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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왕국

윤진섭

게임의 왕국

윤진섭(미디어시티서울 전시총감독)




Ⅰ. 서언(序言):접촉의 사회적 의미

인생은 하나의 게임이며, 사회는 거대한 게임장이다. 흥분, 트릭, 열광, 환호, 전략, 규칙, 개그, 퍼즐, 유머, 놀이 등등 게임이 지닌 다양한 속성과 그것들이 제공하는 다채로운 감정들이 그 속에서 전개된다. 예술은 인생에 대한 유비(analogy)로서 이러한 성질들을 작품을 통해 발현해 낸다.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사회를 원만히 존속시키기 위한 ‘쓰다듬기(stroke)’의 형태로 존재한다.
‘접촉’은 이러한 ‘사회적 쓰다듬기’의 행위로부터 도출된 개념이다. 그것은 데스몬드 모리스(Desmond Morris)에 따르면, “인간이란 동물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기술”이다. 그는 접촉을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로 간주하는데, 편지를 쓰거나 말을 거는 행위, 껴안거나 냄새를 맡는 행위 등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행위들이 갖는 중요성은 그것들이 사회를 결속시키고 인간관계의 친밀도를 높여주는 수단이란 점이다.

이 접촉의 의미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우레이와 아브라모비치(Ulay/Abramović)가 행한 <계측불가능성(Imponderabilia),1977년작>이란 퍼포먼스다. 이 작품의 무대는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이다. 거기, 약 1미터 남짓 되는 흰 색의 좁은 통로에 우레이와 아브라모비치가 벌거벗은 상태로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사이를 평상복을 입은 관객들이 통과한다. 90분 동안 행해진 이 퍼포먼스에 나타난 흥미로운 현상은 두 사람 사이를 통과하는 관객들 대부분이 두 사람 중 누군가의 얼굴을 쳐다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관객참여 형태의 이 퍼포먼스를 통해 두 사람은 인간들이 신체접촉을 통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당혹감, 두려움, 어색함, 즐거움, 민망함 등등 두 사람 사이를 통과하는 관객들에게서 나타나는 다양한 심리적 반응은 신체가 다름 아닌 감정의 거소(居所)임을 말해준다.


‘우레이와 아브라모비치’의 이 퍼포먼스에서 나타나는, 비좁은 통로를 통과하면서 겪게 되는 피부접촉은 일종의 쓰다듬기 의식(儀式)이다. 이 쓰다듬기 의식은 원숭이 사회에 비견된다. 데스몬스 모리스는 원숭이 사회를 관찰한 적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원숭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온종일 털을 쓰다듬거나 이를 잡아주는 행위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 같아도 원숭이 사회의 결속력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원숭이 사회에서 엿보이는 이러한 집단적 행위는 인간 사회에도 적용된다. 일상적인 인사나 의미가 없어 보이는 대화들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친화력을 북돋우는 요소인 것이다.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에 의하면, 이러한 ‘언어적 쓰다듬기’는 놀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한다. 모든 문화에 내재하는 기본적 특성인 놀이는 공동체 사회의 친화력과 결속력을 높여주는 중요한 문화적 형식인 것이다. 언어가 몸짓과 함께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일차적 수단이라고 할 때, 은유는 낱말에 기초한 놀이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위나 제스처는 다같이 놀이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Ⅱ. 디지털 호모 루덴스의 등장과 예술의 치유적 기능

알다시피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네델란드 태생의 저명한 문화사가인 요한 호이징가가 1938년에 출판한 동명의 저서를 통해 주창한 개념이다. 그는 ‘도구를 만드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와 ’생각하는 인간’이란 의미를 지닌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란 기존의 정의에 ‘놀이하는 인간’이란 뜻의 ‘호모 루덴스’란 개념을 덧붙임으로써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개념이라고 한다. 문화가 인간사회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높은 설득력을 지닌다.

[미디어_시티 서울 2004]는 기존의 ‘호모 루덴스’ 개념에 ‘디지털’이란 접두어를 붙이고자 한다. 따라서 ‘디지털 호모 루덴스’는 21세기를 지향하는 현대의 디지털 문화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과 의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호이징가의 주장에 대한 단순한 패러디를 넘어서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새로운 문화적 현상에 대한 한 예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시는 현대의 첨단적인 하이-테크놀러지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관객들은 테크놀러지와 예술 간의 결합을 통해 전개되는 예술가들의 놀라운 상상력과 만나게 될 것이며, 현대 기술사회의 눈부신 성과를 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테크놀러지가 지닌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현대의 발달된 테크놀러지는 편리함과 유익함의 이면에 전갈의 독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가령, 명멸하는 디지털의 신호들은 인간의 행동을 재촉하는 채찍과도 같다. 그것은 자연을 바탕으로 한 아날로그에서 ‘느림의 미학’, 다시 말해 ‘느림’이 가져다주는 한가(閑暇)와 여유를 빼앗아갔다. 그것은 1과 0이라는 이진법에 의해 이루어지며, 비트(bits)를 기본단위로 하는 세계이다. 인터넷과 컴퓨터 게임으로 대변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사용자를 몰입시킴으로써 종국에는 중독에 이르게 하는 해악을 가져다준다.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시뮬라크르의 세계는 현실과 가상의 전도(顚倒) 현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디어_시티 서울 2004]가 전시의 형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보다 예술이 지닌 치유의 기능에 주목하고자 한다. 자유방임의 상태로 전개되는 디지털 매체의 해악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건전한 상태의 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는 예술가들에 부여된 만고불변의 권리이다. 샤만으로서 예술가의 역할이 새삼 강조되는 시점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놀이의 가장 고양된 형식인 제의(祭儀)를 통해 성현(聖賢:hierophany)을 되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주지하듯이, 성현은 세속화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갈구되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면, 성의 상품화가 만연된 현대사회-그것을 주도하는 매체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우리가 다루려는 ‘디지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자-와 이윤 추구에만 빠져있는 자본주의는 이러한 세속화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는 컴퓨터 게임은 성과 폭력을 앞세워 돈벌이에만 혈안이 돼 있는 후안무치한 인간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서 윤리와 도덕은 이제 찾아볼 수조차 없다. 또한 스팸 메일을 통해 시도 때도 없이 침투하는 포르노 사이트는 영혼을 좀먹는 바이러스이다. 어디 그뿐이랴. 폭력적이며 자극적인 사이버 이미지의 증식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있지 아니한가.
예술이, 세속화된 사회를 그 해악으로부터 구제하려면 보다 승화되고 거룩한 면모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예술작품에서 물신의 때를 벗기지 않으면 안 된다. 물신주의의 세속적인 프레임으로부터 예술작품 본연의 치유적 가치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디지털 매체가 지닌 파급력과 가공할 위력을 감안할 때, 그 해악을 치유하려는 의지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 현대 문명의 위기적 상황이 놓여있는 것이다.
성현(聖賢)의 재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예술과 제의의 동원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인 해리슨(Jane Harrison)이 <고대 예술과 제의(Ancient Art and Ritual)>에서 치밀하게 분석해 내고 있는 것처럼 예술은 제의와 동일한 뿌리를 지니고 있다. 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러 교회에 가는 것과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가는 것은 유사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현대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이나, 고대 희랍의 사회에 있어서 이점은 명백한 일이었다. 가령 디오니소스 축제(Spring Festival of Dionysos)에 참가하는 일은 곧 성스러운 땅으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했다. 일상의 공간과는 절연된(cut off) 성스러운 공간에서 예배에 참석하거나 비극을 관람하는 일은 해묵은 죄악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심리적 기제였던 것이다.

고졸(古拙)을 의미하는 ‘아르카익(archaic)’이라는 단어가 어원상으로는 시작(to begin)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자. 세계는 순환하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패션이지 본질이 아니다. 고대인의 인간적 본질이 현대인의 그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오늘의 관점에서 놀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서 호이징가의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면, 놀이의 가장 고양된 형식은 축제나 제의와 같은 성스러운 경지를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금번 [미디어_시티 서울 2004]의 주제가 ‘게임/놀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예술을 통해 게임의 바람직한 전형을 확보하는 데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디지털 매체의 총아인 컴퓨터에 의한 게임이다. 그것은 과학기술과 예술이 융합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컴퓨터 게임이 단순히 과학의 힘을 빌리는데 그치고 말 때 직면하게 될 위험을 방지해 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게임이 단순히 과학기술에만 의존할 때 파생되는 윤리적 문제를 예술이 해소해 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호세 아르겔레스(José A. Argüelles)에 의하면, 샤먼의 일차적인 기능은 예술이나 과학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psyche)과 기술(techne) 사이에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혼탁한 영혼을 치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만약 우리가 예술에 한 가닥 기대를 건다면, 그것은 예술이 지닌 바로 이 치유의 능력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치유의 능력은 마치 샤먼처럼 아르카익의 경내에 들어선 탁월한 예술가의 영험한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Ⅲ. 디지털 매체의 상호작용성과 예술의 소통

예술이 본래 지녔던 싱싱한 비경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테크놀러지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날 더욱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우리를 옥죄는 족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러 분야에서 목격하고 있다. 유전공학이나 컴퓨터 게임의 부정적인 측면은 그런 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전쟁을 소재로 한 컴퓨터 게임이나 선정적인 포르노 게임의 부정적인 측면은 예술을 통해 정화되거나 견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적 게임을 통해 상업적 게임의 해악을 구축(驅逐)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 중에는 해킹이나 부품의 조작을 통해 상업용 컴퓨터 게임이 지닌 부정적 측면을 예술적 가치로 승화시킨 것들이 여러 점 눈에 띈다. 관객들이 그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다. 최근에 문화일보는 한국 국민의 75%가 컴퓨터 게임을 즐긴다고 보도한 바 있다. 국민 4명 중 3명이 게임을 한 적이 있으며, 10대는 95%가 게임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는 하루 3시간 이상 게임에 몰입하는 ‘중독성 게임광’도 9.6%에 달한다고 하니 그 폐해를 짐작할 만하다. 신문은 전문가의 말을 인용, 일부 청소년의 경우 게임 중독에 대한 치료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 게임이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매체가 지닌 상호작용적(interactive) 측면은 예술의 대중화를 통해 문턱을 현저하게 낮추는 선의의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즉,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의 예술이 지녔던 일방적 소통에서 쌍방향 소통으로의 일대 전환은 미적 체험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축제성과 제의성의 회복을 암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으로 볼 수 있다. 독백에서 대화로의 전환, 단일 채널에서 다채널로의 전환, 소수의 예술가에서 창조적인 익명적 대중으로의 전환은 예술의 변화 국면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현재 대중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디카, 블러그, 아바타와 같은 신종 문화 바이러스의 증식은 디지털 매체가 낳은 부산물로서 예술의 변화를 촉진하는 촉매들이다. 그와 함께 하나의 서버를 통해 익명의 다수가 즐기는 리니지 게임은 인터넷 동호회와 함께 ‘디지털 씨족사회’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국경이 없는 가상의 사이버 공간은 이제 새로운 형태의 유목민을 양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과연 신의 축복이 될 것인가. 속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디지털 매체가 건전한 내용의 게임이나 놀이를 선도해 나갈 때, 아날로그의 국경을 허물고 새로운 형태의 공동사회를 구현할 확률은 매우 높다. 우리가 예술에 기대를 걸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일 것이다.


Ⅳ. 결어(結語): 문화적 형식으로서의 게임과 놀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전시란 무엇인가? 문화적 형식의 한 형태이다. 우리가 그것에 거는 기대는 그것이 어떤 의미에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혼탁해진 영혼을 세척하기 위한 예배나 미사와도 같다. 그것은, 인류학자인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탁월한 비유를 빌리자면, 우리가 재생을 위한 문턱에 당도했음을 말해준다. 현대사회의 스펙터클한 광휘는 열광과 환호의 감정을 쏟아내기에 충분하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경기는 그러한 감정을 촉발시키는 계기이다. 운동경기가 규칙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정신의 유희를 전제로 하는 예술과는 그 성격이 다르나 ‘사회적 쓰다듬기’의 행위라는 점에서는 다 같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회에는 수많은 게임의 형태들이 존재하나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점에서 놀이와는 구별된다.

월드컵 응원에서 나타난 것처럼 퍼포먼스에서의 신체 접촉이나 컴퓨터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상호작용은 사회적 콘텍스트에서 조망할 때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대 제의가 지닌 원형성(archetype)에 대한 희구의식(希求意識)이다. 호이징가는 이 점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으로 분석을 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고대 원시사회의 제의는 신성한 의례, 봉헌, 희생의식, 신비의식으로 치러진다. 그런데 이 모든 의식들은 “본질이 진실하게 이해된 순수한 의미의 놀이정신에 입각하여 세상의 안녕을 위해 치러진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게임과 놀이는 파편화된 현대사회를 결속시키고 사회 본연의 공동체 의식을 회복시킬 수 있는 예술의 한 기제인 것이다.

본래 ‘행해진 것(a thing done)’을 의미하는 드로메논(dromenon)은 현대 드라마의 어원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고대 제의나 축제에서 관객이 실제의 행위를 통하여 예술의 기쁨을 맛보았던 것을 뜻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관객과 배우의 분리가 이루어지게 되고 관객은 배우를 통한 대리 체험을 하게 되면서부터 관객참여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예술의 자율화 과정을 통해 고착된 창작자와 향수자의 거리감은 ‘접촉’을 잃어버린 현대사회의 한 반영태이다. 이른바 ‘군중 속의 고독’이나 ‘대중 속에서 개인의 소외’가 점차 설득력을 높여가는 현대사회에서 신체접촉이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의 친화력을 높이고자 하는 움직임이 예술 분야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미디어_시티 서울 2004]는 이러한 문화적 상황에 던지는 질문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술이 예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술만이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는 우리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참고문헌
Johan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The Beacon Press, Boston, 1955, 김윤수 역, 호모 루덴스, 까치,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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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TIMEDIA:From Wagner to Virtual Reality, by Rendal Packer, Ken Jordan, 멀티미디어, 바그너에서 가상현실까지, 아트센터 나비 학예연구실 옮김, 나비 프레스, 2004
Desmond Morris, Intimate Behaviour, 접촉, 박성규 역, 지성사, 1994
Michael Heim, The Metaphysics of Virtual Reality,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 여명숙 역,책세상, 1997
Roy Ascott, Technoetic Arts, 테크노에틱 아트, 새로운 의식, 리얼리티, 예술의 창발을 향하여, 이원곤 역,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Jane Ellen Harrison, Ancient Art and Ritual, Greenwood Press, Publishers, 1969
José A. Argüelles, Art as Internal Technology: The Return of the Shaman-The Descent of the Goddess, Esthetics Contemporary, edited by Richard Kostelanetz, Prometheus Books, 1978
윤진섭, 퍼포먼스에 있어서 ‘신체접촉’의 의미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Meaning of physical contact in Performance Art, 부산대학교 조형예술연구소 창간기념논문집 제1집, 2004
윤진섭, 사이버아트/사이버공간/가상현실/사이버모험.../사이버레스토랑, 미술평단, 1999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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