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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의 내면과 전국광의 퍼포먼스

윤진섭

내게 있어서 이번에 열린 전국광회고전은 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가 생존해 있었을 때, 전시장에서 스치듯이 만난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솔직히 말해서 그의 작품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만한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접하게 된 그의 작품들은 그래서 내게는 매우 인상이 깊었다. 특히 퍼포먼스와 관련된 자료들은 처음 대하는 것이어서 매우 각별한 것이었다.

지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전국광은 생전에 술을 매우 좋아했다. 작업을 제외하면 술이 유일한 낙일만큼 음주는 그에게 있어서 삶의 일부였다.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호인 아닌 사람 없다는 말이 있듯이, 전국광은 술을 즐겼고 친구와의 교유를 끔찍이도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사인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익사사고(심장마비)였으니, 조지훈이 말한 주도의 맨 끝단계인 9단 즉, 열반주에 속한다고 하겠다.

전국광의 조각 작품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평자들이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우선 그의 퍼포먼스 작품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전국광의 퍼포먼스에 대해 언급할 때 맨 먼저 고려돼야 할 것은 그의 퍼포먼스가 미술사나 비평에서 다루어진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의 퍼포먼스 대부분이 음주와 관련되어 벌어진 즉흥적인 것들이고, 둘째는 그가 공식적인 퍼포먼스 발표회에서 발표를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전공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70년대와 80년대에 활동했던 퍼포먼스 작가들 대부분이 회화를 전공했던 것 또한 그가 공식적인 퍼포먼스 발표를 꺼렸던 이유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는 예술가치고 삶과 예술이 딱 부러지게 구분되는 사람은 드물다. 삶 자체가 예술이요, 예술이 곧 삶이다. 전국광의 삶도 그랬다. 술이 곧 삶의 한 방편이었기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벌이지는 행동은 그것이 한낱 의미 없는 기행이기에 앞서 하나의 훌륭한 예술(퍼포먼스)일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하나의 기행으로 비칠 뿐이다.

지인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취중에 숱한 기행을 벌였다고 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 넥타이를 매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든가, 자주 가던 단골술집에서의 풍선 터트리기, 연못에 방뇨를 하면서 외쳤다는 말 “연못에 물이 적어. 물고기들이 곧 죽을 것 같애!” 등등 생전에 그가 벌인 숱한 기행들은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이거나 자유를 향한 외로운 절규였다. 그의 삶과 기행에 대해 미망인인 조각가 양화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산 16년의 생활은 ‘술과의 나날’이었다. 우리는 둘이 있을 때는 정말 남부럽지 않은 사이좋은 부부였지만 그러나 사람들과 어울린 술좌석에서 언제나 나는 짜증과 잔소리뿐인 ‘여편네’ 그 자체였다. 술은 그와 동행한 여행이나 모임에서 늘 나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양화선, 씩 웃고 술 한잔-전국광의 조각과 생애, 가나아트, 63쪽)


퍼포먼스와 관련시켜 볼 때, 전국광의 예술적 아이디어는 대학 입학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개념미술과의 연관선상에서 살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단순하게 묘사된 누드의 남자 입상(이 조각상의 배 부분에는 MAN‘이라는 단어가 음각돼 있다.) 옆에 검은 색 옷을 입은 전국광이 가슴에 I am a MAN이라고 적힌 흰 종이를 붙인 채 서 있는 한 장의 사진은 그의 예술가적 조숙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1968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은 그 당시에도 개념적 발상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단서다. 개념미술 자체가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나서 70년대에 이르러 전 세계 미술계를 풍미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이러한 발상은 선구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대목은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실험 미술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진과 같은 연대에 찍은 여자 누드 조각상의 포즈를 흉내 낸 전국광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발상 면에 있어서 퍼포먼스의 맹아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국광의 예술적 ‘끼’는 행위를 통해서 발산되었는데, 그 행위가 공식적인 퍼포먼스 자리가 아닌 술자리를 통해 드러났을 뿐이다. 이러한 전국광의 예술가적 조숙성은 그로 하여금 동시대 미의식의 전위적 위치에 서 있게 만들었다. 1974년 작인 <배달되어진 소포>는 입학 초기에 보였던 개념미술적 경향이 구체화한 경우다. 작가 앞으로 배달된 소포 자루에서 흙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전시장 바닥에 연출한 이 작품은 본격적인 개념미술에 속하는 것이다. 일종의 메일아트의 형식을 빈 이 작품은 비록 이 작품이 직접적인 우송의 방법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편제도에 의한 물질의 이송을 통하여 공간의 이동과 시간의 문제를 탐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의 첫 메일 아트 작품이랄 수 있는 김구림과 정찬승의 공동작품(1969년 작)보다 연대적으로는 늦은 편이지만, 발상에 있어서는 메일 아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시장 바닥에 수북이 쌓인 흙더미는 배달된 소포 자루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많은 분량인데, 비록 이 정황이 조작된 것이라고 해도 우편의 형식을 빌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과 초현실의 문제에 대한 전국광의 실험적 성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미망인의 회고에 의하면,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 놓인 흙을 여러 봉지에 나눠 담아서 주변의 지인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는 생각을 했는데,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한다.).

1974년에 행한 전국광의 퍼포먼스 작업은 야외 현장작업의 성격이 짙다. 해변 가의 바위 위에서 이루어진 이 퍼포먼스는 발상 면에서 볼 때, 80년대 초반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자연에 대한 관심, 즉 ‘야투’나 ‘대성리’전의 선구가 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에서 전국광은 거대한 바위의 위 부분을 흰 끈으로 묶는 행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끈의 모습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어느 일정한 지점에서 보면 수평선과 일치하고 있어서 대상과 시선의 관계를 신체의 개입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1980년대 중후반에 행한 몇몇의 퍼포먼스는 비록 횟수는 적더라도 그의 일생의 화두인 ‘매스’에 대한 문제를 행위를 통해 탐구하고자 한 흔적을 보여준다. 일정한 길이의 각목을 망치로 쳐서 파편화한 작업, 사람 머리만한 크기의 돌을 망치로 두들겨서 파편화한 작업 등등이 그것이다. 또한 골판지를 해체하여 이의 구조를 드러낸 작업은 ‘매스’와 관련된 그의 조각 작품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전국광은 전시장에 설치된 자신의 조각 작품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치 생활의 일부인양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평상 모양의 석조 작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묵상을 하거나 제자들과 함께 둘러앉아 희희낙락해 하는 모습(영남대학교 교수작품전, 대구 예맥화랑, 1984)은 비록 술에 취한 상태라고는 해도 천진난만한 평소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국광의 조각을 가리켜 흔히 ‘매스’의 미학이라고 한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조각의 기본인 덩어리(매스)의 문제에 천착했다. 그가 생애의 전성기를 누리던 70년대는 미니멀한 경향의 모더니즘 조각이 성행하고 있었다. 회화에서는 단색조 경향을 띤 단색화(Dansaekhwa)가, 조각 분야에서는 미니멀한 경향의 추상조각이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전국광은 리드미컬하게 굴곡진 여러 개의 판재를 겹친 특유의 스타일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공간대상 수상작인 <적-변이Ⅰ>(황등석, 100x100x40cm, 1977년 작)는 출렁이는 갈대밭이나 일렁이는 파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자연에 대한 전국광의 관심은 이미 그의 퍼포먼스 작품에서도 드러난 바 있듯이, 그의 조각에 있어서 발상의 진원지를 이룬다. 그에게는 늘 매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내재돼 있었다. 그것에 대한 예술가적 충동이 그로 하여금 조각, 회화, 드로잉, 퍼포먼스, 시(언어), 사진, 입체, 설치 작업 등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발산하게 만들었다. 그는 ‘겹침’과 ‘쌓음’의 방법론을 기조로 사물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예술가적 ‘끼’를 유감없이 발산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드로잉은 단순히 본격적인 작업을 위한 밑그림이 아니라 완성된 하나의 작품이다. 조각에 대한 그의 실험은 많은 그의 드로잉 작품에 나타나고 있듯이, 동일한 면적에 대한 동어반복, 같은 단어의 반복적 배열과 중첩, 선 긋기의 반복과 중첩 등등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동어반복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 중반 특히 개념미술적 경향을 지닌 실험작가들에게 흔히 볼 수 있었던 태도였다. 전국광은 조각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동어반복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는데 이는 미술에 대한 그의 실험적 태도를 보여주는 증거다.

작고작가의 작품이 지닌 특유의 후광(아우라)을 걷어낸다 하더라도 이번 전시에 출품된 전국광의 작품들은, 그것이 조각이건 드로잉이건 간에, 특유의 진정성과 독창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당대의 미의식에 대한 작가의 섬세한 고민이 손에 잡힐 듯이 읽혀진다. 또한 그의 작품을 통해 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그 또는 그와 동년배의 작가들이 어떤 고민을 했고, 미술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에 관해 후학들이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회의 큰 의의가 있다.

이번에 열린 <<전국광 회고전>>은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전국광 작품세계의 진면목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학술심포지엄에 곁들여 출판된 자료집은 전국광 작품세계의 형성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전거다. 이 모든 것이 미망인을 비롯한 주변 지인들과 미술관 관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터인데, 이번 전시는 작가가 사후에 어떻게 재평가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선례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이번 전시는 기획에 있어서 치밀함을 보여주었으며,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자료들이 총망라되어 있어서 향후 그와 관련된 미술사 기술에 풍부한 사료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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