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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문명의 교차로, 터어키를 가다

윤진섭

Ⅰ. 케밥과 치즈, 올리브의 나라 터키
여행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이다. 거기에는 전 감각을 동원한 몸의 기투(企投)가 필요하다. 생소한 음식을 맛보는 것에서부터 돌 하나,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열린 감각으로 대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여로에서 만난 사람들, 수많은 물상들, 다양한 풍광과 관습은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한반도의 세 배에 달하는 광대한 터어키 땅을 여행하며 나는 동서 문명의 교차로에 해당하는 이곳의 지정학적내지는 문화사적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비록 주마간산 격의 여행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내게 주는 의미는 매우 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위 동양(東洋)이라고 하는 관념의 실체를 거기서 확인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동양이란 과연 무엇인가? 터키를 둘러싼 나의 여행기는 이처럼 간단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어느 글에선가 나는 아시아의 서쪽 끝을 터키로 설정했다. 전 세계 인구 60억의 삼분지 이에 해당하는 아시아는 동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중국과 몽골, 남으로는 동남아시아로 부르는 아세안(ASEAN)이 있고, 서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이 존재한다. 그 끝, 유럽의 교차점에 터키가 있다. 터키는 서구와 아시아라는 이 두 거대 문명권의 중간에 위치하여 시쳇말로 ‘퓨전(fusion)’의 원조 격이 된다. 아시아 문명권을 상징하는 밥과 서구 문명권을 상징하는 빵. 이 둘을 합친 것이 있다면? 나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이번 여행 중에 신물이 나도록 먹었던 ‘케밥(Kebab)’을 들고 싶다. 원래 ‘꼬챙이에 끼어 불에 구운 고기’를 뜻하는 케밥은 중국요리, 프랑스 요리와 함께 세계 3대 요리에 속한다. 여행 중 식사를 하면서도 언어를 중시하는 나의 특이한 연상법은 즉각 케밥의 ‘bab’에 머물렀고, 그것이 우리말의 ‘밥’과 같은 것이라고 아전인수 격의 해석을 내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터키의 식사에는 빠짐없이 빵이 나오는데, 8박 9일 동안 내가 먹었던 케밥에는 닭고기, 쇠고기, 양고기 등 다양한 고기요리와 함께 밥이 곁들여졌기 때문이다. 밀의 주요 생산국인 터키의 빵은 매우 부드럽고 맛이 있었다. 케밥은 빵에 밥과 고기, 그리고 야채샐러드를 싸서 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마치 우리의 비빕밥처럼 다양한 식재료들이 어울려 우러나는 그 나름의 독특한 맛이 난다. 이른바 퓨전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도 다문화가 형성되면서 홍대 앞 등 젊은이들이 모이는 길거리에 숯불식 회전구이인 되네르 케밥이 자주 보이는데, 이는 길이 약 80센티 정도 되는 쇠꼬챙이에 양념한 양고기를 겹겹이 쌓아 낫으로 깎아내는 것이다. 긴 빵에 각종 야채와 깎은 양고기를 넣어 샌드위치처럼 만들어 주는데, 이는 대표적인 유목문화의 산물이다.

Ⅱ. 동서 문명의 교차로/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의 혼합
터키가 아시아의 냄새를 풍길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터키는 완전히 유럽에 가까웠다. 이 점은 여행을 하는 동안 누차에 걸쳐 확인된 사항이지만, 터키 사람들의 외모와 건축양식, 삶의 방식, 음식 등을 통해볼 때 그것은 분명해 보였다. 실제로 터키는 유럽국가연합(EU)에 가입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것은 터키의 희망사항일 뿐, 그것이 언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독일, 프랑스, 그리스가 터키의 가입을 반대하는 이면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1297-1922)의 오랜 유럽 지배와 관련된 모종의 심리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첫 여행지인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가운데 두고 에게해와 흑해를 잇고 있다. 비잔틴 제국 시절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고도(古都)이다. 거리 곳곳에는 로마제국시대에 쌓은 고성의 잔해들이 즐비하다. 고대와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이스탄불 시가지는 가히 동서 문명의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비롯하여 술탄 아흐멧의 사원 블루 모스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톱카프 궁전, 로마시대의 수로 등 도시 전체가 문화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터키인 남자들은 짙은 눈썹에 검은 머리, 건장한 신체가 특징이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유럽인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유럽화한 사람들이 많다. 여자들 역시 금발에 흰 피부를 한 미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터키 남자들의 신체가 건장하다는 사실을 화장실에서 확인한 것은 의외였다. 내가 간 터키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 높이는 한국의 그것보다 반 뼘 정도는 높아서 소변을 보는 동안 내내 나는 발 뒷굼치를 드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터키 남자들은 왜 신체가 건장한가? 거리 곳곳에서 만난, 마치 역사(力士)를 방불케 하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던 기마 유목민의 용맹한 모습을 떠올렸다.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의 역사를 배우면서 만난 적이 있는 돌궐족(突厥族), 즉 투르크(Turk)가 바로 그들의 조상인 것이다. 투르크는 ‘용맹한 사람’을 뜻하는 ‘투룩치’에서 유래한다 하니까 용맹한 사람이 기골이 장대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영화를 연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터키를 동양, 즉 아시아의 서쪽 끝으로 간주했던 나의 설정은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가. 아시아와 연관된 나의 담론과 전시기획의 대체적인 구상은 언어학적으로는 우랄 알타이족의 이동, 인류학적으로는 몽골리안 루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로부터 부챗살처럼 퍼져나간 우랄알타이족의 다섯 개 이동경로 중 하나가 바로 터키까지 이어진 것이며, 언어적 측면에서 볼 때 터키어는 알타이어 계통에 속한다. 1920년대에 우랄 알타이 산맥 지역을 탐험한 요헬슨(W. Jochelson)에 의하면, 터키의 본고장은 몽고와 시베리아에 걸친 알타이 지방이었다. 우리말은 퉁구스어에 속하는데, 이는 원래 우랄과 알타이 산맥에 거주하던 몽골리안들이 다양한 루트를 타고 퍼지면서 유사한 언어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터키의 전통음식 케밥(Kebab)에서 우리말의 ‘밥’을 떠올린 나의 연상은 그럴 듯 하지 않은가?
문화사적으로 볼 때 터키의 고대문화는 해(日)를 섬기는 아시아의 문화권에 속한다.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촌락 유적은 사탈 후육의 어떤 집안에서 무당들이 굿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새로 분장한 무당의 모습은 해의 신으로 해석된다. 고 박시인 교수의 <알타이인문연구>에 의하면 이는 새와 관련해서 중국, 한국, 일본에서 광범위하게 보이는 난생설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또한 천지창조와 관련하여 성경과 알타이신화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동서 문명의 교차점으로서 터키의 지정학적 위치는 내게 문화의 융합과 관련해서 하나의 암시를 주었다. 이른바 웹(web)을 기반으로 한 전 세계의 통합과 장차 그 속에서 전개될 문화적 다양성의 혼재, 그러면서도 상호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전 세계에 걸쳐 6억 명의 가입자 수를 보유하고 있는 ‘얼책(facebook)’과 같은 사회적 관계망(SNS)은 장차 인류가 점차 열린 소통의 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특히 아이폰을 비롯하여 스마트폰, 아이패드와 같은 유목적 성격의 통신기기들은 이동하면서 소통할 수 있는 문명의 패러다임 쉬프트를 상징한다.

Ⅲ. 유목의 시대에서 정주의 시대로
8박 9일에 걸친 이번 터키 여행은 이스탄불에서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를 거쳐 카파토키아, 지중해의 관문인 안탈랴, 로마시대의 고대 유적지로 유명한 에페수스, 일리어드 속의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트로이를 거쳐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약 2천 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경에 ‘에베소 서(書)’로 표기된 에페수스의 고대 로마 유적지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금부터는 주마간산 식으로 간략히 인상만을 기술하고자 한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건국대통령인 아타튀르크 묘지를 스치듯이 지나친 뒤 바로 카파토키아로 가는 실크로드로 접어들었다. 길은 곧고 잘 포장돼 있었다. 광활한 대지와 평원의 연속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누런 밀밭이 인상적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한 시간 이상을 일자로 쭉 뻗은 길을 달려야 한다니 버스 기사의 고충을 알만 했다. 누런 평원에는 이따금 송전탑이 나타날 뿐 마을이나 도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끔씩 양떼를 몰고 가는 유목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원래 투르크족의 조상은 유목민들이었지만 지금 대부분의 주민들은 정주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사는 집은 유럽풍의 붉은 기와를 얹은 이층집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서 볼 때의 모습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시골집들은 대부분 낡고 허름했다. 무너진 집들은 가장 현대적인 대도시인 이스탄불 시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터키를 속단해서는 안 되리라. 경제적으로 터키는 급속히 발전하는 중이며 시민들의 표정은 편안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일이 잘 돼도 “인슈알라!” 못 돼도 “인슈알라!”하고 외치는데, 우리말로는 “알라 신의 뜻대로!”라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다.

터키는 이슬람교 신자가 전체 국민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이슬람 문화가 강한 나라다. 도시와 마을의 곳곳에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과 돔이 눈에 띄고, 기도 시간이 되면 코란을 읽는 아잠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온다. 그러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사원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사원 입구에 마련된 세면대에서 발을 정성껏 씻고 다시 양말을 신은 다음 사원 안으로 들어가 메카 방향을 향해 절을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암굴이 있는 괴석의 집합장인 카파토키아로 가는 중간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소금 바다를 만났다. 터키 내수의 소금 70%를 생산하는 염호는 길이가 80킬로미터에 달한다. 수평선 중간에 자주색 띠가 보이는 광경이 인상적이었는데 해변의 소금은 둥글고 굵었다.
쥘 베른의 소설을 영화화한 <80일 간의 세계일주>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생긴 열기구를 카파토키아에서 탔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풍선은 매우 거대했다. 직육면체 모양의 바구니에는 20명이 탑승할 만큼 크고 넓었다. 가스의 열에 의해 움직이는 그것은 서서히 이륙을 하여 한 시간 동안 카파토키아 상공에 머물렀다. 50여 개는 실히 돼 보이는 각양각색의 열기구들이 떠다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눈 아래에 전날 봤던 기암괴석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괴레메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산과 괴석들에는 석굴 교회와 기도실이 있었다. 멀리서 보니 그것들은 마치 총탄을 맞아 구멍이 뚫린 암벽 같아 보였다. 너무 많이 뚫린 곳은 흉측해 보였다. 비록 이슬람교도의 박해를 피해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만행이었다. 이 일대는 용암의 분출로 형성된 원지형이 오랜 시간에 걸친 침식작용과 풍화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다양한 형상의 기암괴석이 즐비한 곳이다. 이유야 어떻든 명백한 자연파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열기구는 어느새 버섯 모양을 한 세 개의 큰 바위로 유명한 파샤바 계곡 위를 지나고 있었다. 동쪽을 바라보니 어느 새 동이 텄는지 하늘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데린구유는 8세기 경 이슬람 교도의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이 이룩한 지하 교회도시다. 지하 120미터까지 파 들어간 그곳에는 방만 1200개에 달한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사방으로 뻗은 길은 미로였다. 나는 겨우 기어갈 정도로 좁은 미로를 지나가며 묘한 상상에 빠졌다. 이야말로 중세판 사이버 월드가 아닌가. 죽 뻗은 대로가 아닌(linear) 뿌리를 닮은 리좀적(rhizomatic) 구조의 표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얼책(facebook)처럼 6억 개의 독립된 방들(cells)로 이루어진, 사이버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로가 만들어낸 네트워크. 중세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적의 침입을 알렸을까? 직경이 넓은 통로의 군데군데에 우리네의 연자 맷돌을 연상시키는 큰 돌이 설치돼 있는 것으로 봐서 다양한 응전 방법이 구사됐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데린구유는 비록 깊은 지하도시지만 공동체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시설을 구비하고 있었다. 광장과 감옥도 있었고 공동우물과 주방, 시체안치소도 있었다. 환기구와 기상을 관찰하기 위한 시설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데린구유는 인간의 창의력이 잘 발휘된 곳처럼 보였다.

Ⅳ. 파묵칼레와 에페수스를 가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성서상 이코니온이며 메블라나 종파의 총 본산인 콘야를 거쳐 지중해의 휴양도시 안탈랴로 향했다.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은 절경이었다. 버스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을 마치 곡예를 하듯 잘도 나갔다. 길은 관광대국답게 잘 포장돼 있었다. 아마도 바깥은 후끈하게 달궈진 냄비 속 같을 것이다. 창밖에 눈길을 주니 눈에 익은 나무들이 보인다. 소나무였다. 풀이 죽은 것이 우리네 것과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순간, “소나무는 역시 우리 것이 최고지.” 하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타우루스 산맥을 이루는 산들은 자체가 바위 덩어리였다. 꼭 시루떡을 비스듬히 기울여놓은 것처럼 생겼다. 타우루스 산맥에 도달하기 전, 꼭 떡 덩어리처럼 몽글몽글 응어리진 관목 숲이 이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풍경이 바뀌어 잘 생긴 나무들이 빼곡 들어찬 계곡들이 나타났다. 한 그루에 일억이 넘는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역시’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고 보니 보는 눈은 세계 공통인 것 같다.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회 온천 휴양지 파묵칼레로 가는 길은 멀었다. 안탈랴에서 4시간 반이나 걸리는 거리다. 일찍이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에서 배를 타고 안탈랴에 도착, 육로로 찾은 곳이다. 그 길을 가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노예들을 동원했을까? 신하들은 또 얼마나 수행을 하느라 힘이 들었을까. 혹시 수십만의 노예를 동원, 그들을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터키산(産) 카펫을 깔아 가마를 타고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터무니없는 상상력이 여기에 미치는 사이 버스 창문으로 흰 언덕이 멀리 보였다. 말로만 듣던 파묵칼레였다. 멀리서 보면 눈이 덮인 것처럼 희게 보이는 그곳은 석회암이 녹아 형성된 천연 욕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적당한 온도의 물이 흘러나와 목욕을 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주변에는 야외음악당과 각종 시설물을 갖춘 로마시대의 전형적인 고대도시의 형식을 보여주는 유적지가 널려 있었고, 당시의 미술품을 전시한 미술관도 있었다.

성서에 에베소서로 표기된 에페수스는 속국에 건설된 로마시대의 고대도시 양식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아직 복원 중이었으나 현재 발굴, 보수된 것만으로 미루어 봐도 당시의 영화와 도시의 번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구가 20만 명에 달했다는, 당시의 실정으로는 거대도시였을 에페수스는 야외음악당을 비롯하여 공회당, 도서관, 공중목욕탕, 상가를 갖춘 잘 짜여진 계획도시였다. 그 중에서 특히 상가의 바닥은 형형색색의 모자이크로 이루어져 호화스러운 당시의 시장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셀수스 도서관의 건축미는 장엄했다. 이 건물은 기원후 135년 경, 로마의 소아시아 총독을 역임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폴레마에누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칼리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아가 건립을 한 것이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실제 실내가 그리 크지는 않다. 건물의 앞쪽은 복원이 거의 이루어졌지만, 건물 기둥은 코린트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의 절충을 보여주고 있다. 두 개의 기둥 사이에 지혜(Sophia), 미덕(Arte), 통찰(Enoia), 지식(Episteme)을 상징하는 여신상이 서 있다. 이 여신상들은 복제품으로 진품은 1910년 발굴 때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반출되었다.
반면에 마지막으로 들른 트로이 유적은 영화 <트로이>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 커서인지 볼 만한 것이 별로 없어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가이드가 ‘허무 관광’이라고 부른 것과는 달리, 신화 속의 도시에 불과했던 트로이를 발굴하여 햇볕으로 끌어낸 독일 출신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노력을 생각하며, 아직 지하에 잠들어 있을 고대의 유적을 현지에서 상상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각별한 경험이었다.

<아트인컬쳐, 201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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