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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식론

윤진섭

김찬식 조각의 미적 특질


조각가 김찬식(1932-1997)은 생전에 여섯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또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한 한국 조각계의 원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본격적인 미술사적 연구나 비평적 평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가령, 김영나는 “한국 근대조각의 흐름과 성격”이라는 논문의 말미에서 다른 조각가들과 함께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며, 최태만은 철조각가 송영수에 관한 글에서 김종영, 김정숙과 함께 1950년대 후반에 철조각을 시도한 작가로 김찬식의 이름을 들고 있다.
이처럼 한 작가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결여되었다는 것은, 특히 작고 작가의 경우에 있어서 후대의 평자가 참고할 수 있는 비평적 전거가 여의치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작가의 미술사적 위치나 중요도, 또는 작품이 지닌 예술적 가치와 무관하다. 왜냐하면 작품이 존속하는 한 사후에 얼마든지 재평가될 수 있으며, 새로운 미술사적 자리매김의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김찬식의 경우, 벽제에 있는 목암미술관에 작품의 대부분이 보존돼 있기 때문에 향후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연구의 토대는 일단 마련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찬식은 한국조각사의 입장에서 볼 때 현대조각의 1세대 작가에 속한다. 1950년대 후반, 추상조각의 등장과 더불어 비롯되는 한국 현대조각의 도정에서 김찬식은 서울대학교에서 김종영과 윤승욱의 지도를 받은 백문기, 김세중, 성낙인, 유한원, 장기은, 박철준, 김영학 등과 홍익대학에서 윤효중을 사사한 김정숙, 윤영자, 김영중, 최기원, 전뢰진 등과 함께 전후 현대조각의 가장 맨 앞에 서게 된다.
일제 점령 하에서 시작된 근대조각의 기점은 정관(井觀) 김복진에서 비롯된다. 1920년, 김복진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던 것이 바로 그 것. 그러니까 한국 근현대조각의 족적은 이때를 출발점으로 삼아도 80년을 약간 웃돌 뿐이다. 이 짧은 기간에 한국의 근현대조각은 압축 성장을 하게 된다. 외국의 다양한 조각 사조와 경향을 받아들이는 한편, 재료와 기법에 대한 연구가 뒤따랐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김복진을 비롯하여 문석오, 조규봉, 김경승, 윤승욱, 김종영, 윤효중 등과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한 김정수, 이국전 등이 해방 이전에 일본에서 조각을 공부한 세대라고 한다면, 김정숙은 미국 유학을 통해 익힌 발달된 조각의 기법을 전파하게 된다. 특히 김정숙은 미국에서 배운 용접 기술을 수업시간을 통해 학생들에게 전수함으로써 현대조각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19년생인 김정숙이 서른세 살이란 만학의 나이에 홍익대학 조소과에 입학한 것은 때 마침 개교를 한 1949년. 윤효중에게서 모델링 기법을 배운 첫 제자이자 제1회 졸업생이 된다. 1953년에 졸업을 한 후 이태 뒤인 1955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시시피 대학과 크랜브룩(Cranbrook Academy of Arts)에서 본격적으로 현대조각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그가 귀국한 때는 1957년, 이때부터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1983년 2월 정년퇴임하기까지 학생들을 지도하게 되는 것이다. 김정숙에게서 용접기술을 배운 바 있는 박종배의 증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에 의하면 김정숙이 가르친 용접조각은 이브람 라소(Ibram Lassaw, 1913-2003)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선과 공간의 개념을 강조한 것이었다고 한다.
1958년에 홍익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김찬식이 김정숙으로부터 용접조각을 배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홍익조각50년사>(홍익대학 조소과 간, 2001)에 의하면 53년에 졸업한 김정숙을 필두로 55년에 윤영자, 56년에 김영중, 민복진, 전뢰진, 57년에 배형식, 최기원, 58년에 김찬식, 탁연하 등이 졸업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른다면 57년도는 김찬식이 4학년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김정숙으로부터 용접기법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목암미술관이 발간한 <김찬식의 작품세계>(2004)란 도록에는 김찬식의 1950년대 후반의 철조 용접 작품 4점이 실려 있다. 1956년과 57년 작인 <<성인(聖人)>> 시리즈 2점과 1957년 작인 <<대춘(待春)>>, <<여>>가 그것이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선조의 수직형이다. 인체를 단순화한 이 철조 작품들은 가는 선형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늘로 비상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가운데서 특히 <<성인>>(높이 99cm)은 한 쌍의 선조가 대를 이루고 있어서 훗날 김찬식 조형언어의 기본이 되는, ‘한 쌍이 서로 마주보는 구조’의 원조가 되고 있다. 오늘날 철조각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송영수의 작품을 비롯하여 이 시기에 발표된 대부분의 용접 철 조각 작품들이 대개 수식 상승의 구조로 돼 있어 흥미롭다. 이와 관련된 흥미 있는 사실이 있다. 1956년 9월 <신미술> 창간호의 표지에 실려 있는 데이비드 헤어의 <<청년의 모습>>은 인체를 선조의 형태로 단순화한 것인데, 철 조각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당시의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이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겠는가 짐작해 본다. 물론 이 외에도 인체를 근간으로 한 서양의 철조 용접 작품들 중 소위 수직 상승형의 구조를 지닌 작품들은 많다. 가령, 1930년대의 피카소와 곤잘레스의 작품들 중 많은 수가 수직 상승형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1950년대 후반의 데이비드 스미스의 작품들 또한 수직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의 <여자의 머리(Womans Head)>(1931)를 비롯하여 훌리오 곤잘레스의 <삼각형을 지닌 작은 머리(Small Head with a Triangle)>(1934-36), <큰 모성(Large Maternity)>(1930-33), <머리를 빗는 여인(Woman Combing her Hair)>(1933-36), 데이비드 스미스의 <평면들(Planes)>(1958) 등등이 그 실례로서 김찬식을 비롯한 당시의 철 조각가들이 서적을 통하여 이 작품들의 이미지를 접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앞서 말한 도록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은 김찬식이 다양한 형태의 철조 작품을 제작한 적이 있음을 말해준다. 1964년에 촬영한 이 사진을 보면 의자에 앉아 있는 김찬식의 뒤로 4점의 다른 철조 용접 작품을 볼 수 있다. 고인의 아들인 김성래에 의하면 고인은 1956년에 철조 용접 작품을 시작한 이래 70년대 중반까지 지속했다고 하는데, 현재 목암미술관에는 50년대 후반의 작품을 포함, 63년에서 7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제작한 철조 작품이 10여 점 보관돼 있다고 한다.

김찬식은 철조를 비롯하여 목조, 브론즈, 석조 등 조각의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1978년에 문화화랑에서 가진 제3회 개인전에는 브론즈를 비롯하여 석조, 목조 등이 망라됐다. 1982년에 쓴 이 일의 글은 김찬식 조각의 특징을 주로 목조를 중심으로 다룬 것이다. 이 일은 이 글에서 김찬식을 가리켜 “소박한 인간미 넘치는 심성의 조각가”로 묘사한 뒤 브론즈나 돌의 냉냉함 대신에 나무의 결이 지닌 훈훈한 정감에 더욱 애착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하고 묻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의 지적처럼 김찬식이 나무에만 관심을 집중했던 것은 아니다. 도록 <김찬식의 작품세계>를 참고해 볼 때 브론즈의 비중은 생애의 중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커짐을 알 수 있다. 이 일은 같은 글에서 김찬식의 작품 경향을 분류할 때 연대기적인 서술의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작품의 전개가 단선적인 흐름을 좇아 이루어진다기보다는 ‘동시공존적이거나 과거복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 일의 이 견해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김찬식의 작업 전개의 특징은 선조적인(linear) 진행을 해 나감과 동시에 주제의 변모에 따른 내용과 형식의 과감한 전환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인체’라는 일관된 소재를 통해 작가의 예술적 비전을 재료에 투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는 나무를 다룰 때 목리 즉, 나뭇결을 거스르지 않고 모서리를 예리하게 남기지 않는데, 이는 나무의 푸근한 속성을 잘 살리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에 제작한 일련의 나무 조각 작품들은 나무의 속성에 대한 작가의 이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나무는 돌과 함께 깎는다는 의미에서의 조각의 본령을 대변하는 재료다. 인체라는 주제에 맞춰 의도하는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통나무 덩어리를 깎거나 파들어 가면서 조각가는 시간이 갈수록 인체의 구체적인 형상으로부터 떠나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조각가는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구체적인 인체의 형상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혹은 인간과 관련된 추상적 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것의 내용은 작가에 따라 다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어떤 이에게는 ‘정’이, 그런가하면 또 어떤 이에게는 ‘연민’이나 ‘동정’일 수 있는 것이다. 김찬식의 작품에는 일관되게 ‘정’이라는 명제가 따라 다닌다. 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연인에게 느끼는 애틋한 정일수도 있고 가족애일수도 있으며, 또는 부부애일 수도 있다. 김찬식 조각 형태의 주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쌍의 직립 구조인 점을 상기한다면, 명제 ‘정’이 가리키는 직접적인 대상은 부부거나 혹은 연인 사이에 느끼는 ‘정’일 가능성이 높다.
이 ‘정’이라는 개념화 작업(conception)을 구현하기 위해 고안된 쌍의 구조는 1957년 작인 <<성인>>(높이 45cm)에서 시작하여 1995년 작고할 때까지 갈고 닦여진다. 그것은 1976년의 다소 투박한 느낌을 주는 브론즈 작품 <<희(囍)>>(60x26x12cm)를 거쳐 이태 뒤에 제작한 <<정(情)>>(높이 84cm, 브론즈, 1978)에 이르게 되면 더욱 세련된 형태로 깔끔한 마감질의 솜씨를 보이기에 이른다. <<희>>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웃고 있는 듯한 얼굴의 구체적인 형상에서 인체의 이미지를 제거함으로써 종국에는 <<정>>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인체의 정수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얼핏 쟁기를 연상시키는 두 개의 넓적한 평면을 머리에 이고 있는 방망이 모양의 이 두 개의 기둥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신비스러운 능력은 오직 예술가에게만 부여된 특권이다.
김찬식의 경우에 있어서 이 ‘정’의 개념화 작업은 전 작가적 생애를 통해 추구했던 일종의 화두였다. 이는 다소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작품에 같은 명제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만을 놓고 봐도 입증된다. 비록 그의 작품들 가운데 일부(<<모자상>(높이 10cm, 브론즈, 1978))에서 헨리 무어의 영향이 농후한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유독 그에게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활동을 했던 동시대의 작가들 대다수가 헨리 무어를 비롯한 서구의 유명 작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는 허버트 리드가 고백하고 것처럼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조각적 전통과 단절된 영국의 조각계가 400여 년에 걸친 공백 끝에 헨리 무어라는 불세출의 작가가 태어남으로써 그 공백을 보상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례는 실크 로드를 통해 종이 제조술을 넘겨받은 유럽 사회가 오늘날 동양에 대해 문화적 콤플렉스를 느끼
지 않는 것과 같다.

김찬식의 조각에 있어서 브론즈는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연마된 재료다. 발간된 도록의 삼분의 일 가량이 브론즈 작품에 할애되고 있는 사실은 그의 조각에 있어서 브론즈의 비중이 그 만큼 크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나무에 이어서 생애의 후기에 갈수록 작가의 브론즈에 대한 애정이 깊어갔음을 의미한다. 브론즈나 때로는 브론즈와 유사한 형태를 지닌 화강석 작품을 제작하면서부터 나무 작품에서 보이는 다소 둔중하며 투박한 형태는 날렵하며 세련된 형태로 바뀌어가기 시작한다. 1980년대 초반을 분기점으로 브론즈의 형태는 70년대 중후반의 것과 80년대 이후의 것이 형태나 세련도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나고 있다. 70년대 중후반의 작품들, 가령 <<적(蹟)>> 시리즈(1977-8)가 지닌 둥글넓적한 덩어리와 뚜렷한 구상적 형태를 지닌 <<항아리를 인 여인>>(높이 35cm, 브론즈, 1975), 반구상 형태로 여인을 묘사한 <<여인좌상>>(높이 11cm, 브론즈, 1978), <<모자상>>(높이 10cm. 브론즈, 1978)이 투박한 마감처리와 거친 표면 질감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80년대 초반 이후의 브론즈 작품들은 인체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형태를 바탕으로 매끈한 표면 질감과 깔끔한 마감처리가 특징이다. 이 시기(1980년대 초반-1995년)를 관류하는 브론즈 작품의 형태적 특징은 인체를 연상시키는 유기적 형태를 근본으로 두 개의 기둥이 맞붙은 듯한 쌍의 구조,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상태에서 양끝이 양파처럼 위로 말려 올라간 형태, 가운데에 하나 혹은 두 세 개의 커다란 구멍을 만들면서 이중 혹은 삼중으로 말려 올라가는 수직 상승의 형태 등등 형태상의 다양한 변주가 나타나고 있다.

김찬식의 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미적 특질 가운데 하나는 소위 선적인 요소다. 이는 중심에서 밖을 향해 힘차게 비상하는 듯한 느낌(<<飛>>(66x46x26cm, 브론즈, 1961), <<仙할>>(200x275x50cm, 브론즈, 1988)을 비롯하여 마치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오롯이 모여진 한 쌍의 기둥(<<정>>, 높이 80cm, 브론즈, 1995) 등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김찬식이 창조해 내는 선의 모습은 유기체적 인체의 형태를 나타내되 세부에 있어서는 빨래방망이나 호리병, 술병, 새싹, 알, 그릇, 양파, 등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선은 유려한 곡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마치 관절처럼 잘록한 부분에서는 때로 각이 진 모습을 띠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는 유려하며 부드러운 것이 김찬식의 조각이 지닌 선의 특징이다.
석조는 나무 조각이나 브론즈와 달리 돌을 위한 조각을 했다기보다는 브론즈 소품을 석조로 확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화강석으로 제작한 석조 작품들은 규모가 큰 대신 숫자에 있어서는 가장 적은 편이다.

이제까지 대략 살펴본 것처럼 김찬식의 조각은 철조에서 시작하여 목조와 브론즈 그리고 석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브론즈는 주류라고 할 만큼 수적인 면에서나 작가가 기울인 정성과 비중에 있어서 다른 어떤 재료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후기에 가면서 채색이 가미된 브론즈 작품이 많이 제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서 형태와 색채 그리고 구조에 초점을 둔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한국의 현대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의 본격적인 출범은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이 이루어지던 1957년 전후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조각은 이보다 좀 늦은 시기에 집단화가 나타난다. 그것의 출발은 1963년의 <원형조각회>다. 김찬식은 김영중, 최기원, 김영학, 전상범, 이운식 등과 함께 이 협회의 창립 멤버로 활동을 하게 된다. 이들은 창립선언문을 통해 자신들의 이념과 주의를 표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새로운 조형 행동에서 전위조각의 새 지층을 형성한다.
1. 일체의 타협적 형식을 부정하고 전위적 행동의 조형 의식을 가진다.
2. 공간과 재질의 새 질서를 추구하여 새로운 조형 윤리를 형성한다.

<원형조각회>의 이와 같은 선언은 당시 구상 위주의 진부한 조각계에 충격을 주었다. 전위운동의 주요 요건인 선언문을 통해 전위조각의 발진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상에 맞는 조형실험을 선언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1957년 당시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작가들이 대거 초대된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에 초대됨으로써 실험적인 작가로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김찬식의 초기 실험적 경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한국현대조각사에 나타난 그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 김찬식에 대한 미술사적/비평적 서술은 주로한국의 근현대 조각을 다룬 논문들에서 산견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아주 짧은 서술에 불과하여 작품세계의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관한 미술사적/비평적 글 가운데 가장 긴 것은 이 일의 “생명적 이미지와 그 조형화”(계간미술 21호, 중앙일보사 간, 1982. 3. 71-86쪽)이며, 그 밖에 이경성의 “김찬식의 예술-목조에 담겨진 조형의 시”(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 선집 vol.88 김찬식, 금성출판사, 1979)와 1983년 10월에 열렸던 국제화랑에서의 초대전에 즈음하여 쓴 이경성의 짤막한 서문이 있다.
2) 김영나, 한국근대조각의 흐름과 성격, <20세기 한국미술>, 도서출판 예경, 1998. 42쪽. 최태만, 송영수 조각의 현대성, <거친 쇠붙이에 깃든 영혼-철조각의 선구자 송영수>, 모란미술관 엮음, 아트북스, 2003. 57쪽을 참고할 것. 물론, 이 두 필자의 경우에 있어서 글의 성격이나 흐름상으로 볼 때 김찬식에 관한 서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3) 김이순, 1950-60년대 한국의 용접조각, 계간조각 창간호, 73쪽.
4) 목암미술관장 김성래와의 전화 인터뷰, 2006년 8월 16일 오후 1시 30분.
5) 이 일, 오늘의 작가연구:김찬식-생명적 이미지와 그 조형화, <계간미술 21호>, 중앙일보사, 1982년.
6) 허버트 리드, 예술론, 백기수, 서라사 공역, 경림출판사, 1975,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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