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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짚단 태우듯

윤진섭

내 어렸을 적, 아버지는 겨울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사랑채에 딸린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쇠죽을 끓였다. 아버지는 큰 가마솥에 여물을 넣고 물을 가득 부은 다음, 그 위에 쌀겨를 두어 바가지 듬뿍 끼얹고 짚단에 불을 붙였다. 짚은 바짝 말랐을 땐 잘 탔지만, 눅눅할 땐 매캐한 연기만 낼뿐 잘 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비저 나오는 눈물을 참느라 한쪽 눈을 찡그리며 애꿎은 아궁이 속만 들여다봤다.
“아버지, 왜 안 타?”
어느 추운 겨울 날, 아버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아궁이 속에 든 감자가 나오길 고대하며 내가 이렇게 물으면,
“글쎄 말이다. 짚한테 물어보렴, 왜 안 타나......”
하고는 부지깽이로 죄 없는 솥뚜껑만 탕탕 두들겼다. 그런 날이면 아궁이 속에 든 감자는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먹을 수 있었다. 철이 없었던 나는 오로지 그게 불만이었다.

1970년대 ‘사월과 오월’이 불러 히트한 ‘화(和)’의 노래 가사에도 이 젖은 짚단 이야기가 나온다. “너와 맹세한 반지 보며/ 오늘도 젖은 짚단 태우듯/ 또 하루를 보냈다/ 화(和)가 이 세상 끝에 있다면/끝까지 따르리.......”

젖은 짚단을 태우는 일은 말이 쉽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젖은 짚이 불의 본성에 멀리 있기 때문이다. 물(水)과 불(火)의 관계, 그것을 일러 음양오행으로는 상극(相剋)이라 한다던가. 아무튼 불의 입장에서 보면 짚을 말리면서 태우자니 영 성가신 게 아니다. 한꺼번에 태워버려야 속이 시원하겠지만, 물기가 있으니 그렇게도 못 한다. 그러나 그건 불의 생각일 뿐이다. 반대로 짚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벌이는 단말마적 저항이기 때문이다.

‘단말마적 저항’이라. 한 국어사전은 ‘단말마(斷末魔)’를 가리켜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시(詩)에는 도통 문외한인 내가 얼마 전에 산 낙지를 먹고 나서 먹을 때의 그 꺼림칙한 느낌을 시랍시고 끄적거린 게 있으니, 그 전문을 여기에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근조(謹弔) 세발낙지

그대의 튼실한 건강은
세발낙지의 저 완강한 저항을 무너뜨린 결과다
부드러운 살 속을 파고드는
인간의 저 강인한 이빨과 먹고자 드는 집요한 욕망이
얼굴을 타고 부채 살처럼 퍼지는
세발낙지의 단말마적 저항을 굴복시킨 결과다

그대 아는가
그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세발낙지의 연약한 발을 끊을 때
그대의 크고 강한 어금니가 그 놈의 둥근 머리통을 아작낼 때
그 놈이 과연 무슨 생각을 했겠는 지를,

그 놈은 자신의 마지막 수단인 먹물을 쏟아내면서
피를 토하듯 쏟아내면서
제깐엔 그것도 저항이라고 최선을 다하면서
눈알에 핏발을 돋우고 까무러치면서 조차
속수무책의 저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발낙지의 이러한 저항은
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라도 배워야 할 판,
비폭력 무저항도 저리가라지

파르르 떨리는 그 놈의 신경은
우주를 향해 날리는 마지막 에스, 오, 에스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내는 구원의 신호다

혹시 알리여
우주를 떠돌던 낙지의 영혼이
미래의 어느 날 수소폭탄으로 환생을 하여
이 몹쓸 지구를 작살을 낼 지

그러니 그대여, 앞으로 행여 세발낙지를 먹거들랑
질끈 눈이라도 감아줄 일이다

건방진 이야기 같지만,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나는 산 낙지의 저 ‘단말마적 저항’이 생각난다. 본디 한 뿌리에서 태어났거늘, 왜 무슨 일만 나면 서로 ‘단말마적’으로 싸우고 으르렁대는가. 남과 북이 싸우고, 여당과 야당이 싸우고, 보수와 진보가 싸우고, 남성과 여성이 싸우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싸운다. 우리에게는 젖은 짚단을 태우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나의 아버지는 젖은 짚단을 태울 때, 매캐한 연기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짚단을 말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양손을 이용해 볏짚을 부챗살처럼 좌악 편 다음, 위 아래로 뒤집어가면서 서서히 태웠다. 그러면 짚은 신기하게도 잘 탔다. “아버지, 왜 그렇게 해?” 궁금한 내가 물으면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곤 했다. “젖은 짚단은 살살 달래야 한다.”

살살 달래야 한다! 생각이 없는 미물에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랴. 살살 달랜다는 것은 소통을 시도하는 일이다. 자애한 어머니는 아기에게 젖을 물릴 때도 아기의 기색을 살핀다. 배고프지 않은 아기에게 우격다짐으로 젖을 물리는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자격이 없다. 만일 그럴 경우, 말 못하는 아기일망정 아기는 젖을 토하는 것으로 저항의 의사를 표한다.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은 기나 긴 설득의 과정이다. 거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젖은 짚단을 태울 때의 마음고생을 이겨내고, 매운 연기를 참아내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래야 투정을 부리던 볏짚이 주인의 편이 돼 준다. 그제야 비로소 볏짚은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스스로를 태워 주인에게 보답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으랴. 따끈한 아랫목에 앉아 잘 익은 감자를 까먹는 행복을 느낄 수 있으랴!

몹시 추운 겨울 새벽녘이면 나의 아버지는 매일같이 아궁이 앞에 앉아 쇠죽을 끓였다. 젖은 짚단은 잘 타지 않았다. 그럴 때 마다 궁금한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짚이 왜 안 타?”
그러면 아버지는 어두컴컴한 대문 밖에 눈길을 주며 대답하곤 했다.
“글쎄 말이다. 짚한테 물어보렴. 왜 안 타나.......”

문화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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