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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

윤진섭

 
미술대학에 입학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햇수를 헤아려보니 어언 40여 년이 가까워온다. 70년대 중반, 그 한없이 춥고 어렵게 느껴지기만 하던 시절에 보낸 많은 날들이 이젠 한낱 추억거리에 불과하다니, 세월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인가.

보릿고개를 실감하던 그 시절에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신적 호사였다. 아니 박물관과 미술관이란 말 자체가 생소했다. 국립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정도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절이었으니 왜 안 그랬겠는가. 그런 그 때를 회상하면 지금처럼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의 홍수는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의 국력신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각종 박물관과 미술관의 설립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것이 바로 문화예술의 향수다. 이는 달리 말하면 배가 고프면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금강산이라도 넉넉하게 배를 채운 연후에 천천히 즐기라는 뜻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속담에서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를 느낀다. 미적 경험의 요체를 이 짧은 말처럼 잘 담아내고 있는 것도 드물다.

지난 50여년에 걸친 격동의 한국 현대사도 따지고 보면 배고픔에서 배부름으로의 이행 과정이었다. ‘조국근대화’, ‘백억 불 수출’, ‘잘 살아보세’와 같은 귀에 익은 슬로건들은 70년대의 한국 사회를 장식했던 수식어였다. 그 아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고, 그 위에서 우리의 국부(國富)가 서서히 싹을 틔웠다.
그 국부를 바탕으로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립박물관과 미술관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80년대 초반의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 이후에 선진외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미술품을 꾸준히 모으기 시작했다. 현재 약 8백여 개에 이르는 전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우리나라의 문화적 역량이 크게 신장되었음을 말해주는 지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특히 지나치게 겉모양에 집착하는 우리의 습성은 자칫하면 내용을 간과할 위험을 지니고 있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 비록 크지 않아도 아기자기한 내용을 갖춘 박물관과 미술관, 무엇보다 스토리가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만드는 게 더 긴요하다. 한글과 거북선을 만든 우리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특색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건립이 요구된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대다수의 지역 축제가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비판은 창의성과 상상력의 빈곤을 말해주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어디 축제뿐이랴. 전국의 사립박물관과 미술관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인 경우가 태반이다. 소장품에서 작품 진열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차별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신화나 설화는 상상력의 소산이다. 이야기는 창의력과 상상력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과거의 유물과 창의력의 소산인 예술품을 가지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꾸밀 유능한 스토리 텔러(큐레이터)를 육성하는 일은 분명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한국박물관협회 뉴스레터. 2011.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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