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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아트에 있어서 ‘접촉’의 양상에 관한 연구

윤진섭

디지털 아트에 있어서 ‘접촉’의 양상에 관한 연구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를 중심으로-





Ⅰ.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디지털 아트에 나타난 ‘접촉’의 양상을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에 참가한 미디어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게임/놀이’를 주제로 내건 이번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2004.12.15-2005.2.20, 서울시립미술관)1)에는 20여 개국에서 60여명의 작가들(팀 포함)이 참가하였는데,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을 제시한 몇몇의 작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컴퓨터에 기반을 둔 디지털 작품을 출품하였다.
‘게임/놀이’라는 전체 주제 아래 ‘전쟁, 상업성, 접촉/몸, 유희’ 등등 각기 4개의 소주제를 통해 범주화한 이들의 작품은 소주제에 따라 3개 층의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에 분산, 배치되었다. 1층은 에도 스턴, 밀토스 마네타스, 펭맹보, 안젤라 데타니코, 야노베 겐지 등등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전쟁의 세계와 박준범, 베아트 브로겔, 에네스(ENESS), 자볼릭 키스팔, 스테판 베라스 등등이 보여주는 유희가 중심이며, 2층은 호세 카를로스 카사도, 이세정, 마리나 아브라모빅, 아키오 카미사토 등등의 작가들이 중심이 된 접촉과 프레익스, 로버트 아놀드 등등의 작품이 드러내는 상업성, 그리고 3층에는 프레데릭 모서, 왕지안 웨이, 랭랜즈&벨, 날리니 말라니, 앤 마리 슐레이너 등등의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글의 주제가 되는 ‘접촉’은 주로 2층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기획의 초기에 이 ‘접촉’의 개념은 원래 ‘신체 접촉(pysical contact)’을 염두에 두고 구상된 것인데, 이 아이디어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우레이가 1977년에 발표한 <<계측불가능성(Imponderabilia>>이란 퍼포먼스에서 얻은 것이다. 이 작품은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에서 행해졌다. 약 1미터 남짓 되는 흰색의 좁은 통로에 우레이와 아브라모비치가 벌거벗은 상태로 서로 마주보며 서있고, 그 사이를 평상복을 입은 관객들이 통과한다. 90분 동안 행해진 이 퍼포먼스에서 나타난 흥미 있는 현상은 두 사람 사이를 통과하는 관객들의 제각기 다른 반응이다.
당혹감, 두려움, 호기심, 어색함, 즐거움, 민망함 등등 관객의 다양한 심리적 반응은 신체가 다름 아닌 감정의 거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브라모비치는 이번 전시회에 <<빛/어둠>>(1977)이란 제목의 작품을 출품하였다. 이 퍼포먼스에서 우레이와 아브라모비치는 20분 동안 서로 상대방의 따귀를 때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따귀를 때리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서 힘의 강도 또한 점점 더 높아가게 된다. 이 퍼포먼스에서 두 사람은 때리는 행위를 통해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극한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바라보는 관람자들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지게 되며, 폭력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한때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접속’(주연:한석규, 전도연)은 컴퓨터 채팅을 통해 만난 청춘 남녀 사이의 사랑을 그린 영화다. ‘접속’이 됐던 ‘접촉’이 됐던 간에 영어로는 다같이 ‘contact’으로 표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컴퓨터 채팅이 지닌 쌍방향적(interactive) 관계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이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감정적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니터 상에서 끊임없이 깜박이는 커서는 감정을 실어 보내는 눈을 닮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듯이, 눈의 상징으로서의 커서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마음을 담은 의미의 담지체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어느 한 쪽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성사될 수 없음을 컴퓨터 채팅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Ⅱ. ‘접촉’의 사회적ㆍ예술적 의미

필자가 이 접촉의 개념을 처음 접한 것은 1977년이었다. 당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에 재학 중이던 필자는 그 무렵 화단에서 첨단의 전위미술 단체로 이름이 높았던 그룹의 막내로 활동을 했는데, 개념미술이 주류를 이루었던 관계로 자연히 철학이나 언어학, 구조주의 등등의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무렵 <언어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발간되었는데, 노암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을 비롯하여 제프리 리이치 등등의 저명한 언어학자들의 최신 이론이 번역, 소개되었다.
필자가 접촉의 아이디어를 얻은 연유는 언어 의미의 기능과 사회의 관계를 논한 제프리 리이치(Geoffrey Leech)의 논문에 소개된 데스몬드 모리스의 원숭이 사회에서의 ‘쓰다듬기(stroke)’ 행위에서 비롯된다. 모리스에 의하면 접촉은 “인간이란 동물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기술”로 정의되는데, 아이를 품에 안거나, 편지를 쓰거나, 말하거나, 가볍게 깨무는 행위 등등이 여기에 속한다.2)
‘털없는 원숭이’란 책을 쓴 데스몬드 모리스는 원숭이 사회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원숭이 사회를 관찰했는데, 그는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하루 종일 다른 원숭이들의 털을 쓰다듬거나 이를 잡아주는 행위에 주목하였다.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원숭이들의 이러한 행위가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 같아도 원숭이 사회의 결속력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원숭이 사회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군집 행위는 인간사회에도 적용된다. 일상적인 인사나 하찮게 보이는 무의미한 대화들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친화력을 북돋우는 윤활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술이 창작자/발신자와 감상자/수신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 간주할 때, 접촉은 가장 근원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감상자의 직접적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회화에 있어서조차 접촉을 암시하는 행위는 많다. 가령,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서 이리저리 살펴보거나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관객의 동작은 접촉 지향적이다.
현대미술에서 해프닝의 등장은 감상자의 입장에서 볼 때, 보다 직접적인 접촉을 유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해프닝에서 관객의 참여는 주어진 환경에 관객 자신의 신체가 직접적으로 개입되면서 의미를 갖게 된다. 미술에 있어서 회화나 조각과 같은 결과(result)로서의 창작품이 일련의 과정(process)으로 대치되는 것이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잭슨 폴록의 드리핑 회화는 이젤 페인팅과 해프닝의 중간항적인 성격이 짙다. 폴록의 작업 스타일을 가리켜 ‘투기장(arena)’이라고 지칭하며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란 명칭으로 불렀던 해롤드 로젠버그는 폴록의 신체가 갖는 기투성(企投性)에 주목했다. 바닥에 펼쳐진 캔버스 위를 걸어 다니며 깡통에 든 페인트를 마구 뿌리는 폴록의 행위는 이젤에 비스듬히 캔버스를 기대놓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비하면 훨씬 직접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현대미술사상 신체의 접촉을 가장 분명하게 추구했던 작가는 이브 클랭이었다. 프랑스 출신의 누보 레알리즘 작가였던 그는 인체를 붓으로 해석하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의 <인체측정(Anthropometries)>은 벌거벗은 여자의 몸에 자신의 고유한 청색물감(IKB:International Kleins Blue)을 묻혀 바닥 위에 펼쳐진 큰 종이에 찍은 것이다. 그는 이런 일련의 행위 작품을 통해 신체의 건강은 정신적 초월을 필요로 한다고 역설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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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미디어 작품에 나타난 ‘접촉’의 예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아트에 있어서 접촉의 개념은 상호작용(interactivity)과 관계가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마우스나 키보드를 조작함으로써 관객의 매체에 대한 접촉을 유도하는 작품들이 다수 출품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반 소워와인, 이소벨 놀레즈, 리암 페네시 등이 합작으로 출품한 <<기대하기>>(2003)4)란 인터랙티브 설치작품이다. 현대의 가정에서 어린이들이 겪는 소외와 고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살롯이라는 여덟살백이 소녀다. 이 작품에서 앙징맞게 꾸며진 소녀의 침실 밖에 놓인 작은 곰인형은 비디오 모니터와 사용자 사이에서 인터페이스의 기능을 한다. 관객이 이 곰인형의 배를 누르면 샬롯의 배가 점점 부풀어 올라 꼬마 아이를 낳게 된다. 샬롯은 꼬마 아이를 데리고 작은 방에서 논다. 음료수도 마시고 닌텐도 게임도 함께 한다. 관객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작품에 생명을 부여하는 이 작품은 전형적인 상호작용의 예를 보여준다. 그러나 관객의 참여는 프로그램된 작품의 스토리 일부에 한할 뿐이다. 그 외에 관객의 권한은 없으며, 그 이면에는 여전히 작가의 독재가 잔존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는 상호텍스트성을 중시하는 하이퍼텍스트에 있어서 독자의 상호작용성, 즉 참여를 제한하는 저자/프로그래머의 프로그래밍의 한계와도 비슷하다. 하이퍼링크에서 저자의 간섭은 결국 독자의 자유로운 연상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5).
관객참여에 의하거나 마우스를 조작함으로써 상호작용을 시도하는 접촉이 아니라 단순히 이미지들 간의 접촉의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호세 카를로스 카사도의 <<새로운 신체. V01>>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접촉할 수 없는 접촉(untouchable touch)’의 극명한 예이다. 대중 속의 고독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2차원의 평면 위에서 3차원으로 표현된 인체의 이미지들이 서로 섞이면서도 결국은 합치되지 않는다. 융합과 해체를 반복하는 이 인간군상들은 소비되는 성적 욕망의 판타지와 유전자 조작에 의한 인간 복제의 가능성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듯 하다.
접촉은 반드시 인간 사이의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물간의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커스 리올의 <<슬로우 서비스>>(2003)6)는 이 경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싱글 채널 영상작품이다. 관람자는 느린 동작으로 보여지는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통해 곧 어떤 긴박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예측하게 된다. 마침내 날아온 액체가 등장인물의 얼굴에 덮칠 때 비로소 그것이 다양한 종류의 음식물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작가는 아주 느린 동작을 포착하기 위해 고속의 디지털 비디오 카메라를 촬영에 사용했다. 이미지는 포착된 순간부터 재생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디지털 데이터로 남겨진다. 음식물이 얼굴에 부딪치는 생생한 순간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의 1초가 40초의 슬로우 모션으로 상영된다. 이 작품을 촬영하기 위해 영화 연출부와 대형 스튜디오, 5만 와트의 조명은 물론 대형마트의 카트를 가득 채울 만큼의 음식물과 열흘 동안의 후반 작업이 소요되었다.
스테판 배라스와 린다 데비, 로버트 데비, 케리 리첸스의 공동작품인 <<사랑스런 카우치 지지>>(2003)는 사물에 동물의 감정을 부여한 특이한 경우이다. 마치 털을 깎은 푸들에 해삼의 동체를 결합시킨 것 같은 이 가구작품은 관람자가 자신의 위에 앉으면 으르렁거리고, 만져주면 기분이 좋은 듯 가르릉대는 반응을 나타낸다. 특히 이 지지는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해서 쓰다듬어 주면 낑낑거리고, 곁에 아무도 없으면 고양이처럼 야옹거린다. 관람자와지지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동체 안에 내장된 센서가 다양한 소리를 내는 것과 9개의 진동 오디오 장치에서 비롯된다. 디지털 신호처리와 행동 알고리즘을 거쳐 지지의 반응이 결정되는 것이다.
베아트 브로겔과 필립 짐머만의 <<한 단어 영화>>(2004) 만큼 관람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보여준 작품은 없을 것이다. 컴퓨터의 키보드를 이용하여 입력창에 관람자가 원하는 단어를 입력하면 인터넷을 통해 이미지를 검색해 보여준다. 검색엔진은 관람자가 입력한 단어와 관련이 있는 이미지들을 동영상으로 불러낸다. 많은 웹서버에 존재하는 서버 스크립트를 통해서 이미지 데이터를 검색하는 것이다. 처음 20개의 URL에서 검색된 이미지들이 차례로 화면에 나타나게 되고, 3개의 이미지가 화면에 나타나면서부터 영화가 시작되어 점점 더 많은 URL을 검색, 이미지 데이터들을 계속적으로 전송하게 된다. 입력한 단어와 관계되는 이미지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을 때, 영화는 종료된다.
앞서 예를 든 반 소워와인의 <<기대하기>>에 나타난 상호작용이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에 반해, 베아트 브로겔의 <<한 단어 영화>>는 관람자의 참여에 전적으로 기댄 작품이다. 관람자가 컴퓨터의 입력창에 단어를 입력하지 않으면 이 프로젝터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기대하기>>도 관람자가 작은 곰 인형의 배를 눌러주지 않으면 샬롯이 동작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나, 후자가 입력된 프로그래밍에 따라 전개되는 반면, 전자는 예정된 프로그램이 없이 그때그때 순수하게 반응한다. 마치 채팅에서의 접촉이 예정에 없이 매 순간 상대방의 서로 다른 반응을 유도해 내듯이, 관람자들이 입력한 단어와 관련된 다양한 이미지들을 쏟아내 놓은 것이다.


Ⅳ. 나오는 말

이상 살펴본 것처럼 이번 전시에 나타난 접촉의 양상은 신체적 접촉(아브라모비치)에서부터 신체와 사물간의 접촉(마커스 라올), 신체적 이미지와 이미지의 접촉(호세 카를로스 카사도), 신체와 실제 사물간의 접촉(스테판 베라스), 신체와 인터페이스 간의 접촉(반 소워와인), 컴튜터 키보드를 통한 접촉(베아트 브로겔) 등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단순히 기록 장치로서 싱글 채널 비디오를 이용한 아브라모비치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디지털 매체의 특징인 상호작용 방식을 통해 접촉의 양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접촉’은 그것이 기계를 통한 것이건, 직접적인 신체를 통한 것이건 간에 사회를 원만하게 유지, 존속시키는 중요한 인간적 행위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데스몬스 모리스가 <접촉>에서 소개하고 있는 ‘새로운 접촉 운동’은 일종의 사회적 퍼포먼스이다. 현대사회에서 경험하는 대중의 인간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일기 시작한 이 운동은 ‘인간성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엔카운터 그룹 세라피로 알려진 이 운동은 켈리포니아에서 시작하여 미국 전역과 캐나다 등지로 번져나갔다.
이 운동의 골자는 참가자들이 일정한 기간동안의 공동생활을 통해 함께 생활하며 개인 및 집단내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경험하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다양한 신체접촉과 상호마사지, 게임 등을 통해 친화력을 다지게 된다. 이 운동의 목적은 문명병에 걸린 현대인들의 심리적 갑옷을 깨부수고 “인간은 육체를 소유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육체 그 자체다.”라는 사실을 재인식시키는데 있다7).
‘디지털 호모 루덴스(Digital Homo Ludens)’로 부를 수 있는 신인류의 탄생에 접하여 디지털 매체가 지닌 눈부신 기술적 효과뿐만 아니라, 컴퓨터 게임이 가져다 줄 해악을 헤아려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예술의 치유적 기능이 새삼 강조되어야 할 오늘인 것이다. 접촉은 오프와 온 라인의 사이에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고 있다.





1) 이 명칭의 전신은 2000년 9월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열린 <미디어_시티 서울 2000>이다. 송미숙 총감독의 지휘 아래 경희궁지 서울시립미술관 정도 600주년 기념관 및 시립박물관, 기타 시내에 산재한 전광판, 지하철 역 등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예술과 과학기술, 산업의 협업을 기하기 위하여 서울시가 마련한 것으로 국내 최대의 미디어 아트 전시였다. 모든 정보는 ‘0과 1’로 처리된다는 디지털 비트의 세계를 나타내며 시간과 공간의 일시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서울의 도시 기능과 전망을 상징한다. 주제인 <도시:0과 1사이>는 시작과 끝, 무와 유, 혼돈과 질서,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의 결합을 의미하며, ‘사이’는 0과 1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 가능성과 기회를 함축한다. <도시:0과 1사이>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역동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하는 거대도시 서울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21개국에서 총 228명의 작가가 참여하였다.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로 명칭이 바뀐 것은 행사의 주최권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이관된 제2회 때부터다. 2002년 9월 26일부터 11월 24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달빛 흐름(Lunas Flow)’을 주제로 열린 <제2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는 이원일 총감독이 지휘한 바 있다. 필자가 총감독을 맡은 이번 전시에는 요한 파인애플, 리즈 휴즈, 한스 D 크리스트, 틸만 바움개르텔 등의 큐레이터들이 참여하였다.

2) 데스몬드 모리스, 접촉, 박성규 옮김, 지성사, 15쪽

3) 윤진섭, 퍼포먼스에 있어서 ‘신체접촉(physical contact)’의 의미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조형예술연구소 창간기념 논문집, 2004, 307쪽.

4) 이 작품을 선정한 큐레이터인 리즈 휴즈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다소 음울하게도 고립된 어린이의 거품 같은 삶의 재현 뒤로 날카로운 비판을 감추고 있다. 8살의 샤롯데는 실로 인생 자체라 할 수 있는 어떠한 인생의 가혹한 현실로부터도 안전하게 멀리 떨어져 있다.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나 그녀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으며, 많은 외로운 아이들처럼 자신의 친구를 스스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샤롯데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관람객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신의 놀이친구를 임신하게 된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에 대한 우리의 장미빛 기대나 친근한 기억을 공포스럽고 신비스런 느낌으로 전환시킨다.
리즈 휴즈, 새로운 미술 : 새로운 규칙?,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도록, 서울시립미술관, 35쪽.

5) 유현주, 하이퍼텍스트-디지털 미학의 키워드, 연세대학교출판부, 66-9쪽.

6) 리올(Lyall)은 자신의 작품 <슬로우 서비스(Slow Service)>를 통해 그러한 변형의 순간들을 오랫동안 냉철하게 관찰해 왔다. 이 작품은 파이에 얼굴을 처박는 코미디의 진부한 유치함을 시적인 동작으로 변형시켰다. 왁자지껄한 광대놀이는 오랫동안 희극의 기준이 되어왔다. 우리는 파이에 처박히게 된 사람이나 매 과정마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는 주문한 크림파이 대신 냉동 콩, 커스타드, 꼬불꼬불한 국수, 토마토 수프나 음식으로 가득 찬 쇼핑수레를 건네받는다. 광대나 정치가보다도 우리가 예민하게 인식하는 것은 반응에 미세한 변화를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행진이다.
기대와 충격 사이의 영원한 순간 속에서 등장인물을 조롱하든 강조하든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버려진 사물의 변형이다. 토마토 수프, 우유 그리고 커스타드는 영묘한 비단천이 되고 냉동콩과 꼬불꼬불한 국수는 구름의 미세한 입자가 되며 즉석 라쟈냐는 신비스런 아름다움이 된다. -리즈 휴즈, 앞의 책, 37쪽에서 인용.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관람자의 입장에서 볼 때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영상이 주는 충격만큼이나 강렬한 시각적 아름다움이다. 이 작품은 인간과 사물 간의 접촉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최상의 미학적 선물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고속촬영이라는 하이 테크의 기법이다.

7) 데스몬드 모리스, 앞의 책, 3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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