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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그러나 예리한 비평적 안목의 소유자 - 고(故) 김인환 선생을 기리며

윤진섭

일생을 통해 한국 미술평론의 발전에 헌신해 온 김인환 교수가 지난 달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뵙고 옛날의 화단 모습에 관해 귀중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처럼 허망하게 돌아가시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15년간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에 봉직한 교육자요, 1960년대 초반부터 이 땅의 미술비평 형성에 기여해 온 미술평론가, 또 한 때는 문인이자 시사만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다재다능한 예술가이기도 한 선생은 홍대에서 미술을 전공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에게서는 낭만적인 정취가 물씬 풍겼다.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인, 그에게 붙여진 별칭만큼이나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였고, 이 땅의 예술을 아꼈다. 그런 선생이 가시다니 과연 어디서 다시 그 모습을 뵐 것인가.
내가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75년이었다. 당시 이대입구에 있는 육교 옆 신촌화방 골목에 K아뜨리에가 있었는데, 그곳은 김종일 전남대 명예교수(당시 영등포공고 미술교사)가 운영하는 작업실 겸 입시미술 학원이었다. 당시 막 홍대 회화과에 입학한 나는 영등포공고 교무부장으로 있던 자형의 소개로 K아뜨리에 강사로 취직을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곳에서 유명한 미술인들을 만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고(故) 김인환 선생도 그 중 한 분이었다. 바바리코트가 잘 어울리는 선생은 가끔씩 저녁 무렵 아뜨리에에 들려 학원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가 친구들과 함께 술집 순례를 시작하고는 했다.

그 후 선생을 다시 뵌 것은 1990년 내가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미술평론가로 데뷔한 이듬해에 열린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총회 자리에서였다. 그 때만 하더라도 미술평론가협회의 가입자격은 데뷔 후 1년이 지나서 부여되던 시절이었다. 인사동의 한 한정식 집에서 총회가 열렸는데, 김인환 선생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회장인 고(故) 이일 선생을 비롯하여 유준상, 이구열, 오광수 등 원로 및 중견 비평가들의 모습이 보였다. 선생은 평소처럼 술잔을 나누면서 동료들과 옛일을 회상하였다.
화단사적으로 볼 때, 선생은 1969년에 창립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에 이일, 오광수선생과 함께 비평가로서 동인으로 참여한 선구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는 전위미술 단체로 당시의 회원들 전원이 70세가 넘은 현재까지도 현역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탄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만큼 멤머 구성이 확실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와 함께 는 한국 현대미술사에 뚜렷한 전위적 족적을 남긴 전위미술 단체였다. 그러한 단체에 선생은 비평가로 참여, 선생의 비평적 업적 중에서 또 하나 강조돼야 할 것은 광주, 전남 화단의 발전에 기여한 일이다. 1981년,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부임한 선생은 예리한 평필로 화단을 리드하였다. 원래 예향이라 일컫는 광주 화단은 예부터 묵향(墨香)이 짙은 곳이다. 많은 서예가들과 문인화가들이 있어 남도 특유의 남종화가 지배적인 곳이다. 또한 조선대학 설립 초창기부터 후진을 양성한 오지호 화백을 비롯하여 임직순, 고 진양욱 교수 등이 인상파 화풍을 수립, 광주 전남 화단은 이 화풍이 깊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그 반면, 현대미술의 다양한 유파와 사조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지역이다. 선생의 업적은 미술평론가로서 현대미술의 다양한 유파와 사조를 제자들에게 교육시킨 사실에 모아진다.

광주에 기거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서울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미술평론가로서 선생의 활동이 위축됐던 한 요인이다. 이 점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국전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미술대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 등 각종 공모전과 서울시 문화상 등을 비롯한 각종 위원회에 심사위원과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미술협회 평론분과 위원장과 미술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 평론계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선생은 비단 국내 비평계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81년 카뉴 국제회화제에 커미셔너로 활약을 하였고, 1989년에는 한중문화세미나(중국 예벤 사회과학원)에 참가한 바 있으며, 1990년에는 구 소련 레닌그라드 아카데미(현 페테르부르크 레핀대학) 세미나, 1993년에는 푸에르토리코 상환시에서 열린 제 37차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총회에 참가하여 한국의 미술비평을 해외에 알렸다. 2009년, 한국미술협회는 이러한 선생의 업적을 기려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행사에서 평론부문 본상을 수여하였다.
선생은 유난히 낭만적인 정취를 즐겼다. 나는 밤중에 한적한 인사동 거리에서 한 잔 술에 얼큰히 취해 걸어오시는 선생을 만나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 때 무엇이 급해 선생께 약주라도 한 잔 대접해 드리지 못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 아쉬움을 선생의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가서 소주를 앞에 놓고 긴 시간 나눴던 대화로 달랜다. 그리고 그 다감했던 성품과 고매한 인격을 후배 평론가인 이경모가 쓴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해 전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예술이란 삶의 일부이며 생활의 연장으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가들의 무덤 순회를 좋아하는데 반 고흐(Van Gogh)의 무덤을 들를 때마다 그 짧으나마 치열하게 살다간 영혼 앞에서 전율 같은 것을 느낀다. 만주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에 들렀을 때는 그 결벽증에 가까운 시인의 순수한 영혼 앞에서 나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일찍이 러시아 작가 푸쉬킨이 평론가라는 직인을 일컬어 ‘말꼬리에 붙어 다니는 파리’ 정도로 비하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폄하 받는 직업이라 하더라도 문화 창조에 다소나마 도움을 준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이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크게 내세울만한 실적도 없이 허둥대며 지내왔다는 자괴감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남은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으나 이제부터라도 본질을 찾아 겸허하게 자성하는 자세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미술평단 201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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