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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과 퍼포먼스, 성공을 위한 전략인가?

윤진섭

Ⅰ. 백남준, 요셉 보이스, 비토 아콘치, 볼프 포스텔, 이브 클랭 등등. 이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다 성공한 작가들이라는 점이며, 한 때 퍼포먼스를 했다는 사실이다. 백남준은 1960년대 초반부터 플럭서스(Fluxus) 페스티벌에 참가, 기상천외하며 익살스런 퍼포먼스를 선보여서 관심을 끌었다. 그는 1961년에 뒤셀도르프의 슈멜라화랑에서 열린 Zero그룹 개막식에서 요셉 보이스를 만났다. 이 둘은 이 만남 이후에 평생의 동지로 사귀게 되는데, 백남준은 언젠가 자신이 유명하게 된 배경에는 젊을 때 존 케이지를 만난 것과 유명하기 전의 요셉 보이스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백남준은 요셉 보이스를 만나기 전에 존 케이지를 먼저 만났다. 그가 전위음악의 거장인 존 케이지를 위해 헌정한 작품인 가 1959년 11월 13일에 초연되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존 케이지는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의 공연을 본 사람은 당시 독일에 거주하던 윤이상과 요셉 보이스였다. 백남준이 존 케이지를 만난 것은 이듬해에 메어리 바우얼마이스터 아틀리에에서 가졌던 의 초연에서였다. 공연을 하던 백남준이 갑자기 객석으로 나아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린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알콜 중독에 정신분열 증세까지 있던 잭슨 폴록은 1942년 당시만해도 물감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이젤회화와의 종언, 즉 캔버스를 이젤에 올려놓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펼쳐놓고 그리는 방식을 즐겼던 그는 예의 드리핑(dripping) 기법으로 그린 액션페인팅 회화가 유명해지면서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리게 되었다. 그런데 폴록의 이 드리핑 기법이 바로 일종의 회화적 ‘퍼포먼스’이다. 그것은 작업실에서 완성되어 화랑의 벽에 걸림으로써 마무리되는 ‘결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작품’이다. 폭록의 성공 이면에는 이러한 국면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Ⅱ. 1913년에 자전거 바퀴를 제시하여 라는 개념을 제안한 마르셀 뒤샹은 1917년에 뉴욕에서 열린 앙데팡당전에 <샘>이라는 이름의 변기를 출품하였다. ‘R. Mutt 1917’이라고 사인이 된 이 작품은 심사위원단에 의해 거부되었고, 당시 심사부위원장 자격으로 심사에 참여하였던 뒤샹은 여기에 반발, 심사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이 작품의 당사지는 바로 뒤샹이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만든 이란 잡지에 그 전말을 상세히 싣고,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


“6달러라는 참가비를 낸 모든 화가는 작품을 전시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 같다. 리차드 머트씨는 샘 하나를 출품하였는데, 어무런 거론도 없이 그의 출품작은 종적을 감추었고, 전시에서 제외되었다. 머트씨의 샘을 거부한 것은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가?”

마르셀 뒤샹은 실패한 입체파 화가였다. 그는 화가로서 자신이 성공할 수 없음을 예견하였다. 그는 당시 가장 전위적인 입장에 있던 입체파 화풍의 그림을 그려 사회적 성공을 거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뮌헨에서 돌아온 그는 하나의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오브제, 즉 레디메이드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도발은 현대미술의 근본을 뒤흔들었다. 다다와 이태리 미래파의 도발적인 퍼포먼스는 과거의 미학에 대한 전복을 목표로 삼았다. 1909년, 르 피가로지에 실린 ‘미래파선언’에서 필리포 마리네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달리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여신보다 아름답다”. 기계에 대한 찬미와 속도에 대한 숭배를 미적 이념으로 삼았던 미래파 작가들은 신체를 이념 표현의 매체로 여겼다.


Ⅲ. 퍼포먼스는 전위 가운데서도 최전선에 위치한다. 그래서 퍼포먼스 작가들은 선봉부대 중에서도 맨 선두에 서서 전방을 관찰하는 척후병에 비견된다. 그런데 이 척후병은 대열의 맨 앞에 가는 까닭에 적으로부터 총알을 맞을 확률이 가장 높다. 그만큼 죽을 위험이 큰 것이다. 반면에 전쟁 중에 큰 공을 세워 훈장을 받을 확률 또한 가장 높은 것이 바로 이 척후병이다.

“예술은 사기다”라고 한 백남준의 유명한 발언은 이미 흥행의 대상이 돼 버린 현대예술의 속성을 간파한 말이다. 넘쳐나는 예술가들의 숫자에 비해볼 때,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나 확률은 매우 낮다. 게다가 패트런이 밥을 해결해 주던 돵정시대도 아닌, 냉혹한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예술로 먹고 산다는 일은 말이 그렇지 쉽지 않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남들의 눈에 띄기 위하여 온갖 기행을 서슴치 않는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구두에 물을 담아 마셨다. 이브 클랭은 현악사중주단이 심포니를 연주하는 가운데 모델들의 벌거벗은 몸에 청색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찍었다. 그는 일본에서 유도를 배운 유단자이며, 파리에서 유도사범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죽고 난 이 작품들은 지금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헤르만 니취는 양의 시신을 십자가에 걸어놓고 이를 찢는 의식을 거행하여 구속된 사례가 있다. 그는 지금 고성(古城)을 소유한 부자다.

요셉 보이스는 갖가지 기행과 자신이 사회적 조각이라고 부른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1965년에 행한 ‘24시간’이란 퍼포먼스에서 그는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하여 24시간 동안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실험했다. 죽은 산토끼에게 그리을 설명하는 방법‘은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금박으로 칠한 다음, 팔에 죽은 산토끼를 안고 그림을 설명하는 퍼포먼스인데, 한 인터뷰에서 그는 “죽은 산토끼가 사람보다도 더 그림을 잘 이해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진짜 그런지는 요셉 보이스가 더 잘 알겠지만, 그는 지금 죽어 이 땅에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Ⅳ. 장영철은 “레슬링은 쑈다”라고 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퍼포먼스도 쇼일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가난할 때는 목숨을 걸고 온갖 짓거리를 다하던 작가들이 일단 유명해져서 부자가 되고 명예도 얻게 되면 갑자기 점잖을 떨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험한 짓을 하기에는 체면이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마르셀 뒤샹은 오랫동안 은거하면서 ‘Large Glass’를 만들고 체스를 두면서 소일하였다. 그는 유언으로 “웨이터처럼 재미있게 인생을 살았다”라는 아리송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의 진의는 무엇일까?

자본주의의 속악한 근성이 모든 것을 물신화한다. 한번 만지면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한다는 마이더스의 손처럼, 가공할 자본의 힘은 심지어 똥도 고가의 전략상품으로 만든다. “개나 사람을 물으면 뉴스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개를 물으면 뉴스가 되는” 언론의 속성을 영악한 예술가들이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 예술은 더욱 극성스러워지고 늘 소문을 몰고 다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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