 여자노예들이 이 조끼를 위해 희생되었답니다”
선임하사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모골이 송연했다.
“자, 이제 저쪽 방으로 가실까요?”
선임하사가 안내된 곳은 흡사 무슨 화학실험실처럼 생긴 방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양한 생체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한 화학무기를 만드는 것이지요”
여자가 무슨 피 같은 것이 담긴 시험관을 치켜들고 불빛에 비쳐보며 말했다.
“이를테면......?”
선임하사가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를테면 인간의 누선(淚腺)을 자극해 몇 달 동안이고 울다가 지쳐 서서히 죽게 만드는 약이라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먹으면 영원히 웃음이 그치지 않는 약 같은 것도 있고요......또 한번만 노출되면 불임에 이르러 완전히 씨를 말리는 폭탄도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일상실험 결과로는 상당히 낙관적입니다”
“그렇다면 밖에 있는 저 포로들이 임상실험의 대상......?”
“바로 보셨습니다”
여자가 한 눈을 찡끗하며 말했다. 선임하사는 소름이 끼쳤다.
“자, 이제 저쪽으로 가실까요?”
여자가 선임하사의 손을 이끌고 간 곳은 커튼이 드리워진 작은 방이었다. 작은 침대가 있었다.
“올라가세요”
여자가 말했다.
“왜, 왜 이러는거요”
선임하사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 걱정마세요. 별 것 아니니까......”
주사기를 손에 쥐고 피스톤을 살짝 누르며 여자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선임하사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여자가 선임하사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저기 욕실로 가셔서 샤워를 하세요”
여자가 방 반대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타일이 깔린 욕실이 반쯤 열린 문틈으로 보였다. 선임하사가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샤워를 마친 선임하사가 안내된 곳은 침실이었다. 분위기가 은은했다.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거리는 흰색 망사 커튼이 쳐져 있었다. 창가에 더블베드가 놓여있었다. 베드 옆에는 마호가니로 만든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갖가지 과일이 담긴 등나무 바구니가 올려져 있었다. 과일에 맺힌 물방울이 신선해 보였다.
“어때요. 샤워를 하시고 나니까......개운하시죠?”
어느새 갈아입었는지 가슴이 깊게 파인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침대모서리에 앉아있는 선임하사 곁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여자의 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여자가 선임하사의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한쪽 팔이 선임하사의 어깨 위에 얹혀졌다. 여자가 와인을 한 모금 머금더니 선임하사의 입에 흘려 넣었다. 달콤했다. 선임하사가 와인을 삼켰다. 부드러운 여자의 혀가 선임하사의 입 속을 유영(遊泳)하기 시작했다. 순간 짜릿한 쾌감이 온몸에 퍼져왔다.
쨍그랑, 와인 잔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여자의 희고 긴 손이 선임하사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둘은 마침내 침대위로 쓰러졌다.

“잠시 후에 당신은 한 마리의 작은 세균으로 변신하게 될 거예요”
한바탕 감미로운 정사(情事)를 끝낸 선임하사가 여자의 곁에 누워 그녀와 함께 가졌던 방금 전의 화려했던 여운을 반추하고 있는데, 문득 여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뭐라구요?”
하도 놀라운 장면들을 목격했던 터라 선임하사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우리 인류평화당(P.F.H.P : Party For Humankinds Peace)은 지금 제국주의자들과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답니다. 우리당의 기(旗)는 붉은 바탕에 흰 색 원으로 되어있죠. 원은 미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세계가 오면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고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지도자이신 황금곰님은 곰을 토템으로 섬기는 극동의 한 나라에서 오셨는데, 지금 그러한 국가의 건설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황금곰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 당의 일원이 되신 겁니다”
“나는 가입한 일이 없는데......?”
선임하사가 말했다.
“그건 전적으로 황금곰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이지 당신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랍니다. 당신은 선택되신 것이지요. 정말 축하드려요”
여자가 부드러운 손길로 선임하사의 가슴을 쓸며 말했다.
“그렇다면 뭐 하나 물어봅시다. 당신들은 월맹군 소속이요?”
선임하사가 삼단 같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손으로 말며 말했다.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노오, 전혀 관계없는 조직입니다. 황금곰님께서 창설하신 세계평화유지군의 한 지부지요. 우리는 세계 각 나라에 퍼져있는 지지자들로부터 기금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이 벙커 속에는 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과학자들이 초빙돼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권위자들이죠. 생화학에서부터 미생물학, 세균학, 인공두뇌학, 유전공학, 면역학, 우주항공공학, 컴퓨터공학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손가락이 피아노를 치듯 선임하사의 하복부를 향해 미끄러져 갔다. 순간 다시 쾌감이 번져왔다. 여자가 이어서 말했다.
“며칠 후면 세계 초강대국의 한 대통령이 다낭을 방문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죠. 방문할 장소와 세세한 스케줄까지도 말입니다. 우리 군의 특공대가 대통령에게 테러를 가할 것입니다. 물론 죽이지는 않을 거구요.
당신의 활약은 그 때부터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균으로 변한 당신이 수혈용 혈액 속에 들어 있다가 부상을 당한 대통령의 뇌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의료진 중에는 우리의 조직원들이 이미 들어가 있답니다”
여자의 손길이 다시 가슴 쪽으로 올라왔다. 선임하사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당신이 대통령의 뇌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기만 한다면 우리의 계획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 속에서 만일 당신이 대통령의 두뇌로 들어온 정보들을 조작해 중요한 정책 결정에 대한 대통령의 판단력을 흐리게만 해준다면......그렇게만 해 준다면 우리는 제국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자의 말을 듣는 동안 선임하사는 자신의 몸이 깊은 수렁 속으로 자꾸만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자신의 몸이 점점 작아져서 허공을 향해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침대에는 여자가 누워 있었다. 그 옆에 방금 전에 자신이 빠져나온 허물이 놓여 있었다. 선임하사가 위에서 내려다보니 여자는 뭔가를 끊임없이 종알거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허물의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위 글은 2년 전에 ‘J. S. Nikimi’라는 필명을 가진 한 사이버 소설가가 쓴 미발표 장편소설의 제4부에 해당하는 ‘환상의 제국’ 중 일부를 옮긴 것이다. ‘J. S. Nikimi’는 나이 40에 몸무게 70kg의 중년남자로서 채식을 주로 하나 가끔씩 보신탕도 즐길 줄 아는 일본계 한국인이다. 취미는 가라오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부르며 노는 것과 동전 수집. 아직 미혼인 그에게는 가끔씩 만나 맥주 잔을 기울이는 여자친구가 하나 있다. 금발의 프랑스계 미녀인 ‘사브린느’가 바로 그 주인공. 역시 사이버 기자인 그녀는 나이 35세에 몸무게 55kg의 독신이다. 취미는 요리와 드라이브. 한 때 Nikimi와 동거를 생각한 적도 있으나 피차 신경 쓰는 것이 싫어 이따금씩 데이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실속파 여성이다.

각설하고, 위 소설은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의 한 특수부대원이 밀명을 띠고 적진에 잠입했다가 적에게 사로잡히면서 겪은 환상적인 체험을 사이버 소설 형식으로 쓴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가 아니다. 사이버 소설가 Nikimi가 생각해 낸 하나의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이 속에는 오늘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와 부합하는 부분이 담겨 있다.

이 소설 속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얼마 전부터 비단 세계 미술계뿐만이 아니라 우리 화단에서도 신체(body)의 문제가 하나의 주제로 부각되고 있다. 신체는 고대 희랍 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서양의 지성사에서 대체로 정신 혹은 영혼 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져 왔는데, 금세기 후반부에 접어들어 미술계에서 그 중요성이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포스트 모던 문화(postmodern culture)’의 한 양상으로 치부하지만, 이는 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버금가는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짜 ‘황금곰님’의 몰락은 바로 서구의 근대정신을 뒷받침해 온 이성중심적 거대 담론과 이에 근거한 서구제국주의의 붕괴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글의 주제가 되는 사이버 아트(Cyber Art)와 관련시켜 볼 때, 정신(mind)과 신체(body) 사이의 상호작용(interaction)이 컴퓨터 상에서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VR)과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전자적 재현(electronic representation) 사이의 상호작용과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오래 전부터 서양철학의 중요한 화두가 돼 왔다. 합리주의를 정초한 프랑스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cartes:1590~1650)는 정신과 신체의 상관관계를 외부의 자극에 대한 정신의 반작용으로 간주하는 하나의 메카니즘을 제안하였다. 그는 대상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간의 감각기관을 자극하고, 나아가서는 생명의 원천인 뇌에 작용을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인간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의 반영이다. 심리학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정념론(Les passions de lame(1649))’에 의하면 인간의 신체는 하나의 기계이다. 인간의 살아있는 신체는 마치 태엽이 감긴 시계와 같다. 태엽이 돌아가는 한도 내에서만 인간은 살아있게 된다. 죽음은 기관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이지 영혼이 신체를 떠났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몸은 생명의 힘에 의존한다. 그런데 생명의 힘 또한 하나의 몸(물체)이다. 이 생명의 힘이 심장을 데우고, 뇌를 거쳐 다시 근육으로 돌아간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또 다른 관점은 영혼에 대한 믿음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점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원리적으로 인조인간(Homunclus)을 창조할 수 있지만, 인조인간은 스스로 말하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과 구별된다. 그에게 있어서 정신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매개물은 송과선(松果線:pineal gland)이다. 뇌 속에 있는 솔방울 모양의 샘을 통해서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영혼은 송과선 안에서 신체의 모든 부분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특별한 활동을 하게 된다. 영혼은 송과선 안에서 신체를 지배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정념론’의 서두에서 신체와 영혼을 구분하고 엄격히 대립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정신과 신체의 이러한 관계는 컴퓨터의 인터렉티브 기능과도 부합된다.

주지하듯이 멀티미디어의 총아인 컴퓨터는 상호작용(interaction)이 가장 큰 특징이다. 텔레비젼은 일방적인 수신 매체지만, 컴퓨터는 쌍방향 매체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파워 스위치를 누르고 초기 화면에 나타난 그래픽 아이콘에 마우스를 클릭하면 비로소 인간과 기계 사이의 대화가 시작된다. 거기에는 두 개의 신체가 존재한다. 하나는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살아 숨쉬고 생각하는 신체(인간)요,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된(programed)’ 신체(기계) 이다. 마우스는 현대판 ‘송과선’인 셈이다. 인간은 마우스를 통해서 또 다른 신체인 컴퓨터와 상호작용을 한다. 마치 불에 데면 통증을 느끼듯 마우스를 조작하면 컴퓨터는 즉각 주어진 자극에 반응을 한다.

인간과 컴퓨터는 구조적인 축면에서도 서로 닮았다. 입으로 밥을 먹고 항문으로 배설물을 내보내는 것처럼 컴퓨터에도 입력장치(input)와 출력장치(output)가 있다. 자판과 마우스가 대표적인 입력장치라면, 프린터는 출력장치의 대표격이다. 어디 그 뿐인가. 인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병을 앓듯이, 컴퓨터에도 바이러스가 있어서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컴퓨터는 기계로서의 기능을 정지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백신이다. 백신은 컴퓨터의 병을 예방하거나 고치는 기능을 한다.

상호작용의 한 예를 들어보자. 쓸모가 없어진 파일을 버리기 위해 우리는 컴퓨터의 스크린에 나타난 ‘휴지통’ 아이콘에 마우스를 클릭한다. 마치 책상 위의 쓰레기를 휴지통에 넣듯, 쓸모 없는 잡동사니 파일들을 휴지통에 ‘설겆이’하는 것이다. 휴지통은 삭제 프로그램의 한 아이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가상적(virtual) 휴지통으로 이해한다. 휴지통에 버린 못쓰는 파일들은 종이로 만든 파일은 아니지만, 기능적으로는 파일의 역할을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컴퓨터에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실제 휴지통의 기능과 가상공간 속의 기능을 혼동한다는 점이다. 얼마 전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어느 중학생이 모친을 살해한 사건처럼 가상공간에서의 몰입은 중대한 사회적 문제를 낳기도 한다.

앞서 인용한 사이버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 간호사는 인조인간(Cyborg) 이다. 생긴 것은 여느 미녀와 다를 바 없지만, 속에는 정교한 컴퓨터 장치들로 채워져 있다. 그녀는 인공두뇌학(Cybernetics)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태어나게 될 가상적 인물의 한 전형이다. 생각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판단까지 할 수 있다. 게다가 반영구적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그녀가 활동을 벌이고 있는 공간(소설 속의 공간)은 가상공간(Virtual Space/VS)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마치 물 속을 유영하듯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왕래한다. 차원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프로그램)가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에서 그녀가 포섭의 대상으로 선택한 선임하사는 원래 인간이었으나 유전자를 조작함으로써 세균으로 만드는 주사를 맞았기 때문에 ‘사이보그화’된 인물, 곧 ‘Homonclus’의 후예이다. 그는 장차 납치된 초강대국 대통령의 두뇌 속으로 침투하여 입력된 정보를 조작, 정책 결정을 적군에게 유리하도록 이끄는 밀명을 띠게 된다.









여기서 잠시 ‘사이보그’라는 말이 탄생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래의 사이보그를 다룬 대표적인 공상과학영화인 ‘터미네이터’에서 보듯 기계인간인 사이보그는 총을 맞아도 죽지않는 불사조이다. 이처럼 cyberspace/cyberpunk/cyberart/cybersex/cyborg/cyberfeminism/cybergrr1 등 1990년대 후반의 문화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cyber’라는 접두어를 지닌 말들이 회자되고 있는데, 여기서 보이는 ‘사이버’라는 접두사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라기보다는 ‘배의 키를 잡다’라는 뜻을 지닌 ‘cybernetics’의 줄임말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을 의미하는 사이버네틱스는 본디 희랍어인데, 이를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한 사람은 미국의 수학자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 1894~1964)이다. 정보소통에 관한 통합학문을 수립한 그는 그 명칭으로 ‘사이버네틱스’라는 용어를 채택하였다. 여기에서 파생된 ‘사이버’라는 용어가 확산된 데에는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공헌이 크다. 그는 1984년 <뉴로만서(Neuromancer)>라는 소설에서 ‘cyberspace’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컴퓨터 및 이와 관련된 기술이 만들어내는 가상공간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여졌다. ‘사이버’라는 말은 이후 본래의 기술공학적 문맥에서 벗어나 문화적이거나 상업적인 맥락에서 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다시 정의하자면 사이버 문화나 예술은 컴퓨터 및 이와 관련된 기술이 창출해 내는 가상적 문화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디지털 문화’, ‘뉴미디어 문화’ 등 컴퓨터와 관련된 용어들이 금세기 문화의 특징적 양상을 설명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지만, ‘사이버’를 접두사로 갖는 용어들이 보다 광범위하게 유포되는 추세에 있다. (박은주, 정보통신 시대의 예술, pp. 45~45)

어떻든 ‘사이버’는 인터넷이 깔린 컴퓨터의 온라인망을 이용하여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는 다양한 형태의 벤처기업과 예술을 탄생시켰다. ‘사이버갤러리’를 비롯하여 ‘일렉트로닉 카페’, ‘전자도서관’, ‘사이버서점’ 등 인터넷을 이용한 다양한 사업과 예술의 형식이 미래의 예술 및 산업으로 자리잡을 공산이 크다. 국제통신망을 의미하는 WWW(World Wide Web)의 거미줄 같은 통신망을 이용하여 각 개인의 단말기에 연결된 인터넷은 새로운 통신매체이자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실시간(real time)에 빠른 속도로 통신할 수 있는 전자우편(e-mail)의 활용은 일대일의 송수신은 물론 다중에게 일거에 전송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퍼포먼스와 같은 참여예술의 형태를 더욱 새롭게 쇄신해 나가고 있다.

한편, 사이버네틱스를 이용하거나 혹은 사이버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퍼포먼스 작업이 현재 여러 작가의 의해 새롭게 시도되고 있다. 호주에 거주하는 스텔락(Stelarc)은 사이버 보디 아티스트로 유명한데, 그의 ‘불수의근 신체(不隨意筋 身體)/Involuntary Body: 제3의 손 퍼포먼스)는 전선이 장착된 인조 로봇 팔을 신체에 부착하고 벌이는 보디 퍼포먼스이다. 그의 사이버네틱 보디 아트는 스타 트랙에 나오는 무자비한 악당의 형상을 한 작가가 확장된 신체를 일그러뜨리며 방사능 측정기의 일종인 가이거 계기판과 단파 라디오의 소음이 만드는 비인간적인 분위기의 아수라장 속에서 벗어나는 스토리로 구성돼 있다. 레이저 눈이 두 줄기의 빛을 어둠 속에 쏘는가 하면 제3의 로봇 손이 허공을 휘 젖는 동안 전극이 얼기설기 장착된 팔을 꼭두각시처럼 위로 쳐드는 쇼킹한 장면이 연출된다. 그의 보디 퍼포먼스는 때로 인터넷 시스템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시공을 초월하는 사이버 예술의 표본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사이버 공간에서 행해지는 사이버 섹스의 사례로는 ‘Well’이라는 전자게시판에 ‘음경학(Didonics)’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는 에릭 헌팅의 사례가 유명하다. 사이버 공간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사이버 섹스는 컴퓨터 문화에서 성(gender)의 문제를 쟁점으로 떠올리는 촉매가 되었다. 에릭 헌팅은 익명의 70년대 공상과학소설로부터 고무되어 사이버 섹스 공학을 상상해 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섹스는 인공지능을 갖춘 침대 위에서 모양과 윤곽선, 그리고 특유의 질감을 지닌 합성 살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신체의 성형을 작업의 주된 컨셉트로 삼는 프랑스의 보디 아티스트 오를랑(Orlan)은 자신의 신체를 매체로 삼아 끊임없이 변조시켜 나가는 ‘자신이 만든 형태’의 작업으로 유명하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그런 그녀를 가리켜 ‘통제할 수 없는 살’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자신을 가리켜 ‘90년대의 테크노 여성’이라고 부를 만큼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성전환을 공상하고 있다. 신체와 관련 지워 볼 때, 현대의 보디 아트가 보여주는 신체훼손, 문신, 성형 등은 고대의 제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야후(Yahoo)의 예술(Arts) 사이트에 들어가면 이와 관련된 많은 홈페이지들을 열람할 수 있다.

이제까지 다양한 형태의 사이버 아트를 살펴보았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하나의 퍼포먼스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아마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짐작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식의 하이퍼텍스트(Hypertext) 글쓰기를 즐긴다.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공상과 쌍방향 통신의 매력은 새로운 예술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나는 삶이 재미있다. 무지무지하게 재미있다. 인생은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사이버 공간 속의 레스토랑과 같다. 나는 사이버 요리사처럼 맛있게 나의 삶을 즐길 것이다.




참고문헌

Robert H. Wozniak, Mind and Body, http://serendip.brynmawr.edu/mind

Jerome McGann, The Rationale of Hyper Text,
http ://jefferson.virginia. edu/public/jjm2f/rational html

Gender & Race in Media:
http://www.uiowa.edu/~commstud/resources/GenderMedia/cyber.html

Escape Velocity......Introduction Excherpt,
http://www.levity.com/markdery/ESCAPE/VELOCITY/excerpts/intro.html

Elizabeth Reid, Identity and Cyborg Body,
http://www.rochester.edu/College/FS/Publications/Reididentity.html

Michael Heim, The Essence of VR
http://www.rochester.edu/College/FS/Publications/HeimEssence.html

Cyberpunk2.0.2.0/The Role Playing Game of the Dark Future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강성위 옮김, 서양철학사(하), 이문출판사, 1994

박은주, 정보통신시대의 예술, 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 국제학술세미나 자료집 1998
<출전:미술평단 199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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