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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인 / 실험미술의 파이어니어

윤진섭

I.
안치인은 고향인 대전에 거주하면서 실험 작업을 펼쳐온 작가다. 그렇기 때문에 안치인과 대전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지 대전의 작가로만 인식되거나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이제까지 해 온 실험 작업의 활동반경과 영역은 그를 단순한 지역작가의 차원에서 벗어나 동시대 국제미술의 흐름과 호흡을 같이 하는 전위작가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30 여 년 전, <대전 78세대>의 창립 멤버로 전위미술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안치인은 가깝게는 가족으로부터, 멀게는 일반 대중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왔다. 이유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전위미술에 미쳐있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미치지 않고는 30년이란 긴 세월을 주변의 몰이해와 냉대에 맞서 싸우면서 그렇게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나 태도가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를 피상적으로 접한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을 보고 쉽게 판단해 버리기 일쑤다.

이번에 대전시립미술관이 연례기획전인 [대전미술의 지평전] 초대작가로 그를 선정한 것은
대전 지역의 실험미술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대전미술의 지평전]이 무엇인가. 2005년부터 개최된 이 전시회는 “대전 미술의 현황을 집중 조명하고 그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해마다 대전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 중에서 단 두 사람만을 선정하여 초대하는 이 기획전은 그 권위나 파급 효과 면에서 볼 때 그만큼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시회에 안치인이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초대를 받은 당사자는 물론이요, 대전 지역의 실험미술이 그 역량을 인정받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전 지역 동시대 실험미술의 파이어니어로서의 안치인은 이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제도 미술기관인 시립미술관으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그 동안의 노고에 값하는 보상을 받은 셈이다.


II.
지난 30여 년에 걸친 안치인의 활동영역은 드로잉, 설치, 영상, 퍼포먼스, 전시기획 등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있다. 이는 그가 다재다능할 뿐만 아니라, ‘실험미술’이라는, 미술의 첨단(cutting edge) 분야에 있어서 발군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70년대 말엽, 개념미술과 이벤트가 첨단의 미술 사조로 영역을 확장해 나갈 당시, 목원대학교 미술학부 학생이었던 안치인은 이 대학에 강사로 출강을 하던 이건용과의 만남을 통해 전위미술에 눈을 뜨게 된다. 당시 목원대학교 미술학부에는 김한을 비롯하여 김홍주, 최태신, 오세열, 윤영자 등등 한국 현대미술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던 유능한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안치인은 자연스럽게 현대미술에 접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안치인의 작업을 관류하고 있는 드로잉과 개념미술, 퍼포먼스적 요소들은 이들 은사들로부터 받은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형성된 안치인의 미술 성향은 80년대 들어서 본격적인 활동을 통해 표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그의 활동은 대전을 중심으로 한 충청권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야투>에 참가하는 등 당시 대전과 공주 지역에서 형성되고 있던 자연미술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가 서울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 것은 1986년에 아르코스모미술관이 주최한 <서울 86 행위 설치 미술제>에서였다. 한국의 실험작가 45명이 초대된 이 전시회에서 그는 수 백 장의 카드를 뿌리는 특유의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이 기획전은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음으로써 전국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이 전시를 통해 비로소 안치인은 동년배의 서울지역 작가들과 친교를 맺고 교류를 나누는 기회를 갖게 된다.

안치인에게 있어서 1987년은 매우 의미가 있는 해이다.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에 들어선 그가 대전 지역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대전’87청년트리엔날레(The 1st Dae-jon 87 Youth Rriennale)>를 조직함으로써 비로소 이 지역에 국제화의 물꼬를 트는 기회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하여 독일, 일본, 인도, 대만의 작가들이 참가한 이 국제전은 순수하게 민간의 차원에서 마련한 것으로 그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변변한 국제전이 없었던 당시의 국내 사정을 감안할 때 획기적인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전시기획자로서 안치인의 면모는 이 국제전을 통하여 검증되었다. 매사에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약 30여 년에 이르는 자신의 활동상황을 여덟 권에 달하는 방대한 포트폴리오에 집성해 놓고 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을 프로작가(professional artist)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무튼 1987년을 전후해서 보여준 그의 활동은 일본의 ‘사운드 팩토리(Sound Factory)’에서의 퍼포먼스 발표를 비롯하여 서울의 [80년대의 행위미술](바탕골미술관), 대전의 [대전 ’87 행위미술제](쌍인화랑) 등을 통해 전개되기에 이른다. 80년대 후반, 한국행위예술가협회의 발족에도 큰 기여를 한 안치인은 그 이후 국내외의 활동을 통해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 명성을 쌓아나갔다. 이 시기의 활동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89청년작가전]에의 참여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그 해의 청년작가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작가들을 선정, 초대한 이 기획전(초빙 큐레이터 윤우학)에 안치인이 윤진섭, 이불, 이두한과 함께 초대를 받음으로써 퍼포먼스가 국내의 대표적인 제도 미술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실현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이 기획전에서 특유의 카드 퍼포먼스를 실연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중앙홀에서 벌어진 이 퍼포먼스는 일종의 제의적 성격을 지닌 것인데, 허공에 흩날리는 수 백 장의 카드가 장관을 이루며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바 있다.






III.
이번 전시회를 위해 대전시립미술관이 제작한 안내문에는 안치인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안치인은 목원대학교 졸업 이후 <78세대> 그룹 활동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기존의 미술형식을 탈피하며 다양한 행위예술을 통한 실험적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초기에는 신탄진 강변, 대전문화원 공원에서 진행한 현장작업뿐만 아니라 금강현대미술제, 공주야투현장미술제, 광주비엔날레, 부산바다미술제, 금강자연비엔날레 등 각종 대규모 전시에 참여하여 왔는데 퍼포먼스, 영상, 설치, 드로잉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일관된 작품세계를 선보여 왔다. 또한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필란드 등을 오가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넓혀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활동은 270여회의 전시기록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안치인의 활동에 대해 간략히 서술한 이 문장은 실험미술에 젊음을 바친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보여준다. 한때 평탄치 못한 가정사로 좌절을 겪기도 한 그에게 있어서 예술은 상처받은 영혼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90년대 초반, 러시아로의 유학을 간 것도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앞에서 언급한 국내외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다시 예술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서울국제행위예술제]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한동안 지속되었던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IV.
이번 전시는 모두 세 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영상, 설치, 드로잉 등 안치인이 그동안 해왔던 작품 내용을 집약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전시기간 중 다섯 차례의 퍼포먼스가 열리는 점을 감안한다면 도합 4부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전시장의 초입에는 2001년도에 발표한 <<물>>이라는 입체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70년대에 개념미술의 세례를 받은 안치인의 발상과 아이디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검정색으로 칠해진 작은 선반 위에 물이 담긴 유리컵을 놓고 그 위에 대전의 상공을 촬영한 사진을 부착한 이 설치작업을 통해 안치인은 물과 환경의 순환관계를 개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전 출품작을 관류하는 키워드는 개념과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요소는 드로잉과 설치, 퍼포먼스의 영역을 관류하면서 상호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드로잉, 퍼포먼스, 오브제, 설치 등 그의 작업 전체가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돼 있으며, 그 발상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작업 초기에 자연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야투>나 <금강자연비엔날레> 등의 자연미술제를 통해 형성된 환경에 대한 관심이 전 작업의 화두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나는 퍼포먼스를 제외한 안치인 작품세계의 본질은 개념미술적인 의미에서의 ‘개념’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입체 드로잉>>이다. 1983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안치인의 입체 작품 중 백미에 해당한다. 체의 테두리를 깎아서 만든 이 작품은 면이 소멸되어 선으로 환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록 그 프로세스는 영상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체의 테두리를 깎아 둥근 선으로 환원시켜 가는 과정을 상상한다면 그것은 한 편의 훌륭한 퍼포먼스가 될 것이다. 남은 선을 더 깎아나간다면 선조차 없어지면서 사물은 마침내 무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고 선은 오직 개념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그의 이 작품은 존재와 무, 즉 개념의 중간항인 것이다.

발상적 측면에서 볼 때, 이 개념적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것이 <<언어학적 기호>>(2006)다. 이 작품 역시 언어와 개념에 대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불에 탄 타자기 뒤로 3백호 가량이 되는 패널이 있고, 그 패널에는 글자가 깨져 알아볼 수 없는 텍스트가 확대돼 있다. 타자기 뒤에 숨겨진 녹음기에서는 타이핑할 때 나오는 단속적인 소음이 흘러나온다. 텍스트의 글자들은 흰색의 수정액으로 여기저기 지워져 있다. 이 작품은 언어와 소통에 대한 문제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언어가 의미의 결합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기호의 약속이 깨졌을 때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언어, 개념, 신체, 생태, 자연, 행위 등등은 안치인의 전 작업에서 검출되는 키워드들인데, 그 중에서도 개념은 여타의 요소를 엮는 핵심어 중의 핵심어이다. 이는 그가 작업 초기에 비롯된 개념미술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작업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는 이 화두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한계를 드러냈는데, 가령 자연적 소재를 드로잉으로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명료함을 드러내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어정쩡한 상태에 머문 감이 있다. 즉 드로잉의 개념적 명료성보다는 상황의 표출에 주력함으로써 <<입체 드로잉>>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의식의 치열성이나 개념적 명료성이 뒤따라주지 못했던 것이다. 본래 밑그림에 해당하는 드로잉이 현대미술의 화두로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80년대 초반이었다. 드로잉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이 미니멀리즘의 쇠퇴 이후에 시급히 요청되면서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긴급동의의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안치인의 <<입체 드로잉>>은 당시 미술계의 이러한 상황에서 구상된 것으로 문제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1983년부터 시작한 나무 입체작업은 제작된 숫자에 비해 남아있는 것이 많지는 않지만 드로잉과 관련하여 볼 때 특유의 발상을 보여주는 수작들이다. 나뭇가지를 잘라 종이와 결합하는 이러한 경향의 작업은 1983년 이후 우리 미술계에 번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1983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린 [새로운 종이조형-미국전]이 미친 영향의 결과다. 당시 이 전시에 영향을 받은 상당수의 작가들이 나무를 이용한 입체 설치작업을 시도했는데, 안치인 역시 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향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체화했느냐 하는 것인데 그는 사과나무와 배나무 가지를 이용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탁월한 조형 감각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 작품들이 이번 전시에 출품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드로잉을 통한 자연 혹은 환경에의 관심과 함께 설치, 영상 작업은 90년대와 2000년대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번에 출품된 <<물>>(2006)은 영상, 드로잉, 설치가 종합된 대작이다. 벽에는 물의 이미지를 드로잉한 푸른색의 단색화 시리즈가 걸려있고, 바닥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옹기들이 놓여있다. 천정에는 물고기의 이미지가 부착된 입체물들이 매달려 있는데, 그 뒷면에는 영어로 ‘water?’라는 단어가 인쇄돼 있다. 한 쪽 벽에는 넘실대는 물결이 영사되고 있으며, 그 옆의 벽에는 수 백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진 커다란 캔버스가 걸려 있다. 오염돼 가는 자연 환경에 대한 일종의 고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커다란 새의 둥지를 만들고 그 안에 여러 대의 비디오를 설치하여 새의 생태를 보여준 <<생명의 메시지>>와 함께 안치인의 본격적인 환경미술 작품에 속하는 것이다.
퍼포먼스는 안치인의 전 작업과정에 있어서 그 무엇 보다 중요한 분야다. 안치인은 퍼포먼스 작가로 명성을 쌓았고, 작가로서 그의 이미지는 퍼포먼스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안치인 퍼포먼스의 요체는 카드를 던질 때 극점에서 느끼는 심리적 카타르시스에 있다. 적, 청, 때로는 오방색의 화려한 수 천 장의 카드를 허공에 뿌릴 때 나타나는 시각적 충격이 관객들에게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다. 그것은 결집된 카드가 허공에 흩어질 때 나타나는 장관 자체가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심리적 해방감과 동일시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수 십 차례의 퍼포먼스 실연을 통해 축적된 경험은 주변을 둘러싼 상황들-사물, 관객, 환경 등-을 즉석에서 활용하는 애드리브를 낳을 정도로 익숙해 있다. 그의 재치있는 상황판단과 퍼포머(performer)로서 타고난 끼는 그의 행위 작업을 돋보이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V.
안치인은 70년대에 미술에 입문하여 80년대를 통해 작가적 위치를 굳히고 90년대와 2000년대를 통해 입지를 확인한 우리 미술계의 문제작가 중 한 사람이다. 대전이라는 지역적 한계도 그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는 타고난 예인의 끼와 열정을 통해 질풍노도와도 같은 시절을 견뎌냈다. 그 과정에서 그에 대한 몰이해와 주변의 차가운 시선이 잠시나마 그를 주눅 들게도 했지만, 그는 그것에 굴하지 않고 다시 우뚝 섰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번에 열린 [대전미술의 지평전]은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의 미술계가 그에 대해 내리는 격려와 재평가의 의미가 크다. 그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지역의 미술계에 커다란 빚을 졌다. 삶의 태도에서 작가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뭔가를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기대와 요구가 그 안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안치인이 그 점을 깨닫고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는 대단히 명석한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부여된 과제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통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내가 그에게 기대를 거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전시립미술관 주최 대전미술의 지평전 도록-전시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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