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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츠의 방> - 미로를 지나며

윤진섭

메르츠의 방
2006. 10.18 - 12.19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본 전시의 타이틀로 삼은 <<메르츠의 방(Merzs Room)>>은 지금 우리의 미술계에 나타나고 있는 풍경을 묘사하려는 의도에서 내 건 하나의 ‘메타포’다. 이 제목은 20세기 초엽에 활동했던 다다이스트 쿠르트 쉬비터스(Kurt Schwitters)의 메르츠바우(Merzbau)에서 온 것이다. 베를린에서 하노버로 돌아 온 쉬비터스는 어느 날 Merz라는 가게를 열 결심을 하게 되는데, 이 단어는 상업은행을 뜻하는 ‘Commerzbank’에서 유래한다. 그러니까 단어 자체로는 어떤 뜻도 지니지 않는 무의미한 말이다. ‘Bau’는 건물 혹은 집을 뜻하는 독일어지만 여기서는 ‘방’이 주제가 되는 까닭에 ‘메르츠의 방’이라고 표제를 붙였다.

쉬비터스의 콜라쥬나 설치작업 혹은 예술가로서의 행적은 지금도 하나의 전설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만, 이 글은 그에 대한 소개가 목적이 아니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다. 그 대신 그의 작업이 지닌 의미는 현대미술사에서 설치미술 혹은 환경미술의 원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특히 그가 1918년에서 1938년까지 약 20여 년에 걸쳐 제작했던 <쉬비터스의 기둥(Schwitters-Saeule)>은 현대 설치작품의 다양한 모드가 집약된 총체적 예술작품(loeuvre dart totale)이라는 점에서 시선을 끈다. 이 기둥은 자라나는 기둥이었다. 그가 거주하고 있던 아파트의 한 ‘방’에서 시작된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벽을 허물게 되었고, 그래도 성장을 멈추지 않자 마침내 위층에 세든 사람들을 내보내고 천정을 뚫어 그곳까지 점령하게 되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나는 쉬비터스의 이 행위가 예술가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상상력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방’은 그곳에 거처하는 사람들의 꿈과 욕망이 서려있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다.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신세대 중심의 사적인 내러티브는 이 방과 관련된 것이 많다. 이 전시회에 초대된 애희를 비롯하여 안진우, 조은경의 작품은 방의 이미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확대한 애희의 <핀업 걸(Pin-up Girl)> 시리즈, 옷을 액자 속에 박제화한 안진우의 작품, 여성의 속옷을 제작하여 제시하는 조은경의 작품이 이 부류에 속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이후에 한동안 모더니즘을 떠받들었던 거대 담론이 사라지면서 부상하기 시작한 이 ‘사적인 내러티브’에의 관심은 예술이 진보라든가 혁명과 같은 거창한 이념에 봉사하는 수단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예술가의 소박한 꿈과 상상력을 담는 ‘그릇’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 현대미술을 통시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미적 담론은 80년대를 점유했던 ‘민중미술’의 힘이 약화되는 조짐을 보이던 80년대 후반 [뮤지엄](1987년 창립)의 등장 이후에 본격화된다. 신세대 미술의 원조격인 이 집단의 멤버들은 이념으로부터의 자유를 분명히 선언했던 것이다. 그 이후 약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급속히 이행해 갔다. 현재 IT 강국으로서의 한국은 컴퓨터 사용자 퍼센티지 면에서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인터넷, 모바일 폰, PDP, 디지털 카메라, 게임산업 등이 강세를 보이는 전자산업의 메카로 인식되고 있다. 인터넷을 매개로 한 블로그의 확산과 디지털 카메라 사용자의 급증은 예술의 대중화와 함께 ‘사적인 내러티브’의 증가를 낳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블로그를 통한개성적 글쓰기의 대중화는 언어나 이미지를 매개로 한 예술의 ‘블록(block)화’ 혹은 ‘셀(cell)화’를 촉진시켰다. 이제 미술은 화랑이나 미술관과 같은 제도적 공간에서 전시되는 것 이상으로 웹상에서 비밀리에 교환되며, 거래되고, 소비된다. 방을 나누는 칸막이로서의 벽은 이제 웹상에서 수없이 미분화되며 보다 정교해지고, 비밀결사를 위한 의식적(儀式的) 장소로 변모하는 중에 있다.

컴퓨터의 상호작용(interactivity) 기능은 관객참여를 유발하고 있다. 이제 예술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예술의 진행 자체가 퍼포밍(performing)화 해 간다. 어떤 작품은 관객이 개입하지 않으면 성립이 어려운 것도 있는데, 본 전시에 참여하고 있는 이배경, 노진아, 김병호, 정정주, 이장원의 작품이 이 경우에 속한다.


최근 몇 년간 현대미술에 나타난 새로운 기류 가운데 하나는 영상매체를 비롯한 뉴미디어의 급속한 확산이다. 첨단의 과학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영상 기기(器機)의 개발과 급속한 보급은 미술의 형식과 내용을 바꿔놓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즉 회화를 비롯하여 조각, 사진, 공예와 같은 기존의 미술 장르는 이미지의 조작과 합성이 자유로운 컴퓨터에게 새로운 표현 영역의 자리를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진전된 면모를 보여주는 컴퓨터의 합성기술은 기존의 회화나 조각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했던 영역을 가능한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컴퓨터의 합성기술이 종합적으로 집약된 스필버그류의 공상과학 영화(SF film)가 제공하는 환상적인 볼거리는 관객들의 시선을 흡인하는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비디오 아트는 백남준의 실험 이후에 어느덧 확고한 미술의 장르로 자리 잡았는데, 여기에도 영화적 시선은 어김없이 개입되고 있다. 관객들은 문경원, 김지윤, 이민호, 장지아, 그리고 박원주 기획의 <시지 화가의 집에 불을 밝히다> 팀에 참가한 Elizabeth, lratxe Jaio, Colin McMulan, Nitin Shroff 등의 영상작품에서 독자적인 시각의 비디오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박원주의 <시지 화가의 집 불 밝히다>는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변시지 화백의 작업실에서 벌어진 일련의 퍼포밍된 상황을 본 전시장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현장의 연계적 특성이 강한 작품이다.

캠코더와 디지털 카메라, 컴퓨터의 광범위한 보급은 대중, 그중에서도 특히 신세대에게 있어서 붓과 물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욱 손쉬운 표현의 시대를 열었다. 이제 더 이상 미술은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사진기의 등장에 맞서 싸워야 했던 19세기 초엽 화가들의 위기의식이나 고뇌보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겪는 위기의식이나 고뇌가 더욱 큰 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디오의 등장이 영화의 종말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상매체의 등장이 캔버스의 종언을 가져다줄 것 같지는 않다. 화가의 육필의 온기를 간직한 유화는 그 특유의 아우라로 영상의 시대에도 계속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본 전시에 유일하게 유화작품을 출품한 허정수는 그렇게 때문에 더욱 이채를 띠는 지도 모른다.

유화와 마찬가지로 조각 역시 첨단의 테크놀러지나 영상매체에 도전을 받고 있는 영역이다. 특히 조각은 그 특유의 정적인 매체적 특성상 이 현란한 이미지의 시대에 그 어느 분야보다 심각하게 존립을 위협받고 있다. 최근 들어 조각가들이 영상매체 쪽으로 급격하게 전향하는 추세는 이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전시회에 초대된 김상균, 이강원, 금중기의 작품은 이색적인 재료의 사용을 통한 개성적인 세계의 구축으로 인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번 전시에는 빛을 매개로 한 두 명의 작가가 초대되었다. LED라는 첨단 소재를 사용하여 시시각각으로 색이 변하는 작품을 출품한 이중근과 못 쓰게 된 필름을 이용하여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전시한 김범수가 그들이다(<시지 화가의 집 불 밝히다> 팀에 참가한 이은전도 빛을 이용한 설치작품을 출품하고 있다).

끝으로 소개할 작가들은 소위 미적 범주의 개념을 흔드는 작가들이다. 미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비너스의 입술을 일그러트려 미의 기준에 의문을 던지는 데비한의 작품을 경계로 정진아, 이희명, 한효석, 최수앙의 최근 작업이 양옆에 포진하고 있다. 정진아는 흔히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는 똥을 아름다운 대상으로 전복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른바 엽기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는 현상은 현재 우리 사회를 대변하는 징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의도적이며 도발적인 반란을 통해 추는 미의 이면에 가려진 어떤 허상적 지점을 공격한다. 그래서 극단적인 추는 미와 통한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지도 모른다. 그로테스크는 그것이 주는 강렬한 충격으로 인하여 보는 자를 반성하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한효석의 작품을 비롯하여 이희명과 최수앙의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김주연은 식물의 싹이 트고 자라는 과정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 준다. 일종의 환경미술적 특성을 지닌 그녀의 작품은 과정(process) 자체가 예술인 셈이다.

참고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메르츠의 방>>이라는 타이틀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이 지닌 건축적 특성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 ‘방’의 개념과 초대된 작가들의 작품세계는 이렇다 할 관련이 없다. 물론 몇몇 작가의 경우 소재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이 건물의 우아한 모습과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미로와 같은 방의 배열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지은 지 백년이 되는, 바로크와 고전주의 양식이 적당히 조화를 이룬 이 서양식 건물(옛 벨기에 영사관)은 구한말 이후 한국의 지난한 역사를 묵묵히 지켜봐 온 산 증인이다. 미술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고희동이 유화를 배우러 동경으로 간 1909년 이후, 한국 근/현대미술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켜봐 온 셈이다. 따라서 나는 이 기획을 통해 ‘유화에서 컴퓨터 아트에 이르는’ 한국미술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압축해서 담아보고자 노력했다. 비록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작가들을 초대했지만, 한국미술의 내용을 이루는 장르와 매체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 건물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과 전시의 내용은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룬다고 봐도 별 무리가 아닐 것으로 믿는다.


필자 주:이 글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에서 12월19일까지 열리는 제4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미디어_시티 2006)>의 특별전 <메르츠의 방> 도록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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