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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여! 소수의 목소리를 듣자

윤진섭

나는 얼마 전에 제37차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국제미술평론가협회는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미술평론가들의 모임이다. 61개국에 약 8,0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1948년과 49년에 개최된 두 차례의 총회를 통해 유네스코 산하의 공식 비정부기구(NGO)로 등록되었다.

회원들의 권익옹호와 친목도모는 물론, 전 세계에 걸친 네트워크를 통하여 시각예술에 관한 다양한 비평적 의견 개진과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창설된 이 협회는 매년 한 차례씩 총회를 열고 있다. 올해의 개최지는 카리브 해에 있는 작은 섬나라 바베이도스(Barbados). 인구 약 2십 7만여 명에 34킬로미터의 길이, 22킬로미터의 너비를 지닌 독립국가다. 주민의 대다수는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며, 기타 영국과 네덜랜드계의 백인, 아메리카 인디언(Amerindian)으로 구성돼 있다. 산업은 사탕수수, 담배, 면화 등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이 주류를 이루며, 천혜의 자연 경관을 이용한 관광 레저 산업이 발달돼 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워싱턴이 한 때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머문 곳으로도 유명하며, 1966년에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였다.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읍 소재지를 연상시키는 이 나라의 수도 브리지타운(Bridgetown)은 한가해 보이는 도시다. 도무지 급할 게 없어 보이는 주민들의 무심한 표정과 선량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60년대의 우리네 시골장터를 연상시키는 시장풍경은 손님을 태워놓고도 떠날 줄 모르는 태평한 버스처럼 느림의 미학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었다.


미술계의 중심, 서구문화 헤게모니에 도전

주최측이 이번에 내건 심포지엄의 주제는 재위치, 재소유(Repositions, Repossessions) 다. 역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세계 지성계의 재편된 판도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백인, 혹은 구미 중심의 문화적 헤게모니로부터 독립, 자신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카리브 해 인근의 국가들은 그 동안 백인 주도의 지배문화에서 숨소리 한번 제대로 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의제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남카리브해 섹션의 사무총장인 닉 위틀(Nick Whittle)은 심포지엄에 앞서 열린 행정위원회의에서 유럽 중심의 협회 운영을 사뭇 비난에 가까운 어조로 비판하였는데, 그 어조가 어찌나 강경했던지 그 자리에 동석한 내 가슴이 다 시원할 정도였다. 한국 섹션의 대표였던 나는 그 자리에서 한국의 실정을 들며 총회 참가와 관련하여 아시아 지역 국가에 대한 본부 측의 지원을 강조하였다.

1994년의 스톡홀름 총회와 이듬해의 마카오 총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 나는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보이는 아프리카, 혹은 아시아의 회원을 보며 소위 국제적인 타이틀을 내건 회의가 구성원 의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홍콩에서 발행되는 아시안 아트 뉴스(Asian Art News)지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의 미술평론가들만을 위한 독자적인 협의체 구성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재위치, 재소유라는 주제는 남카리브 섹션의 회장인 엘리슨 톰슨(Allison Thompson)의 말처럼, 지구촌에 존재하는 개발도상국가들 뿐만이 아니라, 카리브해 연안의 국가들 또한 전통적으로 예술의 중심이 돼 온 서구사회의 입장이 아닌, 새로운 입장-그것이 지정학적이건 혹은 제도적인 것이건 간에-에서의 예술에 대한 가치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의 산물이다. 이러한 주장은 얼핏 난공불락의 성을 앞에 두고 돌격명령을 외치는 장수의 외침처럼 무의미하게 보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릿수가 곧 진리인 것으로 착각하는 민주주의가 늘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워 다수의 그늘에 가린 소수의 목소리를 묵살해 왔던 역사를 상기한다면, 이러한 공격은 성이 함락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지배세력이 소위 보편과 지성의 이름으로 정교한 담론의 그물을 짤 때, 힘이 못 미치면 최소한 그물코를 자르는 용기라도 지녀야하는 법이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주제의 번드르르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 무력화하는 블랙홀이다. 주제의 허장성세, 가령 인류의 고원(Plateau of Humankind)이 표방하는 보편성의 이면에는 얼마나 거대한 유럽 중심적 사고가 똬리를 틀고 있던가. 90퍼센트의 술에 10퍼센트의 물을 탄다고 해서 술이 물이 되는가. 중국 작가들을 대거 초대한다고 해서 인류의 보편적 지평이 열리는가. 아니다. 그들은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 역시 자신만의 돋보기로 세계를 읽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광주비엔날레는? 역시 정반대의 의미에서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


문화에서 위계는 없다. 소수도 주류다.

머릿수가 비슷해야 힘도 나고 용기도 생긴다는 것을 나는 유럽중심적인 국제회의나 비엔날레와 같은 미술 현장에 갈 때마다 실감한다. 머릿수가 곧 힘이라-이 말은 얼핏 마키아벨리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란 말처럼 들릴런지도 모른다-는 말은 민주주의가 파놓은 교묘한 함정에 불과하다. 다수의 그늘에 가린 소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의 보편적 지평은 열리지 않는다.

이번 국제미술평론가협회 총회의 심포지엄이 얻은 성과는 소수의 소중함이다. 오랜 식민지배의 역사가 낳은 인간의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탄식과 승화의 노래(바베이도스의 원로 시인 카마우 브래드웨이츠(Kamau Brathwaite)의 심금을 울리는 강연이 이를 대변하였다)가 주류 예술이 지닌 미적 가치보다 훨씬 더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귀중한 기회였다.


- 아트 인 컬처 2003.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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