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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이론의 붕괴에 따른 파편화의 양상 - 2003 미술사. 평론

윤진섭




Ⅰ. 비평적 기준의 상실과 담론의 표류
2003년도 미술비평․미술사 분야는 예년에 비해 훨씬 활성화되었다. 첫 신호탄은 월간미술에서 비롯되었다. 월간미술 2월호가 매머드 특집으로 꾸민 “한국 미술비평의 오늘(Korean Art Criticism Now)”은 현 단계 한국 현대 미술비평의 현황과 문제점을 점검하는 특별 기획으로서 매우 시의 적절한 것이었다. 월간미술의 이 기획은 분량에 있어서 그 전해에 미술세계가 마련한 “한국미술비평 50년, 신춘문예 당선작 다시 보기”(미술세계, 2002년 3월호)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후자가 기획의 초점을 단순히 신춘문예 당선작에 맞췄던 것에 비해 전자는 비평과 창작, 수용 등 3자간의 상호 역학관계를 미술현장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점검했다는 점이 다르다.
미술비평의 입장에서 볼 때, 월간미술의 이 기획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이 분야에 세인의 관심을 돌리게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왜냐하면, 창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이의 구체적인 양상은 특집의 빈도와 지면의 할애에서 찾아볼 수 있다)를 받아온 비평은 그동안 변변한 자기 발언의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평이 자기 발언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중대한 사실을 내포한다. 그것은 비평의 독자성 내지 자세 확립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비평은 과연 죽었는가?”하는 요지의 비평 무용론이 제기되기까지에는 비평가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비평적 태도에 대한 세인들의 비아냥거림이 끊임없이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주례비평, 거간비평이란 오명은 말할 것도 없고, 독창적인 비평적 담론의 부재 및 비평적 선도 기능의 약화는 비평에 대한 불신을 낳은 주범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월간미술의 이 특집이 제기한 파장은 신선한 것이었다.
월간미술이 “한국 현대 미술비평의 해부”란 표제어를 통해 제기한 문제 의식의 핵심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비평의 대응 양상이다. 즉, 세계의 틀이 끊임없이 변모해 가는 오늘날의 문화지형도 속에서 비평은 과연 어떻게 적응해 갈 것이며, 맡은 바 소임을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월간미술은 1990년대를 ‘중심이 상실된 시대’로 규정하면서, 인문학 내지 사회학적 실천으로 옮겨가고 있는 문화현상 속에서 비평은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과 담론으로 생존을 도모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지난 10여 년 간에 걸쳐 미술비평이 스스로 저질러 온 비평의 직무유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 이후, 모든 것이 용인되는 듯한 ‘다원주의(pluralism)’의 홍수 속에서 비평적 판단의 기준 자체가 모호해진 것이 근본적으로는 직무유기의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비평의 자유방임주의 시대-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모호한 가치 평가 속에서 우리의 미술은 끝없이 표류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술평론가 심상용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경청해 볼 만 하다. “비예술로부터 예술을 가려내거나 거짓과 기만으로부터 진실을 가려내려는 시도들이 일체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된다면, 결국 비평의 지평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심상용, 비평의 역류 또는 역류적 비평의 실천을 위해, 월간미술 2003년 2월호)

Ⅱ. 현장비평과 미술사와의 관계
현장비평과 미술사와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실증에 입각한 현장비평은 미술사에게 사료(史料)를 대주는 젖줄이다. 미술사는 구체적인 작품과 당시의 미술비평, 그리고 정확한 사료들-신문 및 잡지기사, 작가 인터뷰, 증언 및 각종 통계자료 등등-을 근거로 기술된다. 한국에는 현재 7천 건을 웃도는 각종 미술 전시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그리고 수십 여 개가 넘는 미술전문잡지, 신문, 방송,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이 이 전시회들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폭증하는 각종 정보는 그 나름대로 폐해를 낳는 측면도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오보(誤報)와 각종 기록에 따른 오류(誤謬)다. 미술연감 기록담당자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오류들을 교정하여 기술하는 일이다.
미술세계 3월호의 한국미술기록보존소(수석자료관 김철효)에 대한 탐방기사(기자 박혁일)는 사실(史實)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좋은 기회였다. 문화예술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의 실정으로 볼 때, 삼성미술관이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기증한 4만 여 점의 자료를 바탕으로 1998년 12월에 설립한 이 기록보존소의 존재는 미술에 있어서 기록과 사료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약 4,700여 점에 이르는 비도서 문헌자료를 비롯하여 1,705점의 인화사진, 15점의 네거티브 필름, 1,597점의 슬라이드, 84점의 오디오 인터뷰 테이프, 56점의 비디오 인터뷰 테이프, 54점의 CD 등등 총 8,211점의 각종 미술관련 자료들이 소장돼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미술사 기술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소재들이다. 특히 최근에 이 기록보존소가 벌이고 있는 ‘구술사 프로젝트’는 기록이 인멸된 근․현대미술사의 진공 부분을 원로미술인들의 구술을 통해 채워 넣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업이다. 이 사업과 병행하여 최근 문예진흥원(원장 현기영)이 시작한 ‘한국 근․현대 예술사 증언 채록사업(2003-2005)은 원로예술인 100명을 대상으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굴절된 우리 예술사를 바로잡기 위해 기초자료를 집대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예상의 이벤트이다. 이러한 민관 주도의 문예사업은 미술자료의 수집, 보존, 정리라는 차원에서 볼 때, 향후 미술사 및 비평분야의 활성화에 상당히 기여할 전망이다.

Ⅲ. 몸 담론의 확산과 비판적 검열기능의 부재
1990년대 후반에서 오늘에 이르는 기간동안 한국미술의 화두는 단연 ‘몸(body)’이다. 몸의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육체의 반란(?)’이 줄을 이었다. 그동안 국내의 미술잡지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도발적인 몸의 이미지를 싣기에 바빴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주로 베니스 비엔날레를 비롯한 각종 국제전과 국내의 기획전 및 개인전에서 온 것들이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이처럼 몸 이미지의 현란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미술 상황에서 정작 몸이 왜 그렇게 중요한 소재로 부각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심층적 분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부분의 미술잡지들이 단순히 감각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서, 그 이면에는 미술의 상업성과 관련된 교묘한 전략이 숨겨져 있다.
미술저널이 한 시기의 미술의 흐름을 형성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몸을 둘러싼 쟁점의 부상은 세심한 검증을 필요로 한다. 잡지에 실린 기사는 물론, 평문에 대한 메타비평이 불가피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가령, “해외미술의 소개라는 명분으로 검증이 결여된 상태에서 쏟아져 나오는 몸의 이미지들은 국내 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무분별한 몸 관련 기획전의 난립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미술의 주체성 확립과 함께 해외문화의 선별적 수용이란 순기능을 행할 수도 있다. 가령, 1998년 10월 30일, 한림미술관과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몸과 미술:새로운 미술사의 시각>이란 국제학술심포지엄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준 행사였다. 학제적 연구를 통하여 몸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를 도모한 이 심포지엄은 사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몸에 대한 국내 독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몸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볼 때, 월간미술 1월호에 실린 몇 개의 글은 몸의 인식론적 이해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충족시킨 좋은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로댕갤러리에서 열린 <신체풍경전>(2002. 12. 6-2003. 2. 23)을 분석한 김혜경(독립큐레이터)의 ‘평온한,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신체풍경’을 필두로, 정화열(정치학자, 미국 에모리대 교수)의 ‘횡단적 몸의 정치 혹은 횡단적 신체해석학’, 조광제(철학, 철학아카데미)의 ‘몸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몸에 대한 정화열 교수의 해석이다. <몸의 정치>(1999)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함으로써 몸에 대한 철학적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던 그는 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신체해석학(Carnal Hermeneutics)’이라는 독자적인 용어로 부르고 있다. 그는 몸을 인간의 사회적 교류에 필수적인 수단으로 파악하며, 이의 실체를 구명(究明)하는 작업이 하이데거, 가다머, 리쾨르와 같은 철학자들의 해석학적 관점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신체해석학’은 학문과 문화의 경계와 영역을 가로지르며 이를 상호 조화시킨다는 점에서 ‘횡단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몸은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부딪치며 갈등하는 사회적 장소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닌 능동적인 주체이자 행위자’인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텍스트이다. 그의 이러한 철학적 관점은 미술비평에 원용될 때 이불의 사이보그, 김아타의 <뮤지엄 프로젝트>, 김일용의 인체조각 등등 몸을 주제로 한 국내작가들의 작업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비평적 전거를 제공해 준다.
2003년 한해동안 몸 담론과 관련한 기획기사로는 “비디오 아트의 최전선”, “빌 비올라”(이상 월간미술, 4월호)를 필두로 “한국 구상조각의 정체성 찾기”(월간미술 5월호), “중국 전위회화와 냉소적 리얼리즘”(미술세계, 11월호), “아시안 아트 네트워킹”(월간미술, 12월호), “New Face from Asia 2003'(아트 인 컬처, 2월호) 등등을 꼽을 수 있다.

Ⅳ. 아시아적 관점에서 본 비평이론의 활성화와 기획전의 증대
아시아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의 대두는 멀게는 80년대 후반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사태와 90년대 초반 구 소련의 몰락과 관계가 있으며, 가깝게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이후 블록화된 세계의 문화지형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과거에 세계를 떠 받쳐왔던 이념의 양대 축이 무너진 이후, 세계가 미국을 포함한 북미권, 유럽연합권(EU), 남미권, 아시아권 등등으로 분할, 재편되면서 각기 자체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쪽으로 문화전략의 방향이 수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아시아는 서양의 입장에서 본 ‘오리엔탈리즘’의 일방적 오명에서 벗어나 대등한 세계문화의 동반자로서 새롭게 부상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아시아 미술의 조명에 무게를 실었던 2000년의 [제3회 광주비엔날레]에 이어 2002년에 광주비엔날레 이사회가 2004년에 있을 [제5회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를 ‘아시아적 담론’으로 정한 것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11월 27일부터 29일까지 열린 동서양 미술문화 비교 국제 심포지엄은 제5회 광주비엔날레의 이론적 초석을 다지기 위한 학술행사였다. ‘시각예술에서의 동양성 다시보기(Rethinking of Orientalness in Visual Art)를 주제로 내건 이 학술발표회(광주비엔날레,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현대미술학회 공동주최)는 모두 3부로 구성되었는데, 제1부 ’동양성의 문예적 담론‘, 제2부 ‘시각예술에서의 동양성’, 제3부 ‘동양성의 사회문화적 재고’ 등이다. 이 중에서 한국측 발제자의 발표제목을 보면, ‘생태적 숭고미:산수화의 이념’(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현대 한국미술의 ‘한국성’ 형성요인의 다면성(김정희,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한국미술에서의 동양성 개념의 출현과 변형’(정형민,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 ‘김환기의 모노크롬 회화에 나타난 산수화 정신’(윤익영, 창원대 미술학과 교수) 등이다.
광주비엔날레의 학술심포지엄을 전후하여 아시아 미술을 테마로 한 국제전이 몇 군데서 열렸던 것은 적어도 아시아 미술의 잠재력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아시아 미술의 전시 붐 현상은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하여 [부산비엔날레], [샹하이비엔날레], [북경비엔날레], [요코하마트리엔날레], [후쿠오카트리엔날레] 등등 아시아 지역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미술행사와도 관계가 있다. 이러한 행사들을 매개로 큐레이터들간의 상호 소통이 활발해지면서 각종 정보의 교환에 따른 인적, 물적 교류가 일종의 협업형태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는 최근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City_net Asia 2003]을 들 수 있다.

Ⅴ. 미술비평 및 미술사 연구를 위한 사회적 여건조성 시급
‘평론가와 작가사이’를 주제로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주최한 [2003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추계학술세미나](2003. 10. 18, 장소:홍익대학교 조형관, 후원:홍익대학교 환경미술연구소)는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작가연구 내지 텍스트 해석의 관점을 새롭게 제기한 뜻 깊은 자리였다. 이 세미나는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가들이 직접 질의자로 나서 기존의 비평 텍스트 중심의 학술세미나가 지닌 일방적 소통의 난점을 작가들의 육성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는 비평계통의 학술세미나가 지닌 일방적 편향성을 벗어나 관객들에게 창작을 둘러싼 소통의 문제를 제시한 사례로 기억될 만 하다. ‘구경숙의 작업-존재를 투영하는 물 오브제’(고충환), ‘강관욱의 작품세계’(신항섭), ‘오만과 자긍심-안창홍 작품의 한 단면만 읽기’(최태만) 등등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한국큐레이터포럼이 주최한 심포지엄 ‘뮤지엄 프로페셔널이 던지는 화두’(6. 21, 흥국생명 대회의실)는 이 모임이 발족한 1999년 이후 첫 번째로 열린 행사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형식과 규모를 갖춘 심포지엄이라기보다는 회원 중심의 토론이 위주가 된 일종의 간담회 성격이 짙어 일말의 아쉬움을 남겼다. 박물관․미술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큐레이터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우리의 실정으로 미루어 볼 때, 큐레이터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직업에 대한 정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우리사회의 보다 나은 문화적 성숙을 위해서는 문화의 생산자인 큐레이터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미술비평과 함께 미술사는 미술현장을 살찌우는 양대 영역이다. 그러나 국내에 서양미술사학회를 비롯하여 현대미술사학회, 근대미술사학회, 미술사연구회, 미술사교육학회, 한국미술사학회 등 많은 미술사 관련 학회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동상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저널의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미술잡지들은 학회들이 주최하는 각종 학술대회를 대부분 단신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신문에 보도되는 일이 드문 것이 현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학술회의장은 썰렁하기 일쑤이며, 학회들은 행사와 관련된 각종 후원이나 지원금, 협찬을 받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표로 이만한 것이 없는데, 대부분의 미술사 관련 학회들은 학술진흥기금은 물론 문예진흥기금 수혜에서 배제되어 있는 형편이다. 비술비평이나 미술사를 비롯한 인문학 내지 기초학문의 육성을 위한 정부차원의 대대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토록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회들이 학술발표회를 가졌던 것은 2003년 미술계의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이 기간에 열렸던 미술이론 및 미술사 관련 단체들의 활동내용 중 일부를 기술한 것이다.
․동아시아 미술문화학회(회장:송미숙 성신여대 교수) 창립대회:5. 31 오후 2시, 장소:성신 여대 수정관, 김선정(아트선재센터 부관장), 김용철(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장석원 (전남대 교수) 발제.
․현대미술학회(회장:김영호 중앙대 교수) 춘계학술대회:주제, 현대미술과 철학, 5. 17, 장 소: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강의실, 발제자:박준원(동아대 교수-라캉과 현대미술에 관하여, 박일호(이화여대 교수-카시러의 예술론), 이유숙(부산대 강사-현대미술과 조르쥬 디디-위베르만) 등.
․미술사연구회(회장:김기주 교수) 춘계학술발표회 장소:홍익대학교 조형관, 5. 17, 발제자: 윤경희(갤러리서미 큐레이터-고희동의 생애와 회화연구), 정은선(홍익대학교-1930~40년 대 중국 목판화에 미친 서구미술의 영향), 손현정(한국전통문화학교 강사-터너의 색채 표현에 나타난 양극성 연구) 등.
․예술경영연구 2집 발간, 한국예술경영학회(회장:김재준): 김형숙의 ‘한국미술교육의 현황 과 전망’, 양지연의 ‘박물관․미술관의 교육 프로그램 운영 현황과 개선방향’, 황동열의 ‘사이버 문화 예술교육에 대한 이용자의 수요분석 연구’ 등 6편의 논문 수록.
․서양미술사학회(회장:정영목 서울대 교수) 주최 국제학술 심포지엄, 4. 19, 장소: 이화여 자대학교 SK관, 동 학회 현대미술분과(위원장:김정희 서울대 교수) 주관. 주제:‘현대미술 의 패러다임을 바꾼 전시’.
발표자:김정희(서울대 교수-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전시들과 우리나라 현대미술)
로버트 로젠블럼-The New American Painting
만프레드 슈네켄부르거(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 학자-Documenta-History, Myth, Ideology)
장 루이 프라델(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 미술사 교수-La Figuration Narrative)
진휘연(SADI 교수-When Europe Meets American Avant-garde, When Attitudes Become Form:Historic Meaning of the Show)
김재원(이화여대 강사-1980년대 신표현주의와 ‘시대정신(Zeitgeist)-<시대정신전>의 미 술사적 의미와 한계)
․현대작가 에뽀끄회(회장:김종일 전남대 교수), 창립 40주년 기념 현대미술 학술지 ‘에뽀 끄’ 창간, 수록내용:특집1, 한국 추상미술 50년, 에뽀끄회 40년 발자취, 특집2, 추상미술 선구자를 조명한다:최종섭 등.
․한국근현대미술기록연구회 학술심포지엄 개최:11. 1 오후 1시, 장소:이화여자대학교 이화 포스코 B153, 주제:‘근대 일본 미술학교의 양화․디자인 교육과 수용’, 발표자:요시다 치 즈코(동경예술대학-아시아 미술의 근대화에 있어서 동경미술학교의 역할), 김용철(경기도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제국미술학교의 서양화 교육), 전혜숙(이화여대-제국미술학교 유학 생을 통해 본 서양화 수용), 가시와기 히로시(무사시노 미술대학-일본 근대 디자인의 합 리화와 생활양식) 등.
․한국미술이론학회(회장:정영목 서울대 교수):12. 6, 서울대에서 창립 총회 및 학술 대회 개최.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학술세미나, 주제:‘미술과 제도’, 10. 18, 장소:이화여자대학교 학생문 화회관 소극장, 발제자:김향미(일본아시아연구소 연구원-우리나라의 개항기를 전후로 한 서구적 미술교육의 수용 및 변용과정에 관한 연구-초등미술교육을 중심으로), 정준모(국 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한국 근현대미술관사), 문정희(동아시아 관전의 심사위원과 지방색), 우동선(세끼노 타다시(關野貞)의 한국 고건축 조사와 보존에 대한 연구), 최열 (1950년대 미술계 제도에 관하여-1946년~1961년 관료 부문을 중심으로) 등.

Ⅵ. 결어-미술비평과 미술사의 제휴를 위하여
이상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2003년 한해에 나타난 미술비평 및 미술사 분야의 동향은 순수 비평이론이나 미술사 방법론과 같은 원론보다는 특정한 시기의 미술운동에 대한 고찰이나 사실(史實)에 대한 실증적 탐구, 특정한 미술현상에 대한 비평적 접근 등 각론에 대한 연구로 집약된다. 이러한 현상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술사 분야의 주요 이슈로 부상되었던 후기 식민주의적 관점이나 미술비평에서의 젠더, 페미니즘, 키치, 페티시즘 등등 오늘날의 문화현상을 요해할 수 있는 용어들에 편중됐던 태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최근에 일고 있는 일본 미술사학계와의 잦은 학문적 교류는 우리 근대미술의 형성이 일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상기할 때, 매우 바람직한 현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미술비평과 미술사 사이의 유리된 관계는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우리 앞에 남아있다. 미술비평, 그 중에서도 특히 현장비평은 성격상 ‘지금, 여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바로 이러한 성격이 지난날의 미술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미술사와 교호(交互)를 이루지 못하는 주원인이다. 또한 엄밀한 학적 체계를 갖춘 학문으로서의 미술사와 미적 경험 내지 미적 판단에 따른 직관이 중시되는 ‘행위(activity)’로서의 미술비평 사이에 드리워진 깊은 심연도 둘 사이의 상호 협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을 누를 수 있는 자세가 돼 있다면,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우리 미술의 발전에 더 없는 보탬이 될 것이다.

“미술비평은 예술로서 미술작품을 이해하는 우리들의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고 미술사의 목표는 예술로서 미술작품의 이해에 있기 때문에 미술사의 최종단계는 미술비평이고, 또 미술비평이어야만 한다.”(리오넬로 벤투리, <미술비평사> 서문 중에서)


- 월간미술 연감 < 한국미술 2004> 96 -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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