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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예사의 첫사랑

윤진섭



아마 중국만큼 단기간에 세계의 미술계를 석권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중국은 마치 해일처럼 유럽과 미국, 그리고 아시아의 각 지역을 순식간에 덮쳐버렸다. 1989년, 중국미술관에서열린 역사적인 아방가르드의 거사, 즉 [중국현대미술전] 이후, 중국의 현대미술은 한국과 일본의 미술이 몇 십 년에 걸쳐 이룩한 성과 이상의 것을 달성했다.
지난 호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이러한 사태를 촉발시킨 근본적인 요인은 천안문 사태와 원명원의 해산에서 비롯된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중국의 많은 미술평론가와 작가들은 유럽, 미국, 일본 등지로 살길을 찾아 퍼져나갔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페이 다웨이, 후 한루, 황 용핑 등은 파리에, 차이 구오 쾅, 황 루이 등은 동경에, 슈빙, 장 후안 등은 뉴욕에 작업의 둥지를 틀었다.
중국의 현대미술이 세계적으로 부각된 것은 베니스 비엔날레와 상파울로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광주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적인 대규모의 미술행사를 통해서였다. 특히 1999년에 열린 제48회 베니스비엔날레는 문자 그대로 중국미술 특수였다. 예술감독 하랄드 제만이 직접 기획한 [아페르튀토(Apertutto)전]에는 무려 20여 명에 달하는 중국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초대됨으로써 세계 미술의 무대에 중국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석고에 채색을 한 거대한 인물상을 여러 점 출품한 왕두는 단번에 정상급 작가로 부상하였으며, 차이 구오 쾅은 황금사자상을 수상, 기염을 토했다.
그 뿐만 아니라 ‘정치적 팝’의 대표작가로 알려진 왕광이는 이보다 앞선 1994년 제22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가, 일찍이 국제적인 작가로 자리 매김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949년이래 중국은 ‘죽의 장막’이란 용어가 의미하듯 철저히 베일에 감춰진 나라였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분야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나 예술 역시 서방세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비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미술의 경우, 중국은 19세기 말엽에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문호를 개방한 이래 서구미술의 유입에 대해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중국의 이러한 태도는 아편전쟁 직전 청의 건륭제가 지니고 있었던 강한 문화적 자부심을 연상시킨다. 당시 중국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건륭제는 영국을 일개 야만국으로 간주하여 대영제국의 국왕 조오지 3세의 통상 제안을 점잖게 거절하였는데, 그 이면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 외에도 자국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높은 우월감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마이클 설리반이 <중국미술사>에서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이, 청의 통치자들은 서구미술에 대한 일종의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서구의 미술이 중국의 근대화나 제도의 개혁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서구 문화에 대한 그들의 뿌리깊은 경멸감은 자국의 수준 높은 문화에 대한 우월감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바, 그것은 서구의 발달된 신문명에 대해 보인 호의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중국의 전통미술을 보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사회를 뒤흔든 20세기 초엽의 서구화 과정에서 중국의 지식인 그룹은 전통의 막강한 힘에 여전히 신뢰를 보이고 있었으며, 문화적 자부심은 전혀 퇴색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서구 근대미술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화가들이 흔들림 없이 전통에 바탕을 둔 조형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훗날, 마오쩌둥이 “외국의 문물이 중국에 기여하게 하라.”고 예술가들을 독려하였지만, 서구예술의 수용을 둘러싼 혼돈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공산당 정권의 수립과 더불어 중국의 사회주의는 사실주의 미술의 양식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미술의 기능, 즉 정치적 선전 선동의 기능으로서의 ‘프로파간다’가 급 물살을 타기 시작했는데, 이 새로운 물결은 ‘인민에게 봉사하는 미술’이 되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교시가 촉발시킨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낙후된 농업국에서 벗어나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것이 지상과제였기 때문에 화가들은 국가건설에 필요한 현장의 모습을 사실주의의 필치로 묘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서구의 모더니즘적 화풍이나 아방가르드는 점차 사라져갔다.
지난 호의 글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예술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매우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1960년대 중반 무렵, 비록 서구사회에 비견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중국사회에 만연한 부르주아적 현상은 당연히 문화대혁명의 표적이 되었다. 미술전시회 조차 마음대로 열 수 없는 폐쇄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수의 미술학교와 박물관들이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분야에 종사하던 미술인들을 비롯하여 학자, 교수, 연구가들은 수정주의자로 몰려 숙청되었으며, 사회적 멸시와 수치심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학문과 예술이 종언을 고했다는 서방세계의 관찰에도 불구하고 가공스런 문화말살의 행렬은 계속되었다. 이 행렬은 1976년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의 처형으로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의 미술은 중국 현대미술사상 가장 침체되고 경직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덩샤오핑에 의한 개혁․개방 정책은 비단 산업뿐만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도 표현의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서구의 아방가르드 미술이 유입되는 가운데 여기에 관심을 보이는 작가들이 점차 늘어갔다. 이들은 80년대 초반, 방만한 자유화 현상에 당황한 공산당 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는 사태를 겪기도 했지만,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항거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였다. 천안문 사건과 원명원 사태로 촉발된 미술인들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저항은 마침내 국외의 탈출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의 현대미술이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서구의 큐레이터, 화상, 미술관 관장, 미술전문지 기자들이 보인 중국 현대미술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이후 서구의 미술관계자들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중국미술에 대해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중국시장의 무한한 잠재력에 군침을 흘리던 서구 제국의 경제적 이해와 관계가 있다. 중국의 시장에 침투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교두보 마련에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세련된 방법은 아무래도 문화교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중국미술이 지닌 엄청난 두께와 폭에도 불구하고 유독 중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서구사회가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일까? 왜 서구의 미술 관계자들은 유독 중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주 키는 이점에 대해 다소 불만스런 어투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서구인들은 서양의 제도 미술기관을 통해 중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세계에 소개해 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중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단연코 ‘아니오’이다.”

그의 불만은 중국미술의 서구 종속화 현상과 관계가 깊다. 그에 의하면 1990년대에 서구인들이 아방가르드라고 생각한 중국미술은 두 가지 중 하나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서구미술을 닮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닮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구미술을 닮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중국미술이 형식에 있어서는 서구미술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라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부연하면, 서구인들은 중국미술의 독창적인 면보다는 서구적 형식으로 번안한 중국의 사회와 문화, 정치에 대한 현상을 소재로 한 작품들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여기에는 서구인들의 문화 우월주의적 시각이 은연중에 배어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주 키의 이러한 시각에 동의한다. 지난 10 여 년 간 우리 또한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서구의 화상, 큐레이터, 미술관 관장, 미술전문지 기자들이 뻔질나게 한국을 드나들면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작가들을 선정, 국제무대에 소개했던 것이다. 대략 10여 명 안팎인 한국의 소위 국제적인 작가들은 중국의 경우처럼 서구적 아방가르드 색채가 짙은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아뿔사! 그렇다면 모두들 줄 위에 올라탄 곡예사들이 아닌가. 노련한 조련사에 의해 조종되는......

- 시사주간지 <차이나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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