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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와 국제적 작가의 양성

윤진섭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조직위원 겸 큐레이터로 참여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10주년을 맞이하였다. 내게 있어서 광주비엔날레는 보람과 서운함이 엇갈리는 행사다. 보람이라면 제1회에 이어 2천년에 개최된 제3회 행사에 큐레이터로 참여하면서 평소에 꼭 해보고 싶던 전시를 기획했던 것이고, 서운함이란 4회(2002년)와 5회(2004년) 연이어 총감독 최종후보에 올랐으나, 미역국을 먹었던 씁쓸한 기억에서 연유한다. 미역국을 먹은 것은 나의 능력이 모자라 그런 것이니 그렇다 치고, 우선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2000년)을 기획하면서 느꼈던 소회를 본론에 앞서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이 전시는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전시회였다. 기획을 하는 동안 전시기획자만이 느낄 수 있는 짜릿한 흥분을 맛보게 한 것은 물론, 그해에 개최된 [제5회 월간미술대상]에서 ‘전시기획부문 대상’ 수상의 영예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70년대의 한국 단색화와 같은 시기의 일본 모노하(物派)를 비교함으로써, 양국 간 문화의 차이와 미감의 서로 다름을 검증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장소는 광주시립미술관 1층 전관이었는데, 수십 명의 작가들이 참여하는 국제전인 만큼 큰 예산을 필요로 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이런 규모의 전시는 국공립미술관이나 광주비엔날레와 같은 막대한 조직과 예산이 아니면 실현되기 힘든 것이니, 이 기획이 나에게 맡겨진 것은 그 자체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의 윤형근,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김창렬, 정창섭, 김기린 등등의 단색화 작가들을 비롯하여 일본의 이우환, 세끼네 노부오, 스가 기시오 등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한·일 양국의 미학적 특질을 논하는 일 자체가 역사상 처음이었던 만큼, 그 흥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지난 일을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이 전시회가 주는 교훈이야말로 “광주에는 국제적인 작가가 있는가?”라는 주제에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우선 일본의 경우를 보자면, 모노하는 현대 일본의 미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레파토리 가운데 하나다.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큐레이터나 미술이론가들이 앞 다퉈 연구할 정도로 그 성가를 인정받고 있다. 모노하는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걸쳐 일본에서 나타난 미술의 한 흐름인데,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이태리의 아르테 포베라나 미국의 대지예술 혹은 미니멀리즘과 유사하기도 하면서 그 자체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석탄, 유리, 가스, 모래, 콜타르, 솜 등 천연의 재료를 사용한 점에 있어서는 이태리의 아르테 포베라나 일본의 모노하가 어느 정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태동하게 된 문화적 배경과 환경은 서로 달랐는데, 모노하는 당시의 관점에서 문화를 해석한 작가들의 지적 노력의 결과였던 것이다. 현재까지도 모노하는 일본 화단이 자국(自國)의 현대미술의 역사와 정체성을 캐기 위해 가장 빈번히 다루고,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종의 화두로 되어 있다. 70년대 모노하 운동 당시에 20, 30대에 불과하던 작가들은 이제 고회를 바라보는 원로가 되어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노하는 수차례에 걸쳐 서구의 유명 미술관에서 대대적인 조명을 받은 바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미국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일본의 현대미술-하늘을 향한 절규]다. 이 전시회의 도록은 호화장정본으로 출판되어 지금까지 꾸준히 팔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과연 어떤가? 우리의 단색화 역시 주로 유럽 쪽에서 이를 조명하는 전시가 몇 차례 있었지만,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단색화 작가들의 개인적인 노력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 단색화 운동이 벌어지던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일본의 미술관에 의해 단색화를 소개하는 순회 전시회들이 몇 차례 열려 한국미술의 붐이 일본에서 조성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의 문화내지는 예술을 알고자 하는 일본의 지적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었다.





이쯤에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광주에는 국제적인 작가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나는 이 질문이 매우 때늦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2회나 3회쯤 이런 질문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그 만큼 허송세월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매우 애석하게도 ‘아니오’이다. 광주 시민들에게는 매우 죄송한 말이지만, 광주에는 국제적인 작가가 없다. ‘국제 작가(international artist)’라는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수준의 문제가 있지만, 세계 유수의 국제전이나 국제적인 성가를 지닌 미술관 및 화랑에 빈번히 초대를 받고, 국제적 수준의 미술전문지에 특집이 게재되는 정도를 가리켜 ‘국제 작가’로 부른다면 여기에 해당되는 광주 작가는 없다는 말이다. 흔히 백남준을 가리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한국인으로 회자하고 있는데, 백남준을 제외하면 그에 버금가는 한국의 국제적인 작가를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를 나는 전략의 부재에서 찾고 싶다. 앞서 일본의 모노하와 한국의 단색화를 예로 들었지만, 모노하의 성공은 치밀한 연구와 장기간의 플랜에 따른 문화전략의 결과요, 한국의 단색화는 그러한 전략이 부재한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가령 용어 문제만 하더라도 일본의 모노하는 ‘Monoha라는 영어식 표기로 영어권에서 인정을 받고 통용되고 있는데, 한국의 단색화는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같은 대상을 두고 우리 스스로 모노크롬, 모노톤, 단색조 평면회화, 단색조 회화, 단색화 등등으로 혼란스럽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민중미술은 서구의 비평가들에 의해 ‘Minjoong Art’로 표기된 경우가 있어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제적인 대접을 받은 바 있다. 미국의 퀸즈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민중미술-태평양을 건너서]는 이의 선례로서 우리의 미술운동이 객관적으로 외국인의 눈에 투영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요코하마미술관은 먼로라는 미국의 큐레이터를 초빙하여 장기간 동안 일본 현대미술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지원하였다. 그 결과가 요코하마미술관에서 열린 [일본의 현대미술-하늘을 향한 절규]인데, 이 전시회는 미국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순회됨으로써 일본의 현대미술을 미국의 주류미술계에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광주비엔날레는 현재까지 다섯 차례가 열리는 동안 한국미술은 물론이요, 세계미술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고 본다. 1995년에 열린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그 규모나 예산 면에서 볼 때 베니스나 상 파울로 비엔날레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국제전이었다. 그 후 광주비엔날레는 현재까지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착실히 성장하여 이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세계 정상급 비엔날레의 반열에 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소요된 예산만 해도 수백 억 원에 달하는 광주비엔날레는 행사를 치룰 때마다 약간의 내홍과 진통을 겪기는 했지만, 광주 특유의 뚝심과 애정으로 잘 버텨왔다고 생각한다. 무릇 모든 행사는 3회째가 고비라고 하는데, 광주비엔날레는 이제 5회를 넘긴 중견급 국제비엔날레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주변 환경은 많이 변했다. 비엔날레관 건설의 첫 삽을 뜰 당시만 해도 인도트리엔날레와 방글라데시비엔날레 등등 몇몇의 국제전 행사만이 존재하던 아시아의 비엔날레는 10년이 지닌 지금 수많은 후발 비엔날레들의 탄생으로 북적이고 있다. 타이페이비엔날레, 상하이비엔날레, 북경비엔날레, 요코하마트리엔날레, 이스탄불비엔날레, 후쿠오카트리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등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각종 비엔날레들은 서로 예민하게 각축을 벌이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현재 광주비엔날레가 지닌 약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광주에는 국제적인 작가가 있는가?”하는 앞서의 질문과 관련이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국제적인 작가를 양성하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의 부재를 우선 지적할 수 있다. 굳이 배구에 비유하자면, 공(광주작가)을 토스(선정)하여 띄우기까지는 했는데(광주비엔날레에서) 강 스파이크(국제무대에 진출시키는)하는 전략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비용의 지출에 따른 기대효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비엔날레 무용론과 같은 불만들이 광주화단에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광주지역 작가를 국제적인 작가로 만들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의 수립과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남의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벤치마킹의 정신이 그래서 필요한 것인데, 가령 초기의 상파울로 비엔날레가 취했던 고도의 전략은 광주를 수준 높은 문화도시로 세계 속에 각인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50년의 역사를 통해 유럽과 미국의 정상급 작가들을 대규모로 초청, 국내에는 이름이 있지만 아직 국제적인 지명도를 얻지 못한 국내의 수많은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후광을 톡톡히 이용했다. 지명도의 자연스런 편승을 그들은 노렸던 것이다. 또한 50여 년의 역사에 이르는 비엔날레를 치루는 과정에서 얻은 유무형의 자산은 비엔날레를 치루는 데 투여한 물리적인 비용 이상의 것으로 결코 화폐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미술과 생활 9호 / 광주시립미술관 200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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