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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借景)의 미

윤진섭

내가 심문섭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1977년 견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였다. 그는 다섯 번째인 이 전시회를 열면서 당시 사정으로는 꽤 두툼한 편에 속하는 도록을 발간했다. 이 도록은 1970년에서 1977년까지 제작한 작품들 중에서 실험적인 경향의 것들을 골라 자신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이었다. 이 개인전을 갖기 전에 이미 그는 파리비엔날레의 출품작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때 본 개인전의 내용은 캔버스에 사포질을 가해 프레임의 윤곽을 점진적으로 드러낸 시리즈 작품을 비롯하여 철판 위에 시멘트를 수북이 쌓아놓은 다음 철판 사이를 살짝 벌려놓은 것 등 개념적이며 장소론적인 경향의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무렵 심문섭의 작업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자연 속의 사물이다. 이 부분이 최근 중국의 원전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의 작품들과 연계되는 것이다. 그 중 1975년 작인 <관계(Relation)> 연작은 물과 자연석이 어우러진 계곡에 각목을 일렬로 박거나, 바위틈에 각목을 눕혀 놓고 그 끝에 돌 하나를 얹어놓은 것이다. 이 모두는 자연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동화된다는 점에서 자연을 대하는 동양인의 마음 혹은 그 정서를 잘 나타내고 있다.

45년간에 걸친 심문섭의 예술 역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 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진행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의 개념적 측면에서 시작한 작품세계의 요체를 간단히 서술하면, 차경(借景), 즉 풍경을 빌려오는 것이요, 대문의 빗장을 슬쩍 지르는 일과도 같다. 이를 다시 풀어 말하면 신체는 개입을 할 뿐 전적으로 관여하는 일과 거리가 멀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이나 가구, 연장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조각적 형태를 만들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나무로 된 것이다. 80년대에서 90년대에 주력한 <목신(木神)> 연작은 자연적인 요소와 인위적인 요소의 결합을 통해 일견 어수룩하면서도 정감이 느껴지는 그런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문섭의 조각에서는 나무, 철, 돌, 흙 등등 재료가 무엇이 됐던지 간에 차경을 통해 어떤 상황을 연출하려는 의욕이 느껴졌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한국의 전통 건축 공법이나 가구제작법, 조원술(造園術), 축성법(築城法), 혹은 취락구조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의 멋과 맛을 지니고 있다. 그 요체는 한결같이 자연과의 동화(同化), 즉 자연을 벗함이다. 물소리를 들으면 바위를 잊고, 새소리를 들으면 대숲을 잊는 오묘한 경지가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니 그것은 전적으로 풍경을 끌어오는 것에 기인한다.

한국의 사찰 건축에서 흔히 보듯이, 기둥의 길이가 모자라면 돌을 고이는 지혜는 자연에서 인위를 해방시키는 일과 관계가 있다. 자연을 다치지 않으려 하는 지혜는 최소한의 신체적 개입을 통해 자연의 풍경을 빌려오는 일, 즉 차경으로 집약된다. 심문섭의 작품에서 그러한 내음을 맡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그가 점차 노경(老境)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가 완숙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북경의 원전미술관에서 열린 심문섭의 이번 개인전은 어수룩하면서도 실하고, 실팍한가 하면 또 빈 듯한 동양적 지혜의 정수를 조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심문섭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한국의 전통사상인 풍류(風流)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하나가 돼 내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인 상태, 즉, 물아일치(物我一致)의 멋이 작품의 배경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용과 조화를 요체로 한다.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은 자연을 머금으면서도 한편으로 인위의 빗장을 슬쩍 지른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푸른 대나무를 본 듯 했는데, 깨어보니 한가한 평상 위더라. 그 여유, 그것이 바로 심문섭 조각의 참 멋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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