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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의 문화탐험] <15> 빌 비올라-인생의 시작과 끝

윤진섭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문득 나를 돌아보다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
사람은 태어난 뒤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통과제의를 겪는다. 백일잔치를 비롯해 첫돌을 기념하는 돌잔치, 학교에 들어가면 입학식, 짝을 만나 결혼을 하면 결혼식, 환갑을 맞이하면 환갑잔치, 탄생 88세를 기리는 미수연(米壽宴), 99세를 축하하는 백수연(白壽宴) 등 이름을 달리하는 잔치들이 즐비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이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의 삶과 죽음,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달 수밖에 없는 이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가가 바로 빌 비올라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과 비슷한 시기에 출생한 둘째 아들의 존재 사이에 기묘한 인연이 얽혀 있음을 깨달았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연기설(緣起說)과도 같은 것. 세상에 터럭 한 올조차도 어찌 인연이 없을 손가. 내가 한 마리의 미물이라도 다치게 하면 언젠가는 그것이 계기가 돼 세상에 돌풍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기상학자 로렌츠가 말한 ‘나비효과’다. 그는 “북경에 있는 나비가 날개를 퍼덕이면 얼마 후에 뉴욕에 폭풍이 일어난다”는 말로 카오스 이론을 대변했다. 그래서 장기적인 예측이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한 글에서 이른바 ‘피륙론’을 펼친 바 있다. 세상은 잘 짜여진 피륙과도 같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였다. 여기 피륙에서 삐죽 튀어나온 올이 하나 있다고 치자. 그 끝을 잡아당기면 피륙에는 주름이 지게 마련이다. 피륙이 ‘짜임’이라는 인연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남’이 중요한 것이다.

빌 비올라는 인간의 이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물결, 화면 속의 슬로우 모션을 통해 그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타인과 무수히 부딪치며 얻은 상처와 그로 인한 슬픔에 대해 말한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저미듯이 우러나오는 비애를 통해 너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그것은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반성과도 같은 것이다. 가령, ‘의식(儀式)’을 보라. 한 무리의 남녀가 마치 조문을 하듯이 뭔가를 비통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들은 마치 조문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천천히 다가와 뭔가를 쳐다본 뒤 서서히 몸을 돌린다. 한 10분 정도 영상이 전개되는 동안 등장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슬픔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 어느 정도 머물다 돌아서는 사람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본 것일까.



관객들은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등장인물들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맞추게 된다. 그러니까 등장인물들이 보는 것은 바로 관객인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것처럼 빌 비올라의 작품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인간의 반성 능력이다.

알다시피 반성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그냥 그런데 특별히 반성해야 할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친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아니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위기에 봉착하거나 망가진 삶을 앞에 두고 가슴을 저미는 슬픔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때 절절한 반성이 찾아온다.

반성은 빅터 터너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리면 ‘문지방(threshold)’이다. 그러니까 일상의 이 공간에서 희망에 찬 미래의 저 공간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에 우리의 발이 걸쳐져 있는 형국인 것이다. 문지방의 저 너머에 있는 공간은 가상의 공간이다. 그 공간 전체를 덧씌우는 행위, 즉 ‘프레이밍(flaming)’하는 문화적 기제가 바로 축제요 제의다. 세속적인 일상 공간은 축제와 제의로 인해 순간 거룩한 공간, 성스러운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축제는 가치의 전도와 체제의 전복을 통해 일상의 ‘질서(cosmos)’를 ‘혼돈(chaos)’의 상태로 바꿔놓는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보듯이 귀족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귀족이 되는 체제의 일시적 전복을 통해 혼돈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축제의 기간에는 온 세상이 도취의 상태에 빠진다. 질탕한 놀이와 음주, 가무 등 무법천지의 난동을 통해 카오스의 진정한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축제가 끝나면 공동체 사회는 다시 문지방을 통과하게 된다. 혼돈에서 새로운 질서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 세계는 소나기가 가신 뒤 영롱하게 뜬 무지개처럼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매혹의 순간’이다.

빌 비올라의 ‘변형(Transfigurations)’은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겪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물이 쏟아지는 막을 통과하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물의 막을 통과하는 등장인물의 행위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통과제의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고 제의나 축제에서 나타나는 문지방의 상징일 수도 있다.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통과하게 되는 문지방들. 그것은 인간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룩해 놓은 문화적 형식이 아니던가. 각종 축제와 제의, 제전들은 고단한 삶의 도피처인 동시에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이 탄생시킨 문화적 형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빌 비올라의 작품들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원적인 감정을 끄집어냄으로써 황폐해진 인간의 심성을 바로잡는 반성적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빌 비올라, 그야말로 예술이 한낱 눈요기 거리 혹은 반성 능력을 결한 상업주의의 희생물이 돼가는 이 시대에 웅혼한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는 말씀의 선지자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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