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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의 문화탐험] <19> 안창홍-똥의 분변학

윤진섭

■탁월한 연금술적 상상력 부활하는 ‘썩음의 미학’


▲ 작가 안창홍
똥은 사람이나 동물의 입으로 들어간 음식물이 소화·흡수되고 남은 찌꺼기가 항문을 통해 나온 것이다. 그것은 악취를 풍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똥 냄새를 싫어한다. 똥이 욕에 빈번히 등장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똥에 대한 사람들의 이 혐오감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나 똥이 반드시 혐오스럽거나 몸에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자연순환론의 입장에서 보면, 똥은 자연으로 돌아가 작물의 성장을 돕는 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란 작물이 맛있는 음식이 돼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고, 그것은 또 다시 똥이 돼 세상에 나온다. 이 반복되는 순환! 그것은 자연의 순환법칙을 닮았다.

안창홍은 똥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똥을 누는 자화상이다. 수정처럼 각이 진 바위산에 올라 도도하게 똥을 누는 작가 안창홍. 오른손으로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쥐고 있는데, 항문에서는 이제 막 무지개 빛 똥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이다.

그림을 보자. 진한 청색을 바탕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깨끗한 화장지와 알록달록한 무지개 색 똥 사이에 핑크빛 나는 그의 몸이 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내 천(川) 자의 구조로 돼 있다. 그의 얼굴은 정면, 그러니까 관객을 향하고 있다. 관객을 쳐다보면서 부끄러운 기색은커녕, 약간의 조롱 끼마저 띤 웃음을 짓고 있다. 그는 벌거벗은 상태다. 바위산의 여기저기에는 똥 덩어리들이 질펀하게 널려있는데, 그것들은 색깔로 미루어봐서 그가 방금 전에 퍼질러 놓은 것 같다.

누런 똥을 무지개 빛으로 바꿔놓은 것은 안창홍의 연금술적 상상력이다. 그의 기발한 상상력은 하찮은 똥마저 무지개 빛 환상의 똥으로 바꿔놓는다. 다시 이 그림을 보면 바위의 편평한 면에 놓인 똥들이 마치 암벽을 기어 올라가는 구더기처럼 보인다. 그것은 옛날 시골의 변소에서 목격한 구더기를 연상시킨다. 꼼지락거리며 그러나 쉼 없이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구더기의 행렬. 구더기 역시 사람들이 싫어하는 미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똥과 구더기, 이 둘은 혐오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무엇보다 이 둘은 모두 밑바닥에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무지개 빛 똥을 구더기로 가정한다면, 밑바닥에서 위로 기어 올라가는 길은 몸으로 부딪히는 험난한 여정이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하층민들이 생존과 신분상승을 위해 몸을 던져 살아가는 삶의 여정을 상기시켜 준다. 작가는 권력의 정상을 암시하는 바위산의 맨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 알다시피 작가는 권력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위산의 정상에 서서 입가에 살포시 조소가 담긴 미소를 띠며 찬란한 무지개 빛 똥을 누고 있는 것이다. 그 똥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화가의 똥, 그것은 악취가 나는 똥이 아니라, 보기에도 좋은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똥이다. 안창홍의 탁월한 연금술적 상상력은 이제 하찮은 똥마저 지상낙원의 똥으로 바꿔놓고 있다. 그가 벌이는 몸의 담론은 고단한 현실을 떠나 꿈 꿀 수 있는 사회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의 이 그림은 자신의 몸을 빌려 사회에 똥침을 놓는 기발한 풍자가 아닐 수 없다.

게이나 호모와 같은 성적 소수자를 비롯하여 창녀, 부랑아, 양아치, 거지 등등 밑바닥 인생에 대한 안창홍의 관심은 단순히 소재의 차원을 넘어 대상에 대한 진한 애정에 이른다. 사회의 하층 계급에 기울이는 그의 관심은 권력자를 상정할 때 더욱 그 빛을 발한다. 그의 작품세계의 맥락에서 볼 때, 파리는 똥을 먹고 자라는 미물이다. 이 똥과 파리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다. 파리가 새까맣게 모여들어 ‘똥’이라는 글자를 이룬 작품 역시 안창홍의 상상력이 빚은 걸작이다. 파리 역시 사람들이 혐오한다는 점에서 보면, 똥과 구더기의 동열에 오를 만한 미물이다. 그 파리가 창녀, 양아치, 게이의 몸에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다. 안창홍은 이들의 공생관계를 놓치지 않고 관찰한다. 한 쪽은 똥·파리·소수자의 축이고, 다른 한 쪽은 유한마담·부유층·권력자의 축이다.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이 도식은 때로 상보적 관계를 취한다. 그것은 마치 모파상의 단편소설 ‘비계 덩어리’에 등장하는 창녀와 귀부인들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귀부인들의 존재가 독자들의 창녀에 대한 연민을 더욱 자아내는 것처럼, 안창홍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권력자의 존재 때문에 그 처연함이 더욱 돋보인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권력자는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후광처럼 언제나 작품의 배후에 있다.



냄새나고 음습한 사회의 이면, 그것이 바로 안창홍이 주목하는 소재다. 그곳은 정신적이라기보다는 철저히 ‘몸’적인 사회다. 몸으로 하루를 때우는 사람들, 안창홍은 그들에게 한 무더기의 꽃을 뿌려 축복을 한다. 그가 보여주는 ‘퇴폐적인’ 꽃의 향연은 부패한 사회에 던지는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이 ‘썩음’의 미학은 ‘재생’을 전제로 한다. 썩어서 거름이 되는 하층민들, 그들은 똥이 거름이 되어 작물을 소생시키는 자연의 순환법칙을 닮았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파리떼이기도 하다.

안창홍의 작품이 보여주는 똥의 분변학(scatology)은 근본적으로 ‘똥’을 통한 몸의 담론이다. 그것은 철저히 몸에서 시작하여 몸으로 환원한다.

‘밥(input)’과 ‘똥(output)’은 자연의 요체인 동시에 사회의 요체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몸을 지탱시켜 주는 근본적인 요소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1999년 자정을 기하여 ‘밥·똥’을 주제로 밀레니엄 퍼포먼스 쇼를 기획한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역시 자연의 순환법칙을 염두에 두었다. 컴퓨터에서 인간의 몸에 이르는 이 근본 요체가 안창홍의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몇 자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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