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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마음 전 / 감각의 직물(織物)

윤진섭


Ⅰ.
비평에 종사하다 보면 이따금 이상한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그림이 진정 이 땅에서 제작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작가는 분명 한국인이로되, 그 표현 방식이나 내용, 심지어는 발상조차 서양인의 것을 방불케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작품에 있어서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대개 이러한 질문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한국 사람은 ‘한국적’인 것을 그려야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 깔려 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되풀이 되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힘을 얻게 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우리의 예술작품은 반드시 한국적일 이유도, 민족적일 필요도 없다. 그것은 예술에 관한 한, 하나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 속성상 가치중립적이요, 보편성의 획득을 전제로 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만인의 공감을 얻는 이유는 피카소라는 한 예술가의 재능이 그 속에 보편적 가치로 투사돼 있기 때문이지, 단순히 스페인을 소재로 한 그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족적인 것을 기준으로 예를 들자면, 민화의 세계에 바탕을 둔 오윤의 목판화가 산을 소재로 한 유영국의 추상화보다 더 훌륭하다는 주장은 그래서 더욱 수긍하기 어렵다. 오윤의 어떤 특정한 작품이 유영국의 어떤 특정한 작품보다 더 훌륭하다는 주장은 있을 수 있지만(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전체를 통틀어 훌륭하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민중미술 진영과 모더니즘 진영 간의 논쟁이 소모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있다.
Ⅱ.
최근 빛과 색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화단에 늘고 있다. 이들의 작품 경향은 추상화가 주류를 이룬다. 추상화 중에서도 대부분 단색이거나 혹은 한정된 몇몇의 색을 사용하는, 평면 위주의 미니멀한 작품들이다. 이러한 경향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보면 70년대의 단색화(Dansaekhwa)와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경향의 역사적 기원은 단색화인 셈이며, 이는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뚜렷한 하나의 사조를 형성하고 있다.

나는 이들 일련의 작업을 가리켜 잠정적으로 ‘후기 단색화(Post-Dansaekhwa)’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범주에 속하는 작가들은 1970년대의 단색화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단색화 작가들이란 8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간에 이러한 경향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작가들을 지칭한다.

이처럼 미니멀한 성격의 단색화적 경향은 70년대의 성기 모더니즘(hi-modernism) 이후, 80년대의 민중미술과 90년대 초반 이후에 본격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의 틈새에서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최근 들어서 부쩍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다양한 세대의 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수적인 면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에 확산되기 시작한 사실주의적 구상화와 함께 미술계의 한 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화랑주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가끔 있었지만, 미술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된 것은 이번에 신미술관이 주최하는 <빛과 마음>전이 처음이 아닌가 여겨진다. 따라서 이번에 열리는 <빛과 마음>전은 비록 초대작가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후기 단색화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전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이번 전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빛’이라고 하는 주제에 기획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작가 선정에 있어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는 하다. ‘색’이 아니라 ‘빛’에 기획의 초점을 맞췄다고 하는 사실은 색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색이 가져다주는 어떤 효과에 주목하는 작가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방금 전에 ‘색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고 하는 표현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가들이 색에 대해 관심이 없다거나 이들의 작업에서 색이 중요한 요소가 못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이들에게 있어서 ‘색’은 오히려 ‘빛’보다 더 직접적인 관심사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회화에서 빛은 어떤 경우든 색을 매개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가들에게 있어서 빛은 색 자체에 주목하는 여느 단색화 작가들과는 달리 빛이라고 하는 현상에 제작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이다.

‘빛’ 다음에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빛’과 ‘마음’은 하나의 쌍을 이루는 개념이다.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색’ 또한 마음의 작용과 깊은 연관이 있으나, 빛만큼 강렬하거나 직접적이지는 못하다. 색은 인간의 마음에 어떤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블루(blue)는 평화를 상징하고 보라색은 고귀를 상징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반면에 빛은 렘브란트의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이나 자화상에 잘 표현돼 있는 것처럼 ‘성스러움’ 혹은 ‘거룩함’의 표상으로 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역시 마음의 작용적 측면에 주목한 해석일 뿐, 색채학의 입장에서 보면 흰색은 빛을 백 퍼센트 반사할 때, 그리고 검정색은 백 퍼센트 흡수할 때 나타나는 물리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Ⅲ.
단색화적 경향에 주력하는 작가들이 제한된 색을 주로 다루다보니 자연히 추상회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모더니즘의 조형언어와 조형적 형식에 익숙하며, 이들의 작품에서는 평면성의 개념이 공통적으로 추출된다. 캔버스의 평평한 면이 강조되고 있으며, 입체를 다루는 경우에도 평면의 연장이거나 혹은 평면에서 어떤 구조물에 의한 돌출 또는 그것의 변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미적 감각이 우리의 사회 변화와 긴밀한 조응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소위 70년대의 단색화가 지닌, ‘미술과 사회 사이의 괴리’라고 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했다고 보는 관점이다. 사회사적 관점에서 볼 때, 70년대는 우리 사회가 한창 경제 위주의 개발도상 중에 있던 시기였다. 이농현상이 두드러지긴 했지만 미처 농업경제의 기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는 빈부 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보혁 간의 갈등으로 끊임없이 들끓고 있었다. 미술계에서는 한편에서는 민족적인 것에 대한 탐구와 민중적 가치에 대한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보편적인 미적 가치에 대한 신념이 팽배해 가고 있었다. 소위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이라고 하는, 결코 합쳐질 수 없는 양대 이념 간의 갈등은 건강한 대화가 부재하는 가운데 감정의 골만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진영의 작가들이 내면에서 고민하는 것은 표현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다 같이 미의식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예컨대 민중, 민족미술을 지향하는 작가들은 전통적인 시형식(視形式)에 바탕을 둔 민화, 풍속화, 초상화, 산수화, 화조화, 목판화, 수묵화 등등을 미술의 범본으로 삼아 이를 오늘의 시점(時點)에서 해석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던 반면, 단색화와 같은 모던한 조형언어를 추구하는 작가들은 우리 고유의 자연관과 사유에 입각한 정신의 세계를 회화 평면을 매개로 육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미의식의 정체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은 결국 우리의 미술을 풍요롭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0년대의 소위 서구일변도의 현대적 매체나 조형언어에 의존하던 획일적 풍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1980년대 미술의 저항은 미술의 외연을 넓혀가는 한편, 내용적으로도 한층 더 다양한 미적 산물들을 쏟아냈다. 형상성의 대두와 더불어 설치, 테크놀러지, 퍼포먼스가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목판화, 벽화, 걸개그림과 같은 방식들이 노동현장과 시위현장에서 프로파간다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1990년대는 새로운 미감으로 무장한 신세대의 등장으로 상징된다. 철저한 정치적 중립성의 표방과 몰이념적인 사고방식으로 대변되는 이 세대는 펑크와 키치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양대 이념 세력을 ‘흑백 텔레비전’으로 치부하는 의식의 과감성을 보여주었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진행 과정을 밟아온 한국의 현대미술은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이념의 진공지대 혹은 의식의 해방구를 맞이하게 된다. 미술은 금기로부터 해방되었으며, ‘No!’라고 말 할 수 있는 권리가 신세대 작가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후기 단색화’적 경향을 보이는 작가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술계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미미한 숫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중후반에 이르는 작가들이 서울과 지역에서 개인적인 작업을 펼쳐가고 있었다. 90년대는 소위 ‘압구정 문화’로 통칭되는 ‘포스트 모던’한 소비문화가 확산일로를 걷던 때로서 강남의 테헤란로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 군(群)이 형성되고 있었다. 소비문화가 확산되면서 디자인이 중요한 문화예술의 매개 변수로 떠올랐다. 실내디자인을 비롯하여 광고디자인, 공업 디자인, 제품디자인, 건축디자인, 가구디자인 등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서 회화와 조각, 공예, 디자인, 만화와 같은 장르들이 융합(fusion)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단색화의 입장에서 보면 70년대 작가들의 의식을 점유하고 있었던 동양적 사유나 범자연주의에 입각한 정신성과 같은 다소 무거운 개념들은 후기 단색화적 경향의 젊은 작가들에게는 더 이상 매력적인 요소가 아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선배나 스승의 작업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자신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추구해 나가는 작가들도 있지만, 색에 대한 일체의 관습이나 고정관념을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가운데 가치중립적인 입장에서 미술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번 <빛과 마음>전에 초대된 김택상, 남춘모, 박원주, 안정숙, 오이량, 장승택, 제여란, 채명숙, 최상현 등 9명의 작가들은 주로 ‘단색’ 혹은 이의 한 표현 양태로서의 ‘단색조’에 관심을 가지고 오랜 기간동안 자신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 화단의 중견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단색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이들 중 입체 작품을 출품한 박원주의 경우는 예외에 속한다), 차이점이라면 사용된 색을 통해 발현되는 ‘빛’의 독자적인 전개 방식에 있다. 다음은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간략한 기술이다.

김택상의 작품은 시간의 궤적이다. 그의 경우에 있어서 색은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는 기록장치에 다름 아니다. 사각의 나무틀에서 생성되는 색의 미묘한 겹들(layers)은 끈질긴 기다림의 결과이며, 되풀이되는 색물의 붓기가 가져다 준 결과물이다. 그는 이 과정에 거의 개입하는 일이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발되는 수분과 그로 인해 마지막까지 남은 색료의 잔여물이 그의 작품의 전체이다. 마치 녹차를 우려내듯, 자연의 빛깔을 닮은 그의 색들은 오랜 시간 동안 숙성되고 우려내어진, 감각적이지만 깊이가 있는 색이다.

남춘모의 작품은 일종의 감싸기 작업이다. 김택상이 그린다는 의미에서의 신체적 개입을 금하면서 색물을 붓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과는 달리, 남춘모는 철저히 신체적 개입을 수행한다. ‘ㄷ’자 형태의 틀에 날염된 천을 씌우고 그 위에 거듭해서 투명한 합성수지를 칠하는 행위를 거쳐 특유의 부조회화가 탄생된다. 그의 작품에서 색은 투명한 각질과도 같은 합성수지의 번들거리는 광택 속에 잠겨있다. 빛은 작품의 전면에서 반사되지만 요철을 이룬 선형의 구조 속에서 음양의 변주를 이루고 있다.

박원주는 이번 전시에 유일하게 초대된 조각 전공의 작가다. 지난 몇 년간 A4 용지의 사용을 둘러싼 문화적 차이에 주목해 온 그녀의 작업은 <<고독 공포를 완화하는 의자>>(2004, 사루비아다방)를 거쳐 최근 뉴욕에 있는 Sculpture Center의 기획초대전에서 빛을 발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은 구겨진 종이를 다시 폈을 때 나타나는 부드러운 곡면의 표정을 유리로 표현한 것이다. 약간 뒤틀리고 변형된 사각 프레임 속의 유리는 마치 물결처럼 부드러운 빛을 반사하고 있다.

안정숙은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로 이루어진 입체적 회화 작품에 주력하고 있는 작가다. 사다리꼴의 형태에 한색이나 난색 계통에 속하는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단색을 주로 사용한다. 프레임과 캔버스 천 사이에 구조물을 삽입하여 칼로 벤 듯한 예리한 흔적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작품에서 빛은 음영의 강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내는 요인이다. 캔버스 위에 불룩 솟아오른 구조물의 흔적이 빚어내는 음영의 미묘한 그라데이션은 마치 달빛에 비친 사구(砂丘)의 모습처럼 아름답다.

오이량은 오랜 세월동안 기하학적인 침묵의 세계에 천착해 온 작가다. 백 또는 흑색의 단색을 통해 기하학적인 좌우대칭의 만다라와도 같은 정관의 세계를 이룩해 내고 있다. 부드러운 실리콘 판을 잘라 일일이 화면에 부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오이량의 단색 부조회화에서 빛은 실리콘 파편의 방향에 따라 미묘하면서도 복잡한 음영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은 보는 거리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멀리서 보면 단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세부의 표정이 드러나면서 섬세한 재료의 질감이 느껴진다.

장승택은 붓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90년대 초반의 그을음, 밀납, 파라핀, 소금 등 천연의 재료을 사용한 작업에서 합성수지를 굳히는 모노크롬 작업을 거쳐 요즘엔 폴리회화 작업에 푹 빠져 있다. 그의 작품에서 빛은 표면에 부딪쳐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재료를 투과하는 부드러운 중성적 성격을 띠고 있다. 마치 우리의 전통 창호처럼 한지를 통해 걸러진 은은한 달빛처럼 장승택의 작품에서 빛은 색채와 더불어 순환되며 때로는 일체화하여 나타난다.

제여란의 작품에서 빛은 색채의 강한 콘트라스트에서 생성된다. 단색 혹은 같은 계열의 제한된 색에서 비롯되는 미세한 농담의 차이가 빛의 미묘한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때로 이 빛은 계시적인 느낌을 준다. 여명의 시각에 검게 보이는 산의 구릉 사이로 박명의 빛이 퍼져 오르는 것처럼, 그녀의 보폭이 큰 행위 회화(performing painting)에서 주목되는 요소다. 빛을 빨아들이는 어두운 블랙홀과도 같은, 물감의 다양한 층위(layer)가 만들어내는 넓은 색역(色域)과 여백을 이루는 빛의 영역 간의 두드러진 대비가 인상적이다.

채명숙은 종이를 매개로 반복되는 행위성이 두드러진 작업을 하는 작가다. 종이 위에 무수한 점을 찍거나 바늘로 구멍을 뚫거나 뜯어내거나 칼로 자르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작품이 완성된다. 에칭, 리도그래피, 엠보싱 기법을 활용한 그녀의 판화작품은 바늘로 구멍을 뚫거나 무수히 점을 찍는 행위가 흑백의 콘트라스트 효과가 강한 삼각형, 사각형, 다이아몬드, 원 등의 형태 속에 집약되었다. 최근의 입체 작업은 동일한 사각패턴의 질서 있는 배열을 통해 색과 빛에 의한 시각적 그라데이션 효과를 나타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최상현의 작업은 모듈화된 격자형의 패턴들이 창출하는 집합의 미가 특징이다. 그는 색 자체의 발광에 주목하여 펄이 섞인 아크릴 물감을 주로 사용한다. 색은 횐 색을 비롯하여 검정, 파랑색 등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며, 캔버스의 표면에 두터운 아크릴 물감을 바른 뒤, 이를 날카로운 필촉으로 직선을 반복해서 긋는, 행위성이 강한 작업이다. 빛은 행위의 흔적인 물감의 표면에 부딪치면서 다양한 난반사를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인상적인 시각적 잔치를 이끄는 요인이다.

이상 기술된 작가들은 현재 살고 있는 거주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서울(박원주)을 비롯하여 청주(김택상, 채명숙), 안양(제여란), 분당(안정숙), 포천(장승택), 청도(남춘모), 대구(최상현), 광주(오이량) 등 전국에 걸쳐 고르게 분포돼 있다. 이는 이 경향의 작가들이 어느 지역에 편중돼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산재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후기 단색화(Post-Dansaekhwa), 나는 단일한 색을 사용하는 일군의 작가들을 잠정적으로 이런 명칭으로 부르거니와, 이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보다 정치(精緻)한 분석과 의미 부여는 앞으로 전개될 또 다른 기획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 필자주 : 이 글은 청주의 신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빛과 마음-light and mind(2006.11.2 - 12.16) 전의 도록 서문으로 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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