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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미술(Experimental Art)이냐, 전위예술(Avant-garde)이냐?

윤진섭

이른바 ‘실험미술’이란 말이 있다. 실험이란 말이 쓰이는 가장 흔한 경우는 과학 분야에서 인데, 생체실험, 실험도구, 실험실습비 등등이 귀에 익은 단어들이다. 과학의 경우, 실험은 어떤 이론이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통제된 여건 하에서 테스트하는 것으로서 우연의 요인을 최소화하며 놀이의 요소는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다(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간 참고). 과학에서의 실험은 연구의 성과를 얻기 위한 특정한 목적에 대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의 있어서의 실험은 과학의 경우와 다르다. 그것은 그 자체 하나의 목적이 되며, 거기에는 호이징가가 문화에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본질로 본 유희(놀이) 정신이 깃들어 있다. 예술과 과학 간에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는데, “예술은 과학이다.”라고 한 르네상스 시대의 만능인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입장을 필두로 예술에서의 실험과 과학에서의 실험을 동일하게 본 영국의 화가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 색채학 이론을 그림의 제작에 적용한 점묘파 화가 쇠라와 시냑,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 과학적인 입장에 섰던 키네틱 아트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행동이라는 점에서는 예술과 과학이 같을 수는 있으나 그 결과를 예측하거나 측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볼 때는 확연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M. Chanan). 예술에서의 실험은 어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예측이 목적이 아니다. 실험의 과정 자체가 즐김의 대상이 되며, 내용 보다는 형식 혹은 매체에 대한 실험이 주류를 이룬다.

영국의 저명한 미술사가인 곰브리치는 ‘미술이야기(The Story of Art)’에서 ‘실험적 미술’이란 장을 특별히 할애하고 있는데, 이는 20세기 미술사에서 실험이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예술사회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예술에서의 실험은 예술가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의 변화 내지는 직업적인 위기의식의 발로다. 특히 후원체제(패트런)의 붕괴는 예술가의 생존문제와 결부되어 예술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것, 자극적인 것, 이상한 것, 신기한 것 등등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예술가들은 창안자가 되어야 했으며, ‘과거 대가들의 감탄스러운 솜씨’보다는 독창성을 추구해야만 했다(곰브리치). 이런 이유에서 숱한 ‘이즘(주의)’들이 명멸했다. 20세기 미술에서 다양한 이즘의 퍼레이드는 주기가 짧고 산만하게 전개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미래파, 다다이즘, 러시아 아방가르드, 표현주의, 신조형주의, 초현실주의, 키네틱 아트, 바우하우스.......

피카소는 자신이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는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 뿐이라고 말했다(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예경, 576 쪽). 미술에서의 실험은 ‘좋았던 옛 시절(la belle epoque)’에 미술가들을 사로잡았던 주제에 대한 관심이 기법으로 옮겨지면서 비롯되기 시작했다. 보다 후대에는 매체(medium)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과학 기술의 진보는 작가들에게 다양한 표현 매체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미술가들은 비디오, 컴퓨터, 사진, 홀로그램, 퍼포먼스, 게임기, 인터넷, 모바일 폰, 레이저 등등 다양한 매체로 미술에 있어서의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실험미술과 전위예술은 거의 동의어로 취급된다. ‘전위’는 말 그대로 앞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군대용어인 이 말은 불어권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전쟁용어로서 기원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비유적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군대에서 척후조라는 것이 있다. 부대가 이동할 때 맨 앞에서 적정을 감시하는 임무를 띤 병사들이 바로 이 척후조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항상 위험부담이 따른다. 언제, 어디서 총탄이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항상 위험 부담을 지닌 채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바로 이 전위예술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실험을 하며 항상 새로운 것의 창출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새로운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 새로운 매체를 추구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보니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쑤다. 대중은 이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난해하다고 야유를 보낸다. 그렇게 때문에 현대예술(전위예술, 실험예술)은 본질적, 숙명적으로 비통속적(unpopular)이다. 오르테거 이 가세트에 의하면, 아방가르드는 대중을 늘 적으로 삼는다. '그것은 비통속적일 뿐만 아니라 반통속적이다. 그것은 대중을 늘 두 부류로 갈라놓는다. 하나는 현대예술에 대해 호감을 갖는 소수와 적대적인 다수가 그것이다'.

대중에게 불쾌감을 주고 모욕한 대가로 전위주의자(실험예술가)들은 훗날 막대한 보상금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마르셀 뒤샹, 백남준, 요셉 보이스, 피카소 등등은 젊어서 고생한 대가로 나중에 막대한 보상금을 챙겼다. 이들에게는 명성과 돈이 따랐다. 즉,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실험은 곧 노후를 위한 보험금인 것이다.

반면에 대중의 미적 취향을 위해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예술가들(사이비전위주의자, 사이비 실험예술가들도 여기에 해당한다.)은 그 대가로 훗날 예술사 기술에서 제외되는 불행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영역에 대한 개척을 소홀히 한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현재에 안주하는 태도는 실험예술가들이 기피해야 할 최대의 적이다.

아방가르드의 실천은 모험에 찬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허들을 넘는 장애물 육상경기 선수처럼 투철한 신념이 관건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현재의 악조건을 뛰어넘어야 한다. 대중의 몰이해, 경제적 궁핍, 낮은 사회적 신분 등등 내일의 보상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전위주의자는 숙명적으로 다음에 올 전위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한다. 마치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이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전위주의자는 척후조 병사가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하듯이, 예술의 현장에서 장렬히 죽음으로써 그 이름이 예술의 전당(예술사)에 헌정된다.

아방가르드는 죽었다. 상업주의의 거대한 포말에 묻혀 진정한 아방가르드 정신이 고사의 위기에 처해 있다. 오늘날 진정한 실험이 있는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잃어버린 정신을 찾아 헤매는 현인은 과연 있는가? 사이비 전위주의자들, 사이비 실험예술가들이 판치는 오늘날, 재롱부리는 원숭이 뒤에서 웃는 자본가들의 음흉한 웃음이 보이지 않는가?

-제도예술에 대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저항이 예술로서 수용된 이상, 네오 아방가르드의 저항의 제스처는 신빙성을 상실하였다. 페터 뷔르거, <아방가르드의 이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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