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윤진섭의 문화탐험]<12>김성남-자연으로서의 초인의 몸

윤진섭

■‘인간과 자연의 화해’ 잔 붓 끝에 묻히다


▲ 숲에 푹 빠진 작가 김성남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숲에는 신령한 기운이 넘친다. 이따금씩 지저귀는 새소리만 깊은 정적을 깰 뿐,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이끼 낀 고목은 1000년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버티고 서 있으며,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칡덩굴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멀리서 보면 숲은 온통 녹색 빛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숲은 미묘한 색의 변주로 가득 찬 속살을 드러낸다. 거의 검정에 가까운 암녹색의 나뭇잎들 사이를 뚫고 한줄기 빛이 땅으로 내리 꽂힌다. 원시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김성남은 몇 년 전부터 숲 그림에 푹 빠져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을 끌어온 ‘벌거벗은 인간’ 연작의 후속작업인 셈이다. 소재 면에서 보면 이 둘은 분리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

‘자연’과 ‘인간’이라고 하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주체간의 대결 국면이 ‘제의(祭儀)’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무대의 배경 막은 문명이다. 인간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찬란한 현대문명, 그가 21세기인 오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주제는 더욱 의미심장하며 그만큼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는 오늘의 시점에 서서 눈은 아득한 선사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근작에 나타나고 있는 신령한 숲은 그러한 시대적 상황의 상징물이다. 그것은 르네상스 이래 근대의 합리주의 정신이 파괴한 자연과 신화에 대한 동경이며, 파괴의 주체인 인간에 대해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의 작품에 관해 평문을 쓴 고충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지식으로 오염된 자연은 피를 통해서만 정화되고, 그 원형을 회복할 수 있다. 그 숲에서 이루어지는 살해와 폭력은 성스러운 힘에 연동된 것이며, 자연이 자기정화를 위해 요구하는 한 과정인 것이다.”



김성남이 벌거벗은 인간과 함께 닭, 오리, 소, 염소와 같은 희생제의에 사용되는 동물들을 화면에 등장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는 피로 물든 인간과 동물의 몸을 통해 인간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대속(代贖)을 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초기작에 해당하는 ‘초인’시리즈에는 묵시적인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는데, 이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는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되는 희생제의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제의에 관한 지식의 보고인 프레이저의 명저 ‘황금의 가지’에는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제의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희생제의의 사례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요체는 죽음과 부활이다. 또 하나 공통적인 것은 신에게 바치는 공물(供物)로서 흔히 양이나 염소 혹은 수소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대인들은 신의 대리물인 수소나 양, 혹은 염소를 죽여 그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죽어서 다시 소생하는 신’을 맞이하였다. 그것은 자연의 순환법칙에 순응하는 행위이며, 죽음과 부활에 따른 슬픔과 환희를 만끽하는 정신적 체험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제의에서 보듯이, 애초에 인간의 육신을 절단하여 희생제의의 공물로 바쳤던 인간의 관습은 문명의 단계가 높아가면서 양이나 수소로, 다시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떡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종교의 세속화 현상이다. 알다시피 인간 사회가 문명화되면서 근대의 합리주의 정신은 신성한 숲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도시를 건설했다. 숲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과 비례하여 도시는 점차 확장돼 갔다.

상징적인 면에서 보자면, 이제 도시가 잃은 것은 애초에 숲이 지녔던 신령한 기운이다. 이제 신성한 공물을 통하여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던 인간의 관습은 너무나 미미해진 상징적 대리물로 인하여 본래의 의미를 잊을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직접 손으로 만지지 않으면 잘 잊는 습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비 콕스가 ‘바보제’의 끝자락에서 묘사한, 저자가 교회의 문을 나서면서 느꼈던 먼동이 터오는 새벽녘의 형언할 수 없는 광휘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 ‘초인 시리즈’

이른바 거룩한 것의 나타남, 즉 성현에 대한 회복은 신령한 숲의 실지(失地) 회복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도시를 밀어내고 다시 신령한 숲을 조성할 것인가.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안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

제인 해리슨은 제의와 예술은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대예술과 제의’에서 치밀한 논증을 통해 입증했다. 그녀는 현대사회에서 기도를 하러 교회에 가는 것과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가는 것은 유사한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림도 역시 마찬가지일 터. 김성남의 숲을 그린 그림은 우리에게 유사한 미적 체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남의 숲을 다룬 그림은 자연의 영기(靈氣)를 잘 드러내고 있다. 잔 붓질로 묘사된 나무와 숲의 형상과 그 아래의 못에 잠겨있는 핏빛으로 얼룩진 사람의 몸, 잡목들과 넝쿨로 우거진 숲에서 피어오르는 불과 연기 등등의 장면은 거룩한 느낌과 아울러 종교적 법열과 유사한 미적 감정을 환기시킨다.

예술은 때로 성스러운 땅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세속화된 사회에서 종교와 함께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고졸(古拙)을 의미하는 ‘아르카익(archaic)’이란 단어가 ‘시작(to begin)’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김성남의 작품을 통해 희생제의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꽤 유익한 일일 것 같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