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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으면서 찬찬히 보기

윤진섭

속도가 최고의 미덕인 이 시대에 느림의 의미란 과연 무엇일까? 특히 ‘빨리 빨리’ 증후군이 기승을 부리는 우리나라의 경우 이 단어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가장 먼저 배운다는 ‘빨리 빨리’는 어느덧 60년대의 근대화 정책 이후 한국 사회의 압축 고도성장을 상징하는 단어가 돼 버렸다. 이 말의 이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 중에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도 포함된다. 목적만 달성하면 거기에 이르는 수단쯤은 그 무엇이 돼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리라. 글쎄, 과연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위 근대화만 해도 그렇다. 서양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것을 불과 50년에 압축적으로 학습했으니, 그 후유증이 없을 리 없다. 하여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무지막지한 혼란과 덜 세련됨이 압축 성장의 대가로 치루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화가 치민다. 이왕이면 서구의 근대화뿐만 아니라, 그들의 세련된 삶의 태도까지 수입했으면 오죽 좋았을까?

<조우>전의 전시 기획자인 양은희는 제주도의 올레길을 걷듯이 천천히 호흡을 하며 이 문제를 음미할 것을 권유한다. 그는 ‘느리게 걷기, 느리게 보기(Walking slowly, Seeing Slowly)’란 제목의 서문에서 이 느낌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올레길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느리게 걸으면서 온갖 사물과 자연의 조각, 길 중간 중간에 있는 마을의 모습, 그 마을을 이룬 사람들, 전근대, 근대, 그리고 현대 사이 어디엔가 머무르고 있는 제주의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그가 시선을 주는 곳은 제주의 풍경이다. 그러나 그것은 꼭 제주의 풍경이 아니라도 좋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한국의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의 모습이 골고루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양은희는 제주의 풍경을 빌어 인간의 보편적 삶의 양태에 대한 기술과 함께 그러한 삶이 지향해야 할 지점을 더듬는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이 바로 ‘느리게 걷기’의 방식이다. 느리게 걸으면서 느리게 ‘본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멋진 삶의 태도인가. 그것은 또한 지나치게 빨리 삶을 살아오면서 간과한 것들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이른바 근대에 대한 반성이 그것이다.
그의 사유가 오늘날 더욱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까닭은 ‘느리게 걷기’나 ‘느리게 보기’와 같은 삶의 방식들이 미래 우리의 삶의 지향점에 대해 성찰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이 점을 잊지 말도록.

“<조우>는 어느 날 차로만 달리던 길을 발로 걷다가 문뜩 저 멀리 꿩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갈 때 얻는 경험과 같은 우연한 만남을 일컫는다. 이 전시는 이러한 개인적이며 근접한 만남에 주목한다.”

차로 빠르게 달리며 지나친 풍경에서 못 봤던 것들을 느리게 걸으며 본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바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경험이지만, 이를 좀더 확대하자면 여기에는 이른바 근대화와 같은 국가 단위내지는 문명권 단위의 경험도 포함된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국가들이 경험한 지난 백여 년간의 근대화 과정, 그 참혹했던 굴절의 역사를 일개 전시를 통해 반추해 낸다는 것은 과연 미망에 불과할까?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즉, 전시란 작품을 통해 과거를 오늘의 법정에 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바로 그런 관점에서 나는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관찰자이자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는 기획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태국의 작가 아라야 라잠레안숙(Araya RASDJARMREANSOOK)의 영상작업은 소위 근대화를 둘러싼 동양과 서양 간의 ‘조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품으로 나의 관심을 끌었다. 밀레의 ‘이삭줍기’를 바라보는 들판의 태국 농부들, 그들은 과연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할까?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의미의 겹들, 그리고 또한 이 작품을 바라보는 한국 관객들의 해석과 반응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될 다양한 의미의 겹들. 전시란 이러한 순환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의미들을 방출해 내는 기제이니 과연 천천히 걸으면서 찬찬히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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