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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조각의 형성과 전개

윤진섭



Ⅰ. 한국 근대조각의 탄생과 현대조각의 태동

우리에게 있어서 조각은 회화에 비해 열악한 환경과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적 의미에서의 역사 또한 매우 일천하여 근대조각의 개척자로 일컫는 김복진이 조각을 배우기 위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것이 1920년이니, 이를 기점으로 하면 한국 근․현대조각의 역사는 겨우 80여 년 정도의 역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처럼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조각은 매우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해외의 사조와 기법을 받아들여 이제는 세계 유수의 국제전에서 외국 작가들과 나란히 경쟁할 정도로 그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김복진을 비롯하여 문석오, 조규봉, 윤승욱, 김경승, 김종영, 윤효중, 김정수, 이국전 등등 일제시대 하에 주로 <선전>을 중심으로 활동한 초창기의 조각가들은 두상 중심의 단순한 소조상을 주로 제작하여 엄밀한 의미에서 본격적인 조각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거리감이 있었다. 초창기에 한국의 조각계를 이끌었던 이들은 해방공간에서 6.25동란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사상적인 이유로 결별을 하게되어 조규봉, 김정수, 이국전 등등이 월북을 한 반면, 김경승, 김종영, 윤효중 등등은 남한에 남아 때 마침 설립된 대학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양성하게 된다. 1946년에 설립된 서울대학교 조각과에 김종영이 교수로 부임을 하고, 1950년에 설립된 홍익대학 조각과에 윤효중이 자리를 잡으면서 많은 작가들이 배출되기에 이른다.
6.25동란 이후에 현대적 교육을 받은 이들은 주로 <국전>을 중심으로 조각가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서울대학교에서 김종영과 윤승욱의 지도를 받은 백문기, 김세중, 성낙인, 유한원, 장기은, 박철준, 김영학 등과 홍익대학에서 윤효중에게 조각을 배운 김정숙, 윤영자, 김영중, 최기원, 전뢰진, 김찬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모교를 비롯한 대학에 자리를 잡으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가운데 한국 현대조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선전>과 해방 이후의 <국전>을 중심으로 한 조각계의 활동은 아카데믹한 관학 풍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새로운 흐름을 호흡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에 기인한다. 이 무렵에 구미에서는 이미 바네트 뉴만의 추상회화가 베티 파슨즈 화랑에서 선보이고, 블랙 마운틴 대학에서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부크민스터 풀러 등에 의한 아방가르드 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정형화된 포즈의 구상조각이 국전을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추상조각이 나타나게 된 것은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인데, 김종영과 송영수에 의해 비롯된다. 추상조각의 시작은 재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켜 종래의 돌, 나무, 브론즈에서 철조를 비롯한 다양한 금속재료로 확산돼 나갔다. 이 무렵에는 브랑쿠시나 아르프와 같은 현대 추상조각가들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김정숙은 한국 최초의 여성조각가이면서 중요한 초창기의 추상조각가였다. 1949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 당시 나이 33세의 만학도로서 1955년에 미국의 미시시피 주립대학과 크랜부룩 미술 아카데미에서 현대조각을 공부하고, 1957년 귀국해서는 청동, 대리석, 나무, 금속 등 다양한 재료를 구사하였다. 김종영, 송영수, 김정숙 등 추상조각가들의 활동은 1960대에 들어서 김찬식, 최기원, 박종배, 최만린, 이승택, 정관모, 김광우, 박석원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추상조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Ⅱ. 60년대 조각 그룹의 활성화와 70년대 모더니즘 조각의 형성


1950년대 후반까지가 <국전>을 중심으로 한 관학파적인 분위기의 시기라면, 60년대 중반이후는 젊은 조각가들에 의해 조각그룹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1963년 강정식, 김봉구, 송규상, 신석필, 황교영, 황택구 등에 의해 [낙우회]가 결성되는 것을 필두로 같은 해에 김영중, 김영학, 전상범, 김찬식, 이운식, 최기원 등에 의해 [원형회]가 창립되기에 이른다. 이 해는 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에 최기원이 참가하던 때로 김종영이 파고다공원에 ‘3.1독립선언기념탑’을, 김경승이 수유리에 ‘4월학생혁명기념탑’을 세우는 등 정부차원에서 공공조형물의 발주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와 상파울로비엔날레 등 국제전에 국내의 조각가들이 활발하게 참가하면서 국제 조각계의 동향이 국내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고영수, 남철, 오종욱, 이정갑, 주해준, 최병상, 최종태, 최충웅 등이 [현대공간회]를, 1969년에는 김복순, 김창희, 김시환, 임송자, 조승환, 황하진 등이 [청동회]를, 김찬식, 박석원, 박종배, 이승택, 최기원 등이 [한국현대조각회]를, 김세경, 장정남, 심문섭, 오세원, 장도수 등이 [제3조형회]를 창립하는 등 조각그룹의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1970년에는 마침내 국립현대미술관 주최로 낙우회, 원형회, 현대조각회, 제3조형회 등을 모아 한국현대조각연합전이 열리게 되며, 같은 해에 홍익조각회가 결성되어 아방가르드적 성격을 띤 그룹전의 개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70년대 초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는 모더니즘 조각이 성행하던 시기로 미술평론가 이일이 ‘확산과 환원’이라는 명제로 요약한 바 있다. 추상조각이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서도 구상적 경향을 지향하는 작가들이 모여 [한국구상조각회](1976년 창립, 강관욱, 고정수, 김경옥, 김광진, 김수현, 김영원, 김창희, 김혜원, 문혜자, 유영교 등)를 결성하는 등 의욕을 보였다.
70년대 한국 모더니즘 조각의 형성에는 여러 가지 시대적인 요인이 개재돼 있었다. 60년대 초반부터 형성된 경제적 부흥을 기반으로 정보 채널의 다변화, 그 중에서도 특히 미니멀리즘을 비롯한 서구 미술 사조의 유입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입식 주방설비가 특징인 아파트 문화의 보급 또한 이 시기 미적 모더니티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요인 가운데 하나다. 이미 1969년에 결성된 [A․G] 그룹에 포진해 있던 박종배, 박석원, 심문섭, 이승택 등 일단의 조각가들은 강력한 실험을 전개하면서 70년대 모더니즘 조각을 추구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승택은 바람, 불, 연기 등 환경내지는 대지예술적인 작품을 시도하는 등 전위적인 작업을 주로 하여 주목을 받았다. 미술평론가 김복영은 이 시기의 미술을 가리켜 기예에 바탕을 둔 전근대적인 요소들이 불식되고 ‘이념’으로서의 자각과 행동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고 분석하였다.

70년대의 조각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A․G] 그룹 멤버의 작품에 나타난 것처럼 대지예술적인 경향의 약진이다. 김구림이 살곶이다리 둑의 잔디를 불태워 삼각형의 검은 흔적을 남긴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발표한 때가 1970년이었는데, 이 시기는 월터 드 마리아가 네바다 남부 사막에 1마일 길이의 직선 길을 낸 대지예술 작품 ‘라스베가스 피스’를 발표한 1969년에서 겨우 1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 무렵은 오브제, 설치, 해프닝의 등장과 더불어 한국 현대미술이 빠른 속도로 서구의 미술에 다가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70년대의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강력한 도전을 맞게 되었으니 민중미술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1980년, [현실과 발언]의 창립으로 표면화한 현실비판적 경향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가운데 점차 사회변혁적, 민중지향적 성격으로 변모되어 나갔다. 모더니즘의 현실도피적이며 형식실험적 측면을 거세게 비판하고 나왔던 민중미술은 조각에 있어서도 형상 언어를 중심으로 민중의 아픔을 대변하는 조각을 주창하여 주목을 받았다. 김광진, 김창세, 박희선, 심정수, 홍순모, 최병민, 이태호, 김흥곤, 구본주 등이 이 시기에 활동한 작가들이다.





Ⅲ.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조각의 다원화 현상


1990년대는 80년대 중․후반에 불어닥친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다원주의가 표현의 다양한 분출을 용인하고 있었다. 이는 조각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월간미술은 1992년 3월호에 조각을 특집으로 다룬 바 있는데, “한국미술이 전환기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90년대 조각의 동향과 전망>>을 다음과 같은 표제로 분류하고 있다.

1. 풍경조각, 단순구조에서 복합구조로(서성록)
2. 인체를 해석하는 다원화된 시각(윤진섭)
3. 추상정신과 조형방법의 확장(유재길)
4. 리얼리즘 조각의 새 지평(최태만)
5. 인류학적 시각과 원형의 탐구(김영재, 이상 괄호 안은 필자명임)

김광우, 김 준, 최인수, 박상숙, 류 인, 백윤기, 박상희, 최승호, 안필연, 허위영 등 당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던 10명의 작가 인터뷰를 곁들인 가운데 90년대 조각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기획된 이 특집은 그 이유를 70년대의 모더니즘과 80년대의 민중미술 사이에 형성되었던 대립적 구도가 90년대에 접어들어 해체적 현상을 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필자들은 그 원인을 여러 각도에서 찾고 있는데, 서성록은 공간의 무대화와 서사의 구성에서, 윤진섭은 문명비판적 시각, 신화내지 고고학적 세계의 탐구, 몽상적 언설, 초현실주의, 산업사회적 미감의 반영에서, 유재길은 이성적 조각, 감성적 추상조각, 원초성의 추상조각의 발현에서, 최태만은 매체의 확산과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장르 개념으로부터의 탈피현상과 이로 인한 방법적 혁신과 주제와 내용의 확산에서, 김영재는 민족적 원형을 세계적인 공감대로 이끄는 방향과 범인류적 관점에서 단위 구성체로서의 민족과 자신을 돌아보는 관점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분석들은 90년대의 조각이 70년대의 모더니즘 조각이나 80년대의 민중 조각과는 달리 관점 자체가 다원화되었으며, 작가들의 다양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80년대 후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사회변동에 기인한다. 다국적 자본에 의한 소비의 증가를 비롯하여 동서 냉전체제의 급속한 와해, 서구 지배 이데올로기의 급격한 퇴조 등, 이른바 탈중심화 현상의 대두와 함께 국제화 시대에의 편입, 6.29 선언으로 가시화된 시민의식의 성숙 등 다소 느슨한 다원주의의 확산을 부추겼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대적 조류에 편승한 국제화․개방화의 물결은 88서울 올림픽을 기념한 국제조각 심포지움의 개최를 가져왔고, 이는 지방자치제의 확산과 맞물려 조각공원과 모란미술관, 문신미술관 등 조각전문미술관의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2천년 대에 진입한 지금 한국의 현대조각은 장르의 확산과 함께 급격한 퓨전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른바 신매체의 확산은 전통 조각의 영역을 위협하는 가운데 조각 전공자들을 일종의 매체 전문가로 전환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설치와 함께 영상매체의 급속한 확산은 조각 전공자들을 폭넓은 의미의 매체작가로 몰아가고 있는데, 이는 조각 분야에 있어서 정체성 논의와 맞물려 향후 하나의 쟁점을 야기할 전망이다.

<참고문헌>
김복진의 예술세계, 이경성/윤범모/최태만/조은정/최열 지음, 얼과알, 2001
현대미술연구, 김복영, 정음사, 1987
20세기의 한국미술, 김영나, 도서출판 예경, 1998
4인의 시각, 모란미술관, 2001
홍익조각50년, 홍익대학교 조소과, 2000
민중미술15년전 도록, 국립현대미술관, 삶과꿈, 1994
20세기 미술의 모험, J.-L 페리에 편저, 이 일 감수, 김정화 역, API, 1993
월간미술, 1992년 3월호
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 윤진섭, 미진사, 1997
한국모더니즘 미술연구, 윤진섭, 재원, 2000
공간의 반란, 윤진섭 편저, 미술문화, 1995


- 출전: 대한민국현대미술작가총서 권6 / 미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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