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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왕국

윤진섭

이미지의 왕국


얼마 전에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Made in Popland전을 보기 위해서다. 작년, 제3회 인사미술제에서 한국의 팝아트 1967-2009전을 기획한 적이 있는 나에게 이 전시는 여러 면에서 색다른 감흥을 안겨주었다. 우선 국립현대미술관의 1, 2 전시장과 중앙 홀의 넓은 면적을 할애해서 배치한 한국, 중국, 일본 등 세 나라 작가들 41명의 150여 작품들에서 기획자의 이 전시에 대한 의욕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회화와 설치, 영상 등 미술의 다양한 매체를 동원하여 현재 아시아 지역에서 ‘팝’이 어떤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것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앤디 워홀 등의 미국 팝과는 어떻게 다른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약 40여 년에 걸친 ‘한국 팝(Korean Pop)’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서술과 함께 과거와 현재의 작품들에 대한 접근을 통해 한국 팝의 정체를 살피고자 했던 나의 기획과는 다른 맥락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이 두 전시를 다 둘러본 관람자들은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두 전시의 두드러진 차이라면 첫째 한국의 팝아트 1967-2009전이 한국의 팝아트만을 다룬 것에 반해 Made in Popland전은 한중일 세 나라의 작가들을 초대한 국제전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전자가 한국의 팝아트 자체에 기획의 초점을 두었던 반면, 후자는 그보다는 팝의‘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에 보다 큰 의미를 두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두 전시를 비교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집필 목적은 아니므로, 우선 이 전시의 기획 의도부터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우선 전시제목부터 흥미롭다. 기획자는 이 전시의 제목을 ‘Made in Popland’라고 붙였다. 이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즉각 ‘Sub Club’이 1991년 소나무갤러리에서 기획한 Made in Korea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제목이 전시의 내용을 다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주는 인상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제목이 혹시 Made in Korea를 은연중 패러디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전시 팜플렛을 뒤적이다가 나의 눈길은 서문 도입부의 한 곳에 머물렀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실려 있었다.

“디즈니랜드는 환상과 공상의 유희이다.....(중략).....그러나 군중들을 끄는 것은 틀림없이 상상보다는 훨씬 더 이곳이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이다.....(중략)....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다.”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전시기획자(기혜경, 이권호)는 ‘Pop land’가 아닌 ‘Popland’라는 신조어를 통해 마치 환상의 땅 디즈니랜드처럼 팝의 땅, 혹은 좀 더 확대하여 팝의 나라가 있는 것 같은 연상 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팝랜드가 마치 영국(England)이나 폴란드(Poland)처럼 일종의 국가와도 같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제목을 생각하면‘Made in Popland’는 예술적 생산물을 비롯하여 현대의 대중소비 사회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팝랜드라고 하는 곳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팝의 속성을 은근히 빗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기획자가 시도한 이 절묘한 작명을 생각하면서 글을 읽어나가다가 나는 다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만났다.

“마치 공기와도 같아서 그로부터 떨어진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되어버린 무한 증식하는 이미지로부터 우리 현대인 모두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는 노인까지, 우주의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철학자에서부터 하루 종일 밭에 나가 노동을 하는 농부까지, 인생을 노래하는 예술가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도, 한 나라를 관장하는 수장까지도 그 층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를 감싸는 저 도도하고 현란한 이미지에 그저 속절없이 노출되어 있을 뿐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이 전시의 출발점이자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도시나 농어촌, 혹은 산간벽지를 막론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무차별로 침투하는 현대사회 속의 이미지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가? 기획자는 이미지 생산의 출처인 ‘대중문화와 대량소비사회’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이번 전시가 “단순히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업이 아닌 대중매체 및 현대사회의 이미지를 재맥락화한 결과를 보여주는 작품들”에 기획의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덧붙여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이 “팝적인 전략을 통해 제작된 방법적인 제한 뿐 아니라 80년대 이후의 한중일 삼국이라는 시, 공간적 제약 속에서 선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기획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제약과 한정은 이번 전시의 출발점이 미술사에 안착한 앤디 워홀식의 팝아트(pop art)가 아닌 우리시대에 부합하는 팝아트(pop art)가 있다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들로 미루어볼 때, 기획자가 생각하는 팝아트의 개념이란 단순히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대중매체에 의해 유포되거나 현대사회에 범람하는 다양한 이미지를 ‘재맥락화’한 결과를 보여주는 작품들에 국한된 것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굳이 비유하자면 단어 자체보다는, 어떤 문장이나 대화에서 그 단어가 나오게 된 전체적 맥락, 즉 발화상황(發話狀況)에 주목하는 일에 비견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맥락주의 입장에서 도출된,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기획자가 맥락주의의 입장에서 해석한 작품들이 이번 전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바로 기획자가 밝힌 것처럼 ‘우리시대에 부합하는 팝아트’에 대한 설정이자 관점인 것이다.

여기서 작가들이 기획자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를 하건 안하건 그것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전시를 기획하는 행위란 작가들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문화적 행위이자 실험이기 때문이다. 전시기획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목표로 하는 가능성과 의미부여 내지는 해석을 도모하는 일종의 기술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작품을 제한된 범주에 가두고 영구히 고착시키지 않는 한, 그것은 늘 열려있어야 한다. 설정된 기획의 주제나 관점, 방향에 따라 작품을 선택하고, 해석하며, 분류하는 일은 전시기획자 고유의 영역이며, 권리이기도 하다. 전시기획자가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전시를 진행하는 노력의 이면에는 당대의 예술과 문화의 발전에 동참한다는 소명의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나름대로 창조적인 일에 헌신한다는 자부심이 버티고 있다.

이 전시를 둘러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전시기획자가 이 전시 방법론의 키워드로 삼고 있는 ‘재맥락화(contextualization)’의 의미가 작가들의 창작태도나 방법론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전시기획자의 의도에 있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밝히기 전에 우선 ‘맥락’이란 말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Websters NewWorld Dictionary’에 의하면 이 단어의 영어에 해당하는 ‘context는 ‘contextus’라는 라틴어에 기원을 둔 것으로 두 가지 이상의 것을 ‘함께 섞어 짜는(to weave together=contexture)’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재맥락화‘란 짜여져 있는 것을 풀어 다른 방식으로 다시 짜는 것을 의미하며, 언어적으로는 기존의 단어나, 문장, 단락, 담론 등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다른 문맥에 전치시키는 일을 가리킨다. 이 일을 전시기획에 적용하자면, 특정한 사건이나 개성, 창작물 등을 기획자 자신이 설계한 전시에 끌어들여 전체적인 계획에 맞게 재배열 혹은 ‘재맥락화’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특정한 양식이나 어떤 기존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관점에 따라 충분히 ‘재맥락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느냐의 여부는 바로 이러한 기획자의 해석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폭넓고 다양한 해석이 가해질 때 문화나 예술은 그 의미가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

Ⅱ. [Made in Popland]는 1980년대 이후 한국과 중국, 일본의 현대미술에 나타난 폭넓은 의미에서의 ‘팝적 현상’을 다룬 전시다. 내가 이 전시를 그렇게 보는 이유는 동북아시아에서의 팝아트가 세계 여느 나라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종결된 역사적 사실이나 양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문화현상이며, 늘 부표처럼 떠다니며 접변(接變)을 일으키는 어떤 흐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아시아에 있어서처럼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식민지배에 기인한 뼈아픈 역사적 경험을 간직한 문화권에서는 민감한 정서적 뇌관일 수도 있고, 내부적으로는 권력이나 지배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대한 저항과 풍자의 표지로서의 대중적 기호 내지는 상징일 수도 있으며, 대중문화를 둘러싼 음험한 자본 게임의 투기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팝아트를 전시의 형태로 다룰 경우, 기획자에게는 이처럼 다면체적 성격을 지닌 문화현상을 조망하는데 필요한 관점의 설정은 물론, 당대의 기술문명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무엇보다도 대중에 대한 명확한 개념의 설정이 요구된다.

대중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곧바로 대중문화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척도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대중을 단순히 피동적인 문화수용자로 보는 시각이라면 대중문화는 단순히 시대의 분비물로서 흘러가는 물결에 지나지 않으며, 반대로 능동적인 창조의 주체자로 보는 시각이라면 대중문화는 하위문화가 아닌 역동적인 주류문화로 편입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가 그러한 시대의 도래를 알려주는 상징적인 미디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의 발명으로 촉발된 그것은 어느 면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일어난 인쇄술의 발명을 훨씬 능가하는 일대 혁명이다.

팝은 태생적으로 대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부단히 생성될 것이며, 미술의 경우 팝적 이미지는 다양한 매체와 여러 경로를 통해 나날이 다른 모습으로 자기 증식을 꾀해 갈 것이다. 특히 요즈음처럼 페이스북(facebook)과 같은 소셜 미디어가 대중들로부터 각광을 받는 상황1)에서 팝은 60년대의 앤디워홀과 같은 전형적인 아날로그적 방식과는 속도라든지 감상 및 소통 방식, 그리고 창작 방법에서 성격과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컴퓨터에 의한 이미지 합성과 변조를 비롯하여 인터넷이나 유 튜브(Youtube), 아이패드, 스마트폰 등등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한 빠른 전파는 팝 문화의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이 폰이나 스마트 폰을 비롯한 각종 모바일 기기와 앱(app)의 관계, 혹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ing service:SNS)의 확산에 따른 전지구촌적인 대중적 참여, 즉 상호작용적(interactive) 상황이 이전의 양상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낳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내용적 팝이 아닌, 형식, 즉 다소 성급한 예단이긴 하나 매체적 팝의 양상이 서서히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 새로운 창조는 손가락 끝에서 나온다(Now new creation comes from ones fingertips).”거나 “오늘날 아이폰이나 컴퓨터 모니터는 일종의 축소된 동굴벽이다(Nowadays Iphone or computer monitor is a kind of minimized cave wall)”라고 말한 의미이다2).모뎀을 이용한 PC통신에서 발원한 이 새로운 형태의 대중예술은 이제 인터넷과 디카, 각종 앱,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등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매체 상호간의 융합을 통해 대중이 창조의 주체가 돼 예술을 생산, 소비, 유통하는 시대가 도래할 전망이며, 그것은 미술이 미술관이나 화랑 공간에서 벗어나 일상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Made in Popland는 그것이 지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점에서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 전시였다. 길이가 무려 24미터에 달하는 스펙타클한 장경을 지닌 전자게임을 통해 인터랙티브한 관객참여를 유도한 펑 멩보의 와 역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 정연두의 <타임캡슐 Ⅱ>, 그리고 관객이 자판기를 통해 실제로 작품을 살 수 있게 한 공성훈의 <예술작품자판기> 등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회화와 설치, 단채널 비디오 등 아날로그 중심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아날로그 형식의 작품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매체가 가져다 줄 인간의 감각의 확장이나 창의성, 그리고 미적 판단과 관련된다. 관객의 판단이나 관객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회화와 같은 고밀도 정보량에 의한 미디어3)가 혹시 야기할 지도 모를 이미지의 독재, 곧 작가의 시선이 적절한 안전장치 없이 그대로 관객에게 주입될 때의 위험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시기획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Ⅲ. 기획자도 밝히고 있듯이 ‘대중의 영웅’, ‘스펙터클의 사회’, ‘억압된 것들의 귀환’, ‘타인의 고통’ 등은 움베르토 에코, 기 디보르, 지그문트 프로이드, 수전 손탁 등의 저술에서 취한 것들이다. 이 주제들은 대량생산과 대중소비, 대중매체로 압축되는 현대사회의 특징이자 이 전시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그것들은 또한 기획자가 동시대 한중일 미술의 세계를 해석하는 틀이자, 1980년대 이후 한중일 삼국에 나타난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사회적 현상을 팝이란 프리즘을 통해 요해하고자 한 수단이기도 하다. 기획자는 이 4개의 주제에 따라 거기에 어울리는 작가들을 초대하고 주제의 표출에 적합한 작품들을 선정했다. 그리고 대중적 시선의 관점, 곧 대중을 중심에 두고 이 전시를 풀어나갔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면면이 말해주듯, 전시는 주제에 걸맞게 잘 구현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각 나라별 미감적 특성이 잘 드러나 있으며, 기획자가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을 통해 끄집어내려 했던 정체성, 일상, 여가, 타자와 관계 등등 앞서 언급한 4개의 주제 범주에 해당하는 키워드들도 전시장에 고르게 스며들어 있었다. 관객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색깔, 다시 말해서 한중일로 대변되는 동북아시아 고유의 미적 범주들의 내용, 즉 골계(해학), 우아, 추(그로테스크, 엽기, 공포) 등은 물론 풍자 내지는 은유와 같은 다양한 표현방법들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획자도 말하고 있듯이 방법적인 면에서 볼 때, 팝아트에 대한 규정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수 있겠다. 기획자는 이 전시를 ‘대중문화와 대량 소비사회의 이미지를 재맥락화 하는 전략을 취하는 작품들’로 구성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작품은 전형적인 팝의 유형을 보이는 작품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의 한 반증이다. 기획자가 이번 전시를 통해 기존의 팝아트와 차별화하려고 했던 것은, 짐작컨대 기존의 팝아트가 지닌 대중적 이미지, 즉 도상 중심이 아니라, 그러한 작품이 나오게 된 사회, 정치, 문화적 배경을 함유한 내용 중심의 작품, 즉 맥락을 중시한 작품인 것 같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기존의 팝아트를 바라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기획의 변)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그러한 작품에 ‘팝’이라는 표찰을 붙일 판단의 근거란 과연 무엇인가. 기획자도 밝히고 있듯이,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미술사에 안착한 사조로서의 ‘팝아트pop art’라고 하기에는 양식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도 훨씬 광범위”해 보인다. 이처럼 스스로 넓힌 개념의 스펙트럼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시대에 부합하는 팝아트pop art가 있다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까”하는, 기획자가 그리는 팝아트의 개념이나 전망이 모호해질 개연성이 있다.

요약하자면, 한중일 삼국의 유명작가 중심으로 짜여진 이번 전시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전시개념의 선명성이 흐려진 것처럼 보인다. 이는 2007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전이 행위미술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보이는 일부 유명작가들을 초대하고 실제 행위미술 현장을 지킨 행위미술의 주역들을 배제한 일에 비견될 수 있다. Made in Popland전은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전처럼 전시 자체는 기획자의 역량이 돋보이는 것이었지만,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의아함과 함께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 전시회였다. 비록 미술작품의 재맥락화에 대한 기획자의 참신한 발상과 거기에서 발산되는 뜨거운 열정이 전시장 곳곳에서 느껴지긴 했지만 말이다.
| 아트인컬처1) 2004년, 당시 이십대 초반의 마크 저커버그가 이 소셜 네트워킹 웹사이트를 구축할 당시만 해도 사회적 효과나 영향력은 미미했다. 그러나 6년 뒤인 현재 페이스북의 가입자 수는 전세계적으로 5억 명에 이른다. 그것은 인구 면에서 볼 때 중국(13억), 인도(11억)에 이어 세계 3위에 달하는 숫자다. 지금 페이스북의 가입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2) 윤진섭, <현실 혹은 가상? 나의 페이스북(facebook) 체험기>, 유럽문화예술학회 논문집(2010) 참조.

3) 관객이 참여하거나 개입할 여지가 없는 미디어의 특성을 가리킨다. 마샬 맥루헌이 말한 핫 미디어(hot media)는 가령 회화와 같은 것으로 그것은 칸막이 구조로 돼 있어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는 만화적 형식보다 훨씬 강압적이다. 만화는 회화보다는 쿨한 미디어이며, 퍼포먼스는 연극이나 무용에 비해 쿨한 미디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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