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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과의 대화 - “단색파를 둘러싸고”

윤진섭

단색파 혹은 단색화란 무엇인가? 1970년대 초반 당시 어두운 군부 통치하에서 발원하여 현재까지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이 유파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이 흐름이 현재진행형이며, 태도 여하에 따라서는 새롭게 변신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열린 개념이지 닫힌 개념이 아니라는 점도 이 흐름의 향배를 속단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우환은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한국 단색화의 형성과 국제 교류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1969년 <사물에서 존재로>라는 논문으로 일본 미술출판사 주최의 예술평론상을 수상하면서 작가 겸 미술평론가로 일본 모노하(物派)를 주도한 바 있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는 [한국의 단색화전]을 계기로 단색화와 관련된 이우환의 생각과 회고담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인터뷰는 팩스를 통한 서면 형식을 취했다(편집자 주).

-윤진섭(이하 ‘윤’으로 표기): 우선 선생의 이번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을 축하한다. 이번 전시는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 본격적으로 입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선생의 해외 활동이 프랑스 파리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 집중됐던 점에 비쳐볼 때, 이는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전시를 마치신 소감을 간단히 말해 달라.
-이우환(이하 ‘이’로 표기): 나의 작품은 수련과 절제에 의한 단순의 극치에 속하는 것들인데, 낯설고 무딘 사람들에게 의외로 신선한 만남과 충격을 준 것 같다. 관람객들에게서 당신의 작업은 미술의 미래를 암시하는 ‘감성의 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공동체의 권력을 떠나 자연과 신체로 무장한 마이너리티로서 하이테크놀로지와 버추얼 아미지 정보와 맞서 싸운 보람이 있었다.

-윤: 선생은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지금까지 줄곧 일본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술사가인 김영나 교수는 한 논문에서 그런 당신의 삶이 동양과 서양이 교차하는 초국적 공간에서 빚어진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것으로 봤다. 일종의 디아스포라적 관점에서 본 것인데......여기서 ‘불안정하게’*라는 말이 눈길을 끈다. 이는 작가로서 선생의 삶과 이에 따른 예술가적 정체성의 문제가 생각만큼 간단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 오랫동안 많은 여행과 다양한 상황에 처해 살아오면서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즉 ‘불안정한 위치’에서 불협화음을 자아내는 사고가 몸에 배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고 여기에 인류의 미래가 암시돼 있다고 믿는다.

-윤: 김영나 교수는 같은 논문의 서두에서 한 일본인 미술사학자가 파리에서 열린 선생의 전시회 설명문에 한국인으로 국적이 표기돼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하더라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 분은 아마 당연히 일본으로 국적이 표기될 줄로 알았던가 보다.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는 일본에서 활동하기가 여러모로 불편하셨을 터인데, 귀화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말씀해 달라.
-이: 일본에서 한국 국적을 갖고 활동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특이한 소외의식이 나로 하여금 세계에서 뛰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여권은 마이너리티의 상징이자 나의 자존심이다.

-윤: 박서보 선생의 말에 의하면 1968년에 일본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 오프닝 날 윤명로, 김종학 선생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박 선생은 그 때 선생의 작품이 핑크, 그린, 코발트 블루 등 형광색을 스프레이를 써서 제작한 것으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생은 이 작품들이 본격적인 의미의 단색화라고 생각하는지. 또 단색화와 관련해 볼 때 이런 경향이 최초로 나타난 때는 언제이며, 당시 서구의 미니멀 아트 등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는지, 주변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 주기 바란다.
-이: 내가 단색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1964년 무렵이었을 것 같다. 그때의 100호(검정 돌가루로 밑그림을 새까맣게 지운 것) 그림이 우연히도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고 들었다. 그 그림 외에도 66-67년경에 한지(일본종이)를 손으로 문지른 작업이라든가 붓에 먹물을 묻혀 한지에 수많은 구멍을 낸 작품도 했다. 이런 계열 작품이 일본 동경국립근대미술관을 비롯하여 미국의 콜렉터에게 소장돼 있다. 그런데 그 작품들이 ‘단색’이란 의식은 별로 없다.
1968년 동경국립근대미술관 주최 [한국현대회화전]에 출품한 300호 세 장의 형광안료에 의한 작품은 분명 모노크롬이다. 이것은 당시 유행했던 시각 부정의 미국 옾아트의 영향이자 그 일본판인 착시현상 미학의 영향이기도 하다. 후일 이 착시현상(트릭)을 뒤엎는데서 모노파가 형성된다(이세득 선생 화실에 1968년 형광안료에 의한 핑크색 100호 작품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드렸으니까).

-윤: 내가 미술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중반은 ‘이우환 열풍’ 혹은 ‘이우환 신드롬’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선생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나 역시 공간지에 번역된 ‘만남의 현상학적 서설’을 밑줄을 그어가며 읽던 기억이 난다. 당시 선생은 1972년의 [제1회 앙데팡당전]에서 파리비엔날레 참가 작가 선발을 위한 심사를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山本 孝) 사장과 함께 했는데, 그때 이동엽 선생이 회화 분야 1석, 허 황 선생이 2석을 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미술사학계에서 제기된 내용 중에 야마모토 사장이 특히 이동엽의 <컵>에 주목한 이유는 그의 작품이 한국의 백자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의 견해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비애론’에 결부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는 게 사실이다. 당시 직접 작품을 본 당사자로서 이 점에 대한 의견은 어떤가? 또한 이를 계기로 1975년에 동경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 이후 한국의 단색화 중심의 전시들이 연이어 일본에서 열리게 되는데 그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특히 1977년에 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은 미술수첩 9월호에서 특집 대담으로 다뤄질 만큼 반향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대담에서 선생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당시의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달라.
-이: 1970년대 초까지 한국의 현대미술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바는 없다. 일본 말이 능통하고 일본과 인연이 있는 세대 작가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남관, 이세득, 권옥연, 윤효중, 박노수, 임직순, 등등. 그러던 것이 1968년 여름 동경국립근대미술관 주최 [한국현대회화전]을 계기로 박서보 선생을 위시하여 젊은 작가들이 일본에 오게 되고 일본 예술계가 차츰 한국 현대미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 작가들을 권유하여 일본에 소개하고 일본의 비평가, 작가, 화랑 주인들을 한국으로 안내하여 작가나 화랑을 소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는 당시 일본 작품을 한국에 소개한 적은 없지만 70-80년대 초반까지 수많은 한국 작가의 전람회를 도쿄에서 꾸몄다. 개인전이건 그룹전이건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었으며, 한국의 창구는 박서보 선생으로 무엇이든 누구든 박서보 선생과 상의해서 결정했다. 어쩌면 이런 사정이 후일 박서보 선생이 만든 [에꼴 드 서울]에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앙테팡당전]의 인상은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일본 단체전의 현상이나 별다를 게 없었다. 전위적인 시도의 작품도 꽤 보였으나 너무 외국작품을 연상케 하여 클로즈업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몇 작가를 들먹였으나 야마모토 씨는 관심 밖이었다. 야마모토 씨의 눈길을 끈 것은 이동엽과 허황으로 상징되는 엉거주춤한 회화였다. 야마모토 씨는 그런 작품에서 보이는 때 묻지 않은 감성과 표현력이 신선하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 물질적이고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림자 같기도 한 애매한 이미지가 회화의 가능성을 예감시켰던 모양이다.
야마모토 씨의 머리 속에 일본의 다카마츠 지로가 떠오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야마모토 씨가 이동엽 작품이 백자를 연상케 한다고 한 것은 사실이나 이 말은 후일 나온 것이고 그 작품이 백자 같다하여 뽑힌 것은 결코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 작품이 좋다는 것은 현대회화로서 발상이나 방법이 신선하고 훌륭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이니 야나기 어쩌고 하는 식의 시각 자체가 어이없는 몽상이다. 나는 야마모토 씨의 생각이 야나기의 비애론과 결부된다고 보지도 않지만, 야나기의 선(線) 중심의 비애론이 그렇게 부정적으로 비치지도 않는다. 그 영향이 커서인지는 몰라도 한국미술에 평생을 바쳐온 고유섭이나 최순우, 정양모 같은 문필가의 심성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톤은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누구도 한국미술의 생명감 넘치는 역동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근원적으로 예술의 깊은 곳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삶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갈등이 깔려있고, 그래서 우주적인 초월의 불가능성에서 오는 아픔이나 비애가 표현에 나타날 때 저항의 형태나 해학의 몸짓이나 슬픔의 스타일 등 지역이나 작가에 따라 여러 양상을 띤다고 본다. 그렇다면 높은 차원에서 모든 종교가 말하듯이 예술의 본성은 비애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덧붙이자면 ‘한(恨)’의 개념이 특정인이 만든 것이 아니듯이 비애의 개념이 야나기의 날조물일 수는 없다.

-윤: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선생은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많은 활동을 하셨다. 최근 김달진자료박물관이 펴낸 <한국현대미술 해외진출 60년 1950-2010>이란 책에 수록된 내용을 참고하면, 선생은 [상파울루비엔날레]와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전에 한국작가로 수차례 참가한 적이 있다. 나 역시 1970년대에 [에꼴 드 서울]을 비롯한 대규모 전시회가 열리던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실에서 선생의 작품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때 긴 두루마리 종이에 굵은 도화용 연필을 사용하여 단선으로 드로잉한 작품도 있었는데. 그 무렵, 그러니까 한국의 단색화가 무르익어 가던 1970년대 중후반에 선생이 직접 보신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은 어떠했는가? 색의 느낌이랄까, 뭐 그런 것에 대해 포괄적으로 한 말씀 부탁드린다.
-이: 단색화 형성의 경과를 내 나름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6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영향이 짙은 모노크롬적인 앵포르멜이 유행했고, 그 후 일부 미국식의 옾아트적인 모노크롬, 일본의 부재성 미학으로 일컬어지는 허상 이미지의 모노크롬이 대두되기도 했다. 또 이어 아르테 포베라, 미니멀 아트, 모노파에서 볼 수 있는 비이미지적, 개념적, 물질적 모노크롬이 한국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와중에 모노파 작가로 알려진 나의 한국 나들이가 잦아졌다. 내가 한국에 드나들면서 오히려 일본 냄새가 짙은 경향들은 사라져 갔다. 나는 자기 발현-스스로를 찾는 방법을 논하고 다녔다. AG그룹도 괄목할 만 하고 그 이후의 단색화 형성도 주목거리의 자기 발굴이다. 이후 단색화는 70년대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유파가 된 것이다.
나의 입장에서 단색파를 서술하자면, 72년 [앙데팡당전]을 본 야마모토와 그를 내세우는 나카하라, 그들의 통로인 나를 데리고 서울의 대장격인 박서보 선생이 앞장을 섰고, 서울 명동 화랑이 거점이 되어 단색화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한몫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자기 발견의 충동질이었고 그 계기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말이지 다른 뜻은 없다. 간절한 잠재성의 꼬투리에 외부의 충동질로 불이 붙자 폭발적, 집단적 양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국내 쪽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박서보 선생의 존재와 역할 없이 단색파는 거론 될 수 없고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현실과 소외된 비제도의 상황을 무릅쓰고 가냘픈 내외 동풍을 중계삼아 단색계통의 작가들을 부추기며 쏟은 그의 열정과 행적은 실로 눈부시다.
어쨌거나 [앙데팡당전]이 열리고 야마모토의 언행이 화제가 되고, 그 후 박서보전이 서울의 명동화랑과 도쿄의 무라마츠화랑에서 열렸던 것은 뺄 수 없는 계기다. 비슷한 경향의 작가들이 도쿄 각화랑에서 그리고 국내에서는 명동화랑을 중심으로 전람회를 열게 되면서 단색화적인 경향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 박서보 씨에 의해 [에꼴드 서울]이 형성되면서 커다란 경향 세력으로 집단화되고 권위화된 것 같다.
단색화는 일본을 비롯한 구미 각지의 비이미지적인 행위나 물성이나 구조성의 표현이 한국식의 회화적인 양태로 전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만 굳이 회화적인 집단성이 두드러졌는지 궁금하다. 한국의 단색화는 내재적인 발현이었지만 국제적인 미술현상의 영향 내지 자극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양식화되었다. 그 집단성과 특수성은 특이한 사회상황에서 선택되고 의식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의 그것은 이브 클랭, 피에로 만조니, 혹은 바네트 뉴먼, 사이 트웜블리, 요시하라 지로, 다카마츠 지로, 아라카와 슈사쿠 등과 비슷하지만 속 내용이 다르다. 무엇보다 자연스런 물질감과 신체적인 저항감이 뚜렷하고 단순히 개념적인 부정성이 아니라 윤리성을 띤 의지적인 표현성은 특기할 만 하다. 그래서 방법의 중복성과 반복성이 허황하지 않다. 이 점이 서구식의 공허하고 냉랭한 느낌에 비해 한국의 그것은 어쩌면 쑥스러우리만큼 예술 환상의 신뢰를 상기시킨다. 추상적이면서도 인간미나 자연적인 리듬이 살아 숨쉬는 생명감의 표현이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단색화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며 특이한 표현양상이다. 60년대 말부터 단색화 현상이 보이는데 이것은 시대상황과 맞물린다. 당시는 너무나 가난하고 꽁꽁 얼어붙은 추상적인 시대였다. 이것이 바로 모노크롬의 배경이고 바탕이다. 한쪽으로는 핍박한 최소한의 생활, 다른 한쪽으로는 강압적인 군정 하에 모노크롬의 호소력은 안성맞춤이었다. 단색이나 반복의 방법이 저항감과 의지를 나타내는 데에 효율적인 집단양식으로 선택된 것이다. 어쩌면 이 현상이 쉽사리 확산되고 정착될 수 있었던 연유에는 시대의 유행을 넘어 깊은 곳에 맥맥이 흐르는 한국인 특유의 한(恨)이나 생명력의 표현론이 작동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모노크롬은 그 원래의 의미대로 강한 부정성을 띠면서도 근원적인 생명감이 넘쳐 역사와 상황을 꿰뚫고 오늘날도 문제시 되는 것이리라. 물론 운동 양태로서는 시대가 변하고 사회생활이 다양해짐에 따라 단색의 부정성이 약화되면서 표현의 본질론으로, 다시 말해 한국적인 단색 루트(뿌리) 찾기로 매너리즘화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가하면 오늘날도 단색성을 더욱 확대하고 견고히 하면서 제 각기의 스타일로 뚜렷한 존재성을 획득한 경이로운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윤: 한국의 미술사학계에서 최근에 제기된 논점 중의 하나는 이른바 야나기 무네요시가 제기한 ‘비애론’의 극복이다. 이는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일종의 아킬레스건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최순우, 정양모, 김환기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백자가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발견이 ‘비애론’ 극복의 근거가 되고 있다. 즉, 야나기가 본 선(線)의 관점이 아닌 ‘빛깔’의 관점인 것이다. 즉, 조선 백자, 특히 달 항아리의 색에는 일본인은 느낄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뉘앙스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관점은 현대의 단색화 해명에도 매우 중요한 미학적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선생의 견해를 말씀해 주면 고맙겠다.
-이: 70년대의 ‘단색’은 결코 색채론으로서의 색깔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백색만이 아니었고 검정, 갈색, 노랑, 붉은색, 푸른색, 회색 등등 다양했다. 그런 색이 스스로의 톤만으로 수렴된 단색이었는데 그것들은 현실과 이어지는 색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색 자체를 주장한 색도 아니었다. 다른 색과의 조화나 구체성을 띤 색, 즉 현실로서의 복합적이고 긍정적인 색깔의 발로는 아니었다. 최병소의 작품이 대표하듯이 초창기에는 부정 혹은 거부 혹은 버팀의 추상성이 강한 의지의 물감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군정현실의 구체성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색의 부정이었다.
질문에 있는 ‘단색’이 야나기의 비애적인 선에 대응하는 현실긍정적인 색의 창출로 보기는 힘들다. 색깔이나 형태가 그 본연의 뜻에서 곧 현실로써 미술에 등장하는 것은 70년대 말에 대두하는 소위 민중미술에서이다. 생산력이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사회가 풍요롭게 되면서 표현에 색깔과 형체가 저항의 스타일로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는 흐름에서 ‘단색화’는 그 발생시의 이슈가 변질되고 애매해지면서 한국의 고유성이라는 환상의 자기합리화를 꾀하게 될 수밖에 없다. 다행이도 점차 작가들은 집단개성이 아니라 각자가 강한 개인성의 획득으로 신천지를 개척하는 현상에 접하게 되었다.

-윤: 한 때 한국의 미술평론계나 미술사학계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지만, 이른바 한국의 단색화와 일본의 모노하(物派)와의 관계에 대한 선생의 의견을 듣고 싶다. 흔히 이야기하길 일본의 모노하는 물성과는 별 관계가 없고 사물과 세계, 또는 공간, 인간 사이의 관계항이 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선생의 논법을 빌면 임시임장성(臨時臨場性), 즉 사물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약간 비껴 놓는 것, 혹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가 암시하는 바처럼 이분법에 근거한 서구 근대의 초극이 모노하의 이론적 중핵이다. 이런 견해는 선생 자신만의 것인지, 아니면 당시 모노하 작가들의 전반적인 생각이었는지 궁금하다. 내가 보기엔 70년대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은 모노하에서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다카마쓰 지로(高松次郞)의 경우만 해도 이미 1970년에 빨강, 청색 등 <판의 단체(oneness of Board)>라는 단색화를 발표한 적이 있지만, 이 경우에는 나무 판에 라커 칠을 한 것이다. 또 면포에 폐유를 먹인 에노쿠라 고지의 작품도 그렇고. 또 흰 캔버스 천에 붉은 색 터치를 일정하게 가한 요시다 가츠로의 작품도 있다. 이 작품들은 시기적으로 볼 때 대략 한국의 초기 단색화와 일치하기도 하는데, 선생이 보시기에 한국의 단색화와 일본의 모노하 사이에 영향관계를 논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는가? 물론 1970년대 초반 한국의 입체, 설치작업에는 모노하의 영향이 뚜렷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보는 입장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는 것이 모노파의 성격이고 특징이다. 이것은 모노파가 종래의 표현양식이나 이데를 거부하고 본다거나 듣는다거나 하는 예술 환상에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예술이니 창조니 하는 생산주의에 저항으로 현실비판적인 최소한의 행위로서 물질이나 공간과의 관계를 다시 보자는 시도였다. 처음에는 키네틱 아트니 옾아트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 일으키는 트리키한 방법에서 출발하였는데 그 트릭이 의외로 현실과 맞물리는 차원임을 세키네 노부오 같은 작가가 입증하고 그것을 내가 글로 밝혀내면서 오늘날 일컬어지는 모노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이나 제작 만능주의 예술, 원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며, 그런 점에서 본다거나 만든다는 신화에 반기를 든 미국의 대지예술, 미니멀 아트나 이태리의 아르테 포베라, 프랑스의 쉬포르 쉬르파스와 공통점을 띤 운동현상으로 볼 수 있다.
모노파는 한국출신인 이우환이 개입돼 있다거나 작품들이 신체성, 물성, 공간성이 강하고 비이미지적 내지는 퓨리타닉 하다든지, 프로세스나 구조성이 두드러졌다는 점은 단색파와 가깝고 빠른 시일에 한국에 알려졌다. 그 열기가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전파되기도 했다. 게다가 조셉 러브나 다카마츠 지로, 세키네 노부오 등 모노파를 유도한 친구들을 한국에 안내하고 다닌 것도 무시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노파와 한국 단색파와의 직접적인 영향관계는 내 입으로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객관적인 사실과 재료에서 가능한 한 민족정서를 접어두고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판단해 주기 빌 따름이다.

-윤: 단색화와 관련해서 볼 때 곽인식 선생의 1961년 작인 에 빨강색과 노랑색의 단색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원화를 직접 보지는 못하고 화집의 사진을 통해서 본 내 느낌으로는 물감을 두껍게 발라 물질감이 짙게 느껴지는데, 어쨌든 단색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선생은 이 작품들을 직접 본 적이 있으신지, 만일 봤다면 그 느낌이 어떠했나? 또한 선생의 경우 68년의 [한국현대회화전]에 출품한 핑크색 등 3점의 시리즈 작품 이전에 단색화를 제작했다면 몇 년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 가령, 먹을 사용해서 점을 찍는 작업은 그 아이디어의 연원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 말씀해 주기 바란다.
-이: 곽인식 선생이나 나나 예전에 단색계통 작품이 보인다 해서 후일 한국의 단색과 연결시키는 데는 위화감이 있다. 그렇다면 동시대의 많은 외국작가들의 단색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과의 차이를 찾는 일은 무모하다. 어쨌든 곽인식 선생의 그 계통 작품은 꽤 봐 왔는데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지만 그 인상이나 실상은 고스란히 루치오 폰타나, 어떤 것은 구타이 작가들의 그것들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의 작품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답했다. 점을 찍는 작업의 연원은 현대미술이 아닌 어릴 적(네 댓살 무렵) 글씨와 그림을 배울 적에 늘 강요받은 데에 있고 그것을 현대미술의 논리와 방법에 적용시켜 70년대 초에 활성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윤: 선생이 사용하는 단색은 한국의 단색화와는 개념상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캔버스를 대하는 선생의 입장은 한국의 단색화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른지 설명을 듣고 싶다.
-이: 한국의 작가들이 ‘단색’이란 범주 내에서도 제각기 방식이나 태도나 얼굴이 다르듯이 나도 다를 뿐이다. 다만 나의 색채나 구조성은 어디까지나 현대미술 일반의 논리와 방법에 따른 것이고 그것을 서구식 액션과는 달리 절제된 신체적 표현으로 전개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누구는 어느 나라 것이라는 식의 초국수주의적 언표는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태도이기에 인정하지 않는다.

-윤: 선생은 70년대 초반의 사물을 이용한 모노하의 작품에서 벗어나 중반에 이르면 <선에서>와 <점에서> 연작을 통해 다시 단색화에 집중하게 된다. 이처럼 회화로의 복귀가 이루어진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 나는 후반기에 회화로 복귀했다고도 단색으로 회귀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70년대부터 해온 일이 결과적으로 지금처럼 전개돼 왔을 뿐이다. 옛날에도 회색을 쓴 적도 있고 지금도 수채화에서 여러 가지 색을 단색으로 쓰고 있다. 다만 최근의 캔버스나 벽면 회화에서는 생각이나 표현의 철저화가 극단에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태반이 손대지 않은 공간에 최소한의 물감과 붓질로 그림이 형성되고 필연적으로 사라질 것 같은 회색들이 남았는데, 이것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나 자신도 모른다. 나의 관심은 오늘날 그림이나 조각이 최소한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시도하는데 있고, 그 전개는 다음 세대 작가들에게 기대하는 입장이다.

-윤: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人 +間’이었다. 이 주제는 마치 선생의 모노하 작업을 포함한 작품세계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건 마치 ‘人+間 +人 +間+人 ......’하는 식으로 무한 확장할 때 ‘사이(in-between)’의 구조가 파생되는데, 선생의 70년대 작품인 <선에서>와 <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응(Correspondence)> 연작에 이르는 도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도식에 인(人) 대신 물(物)을 넣어도 같은 맥락이 되겠는데, 이 ‘사이(間)’라는 단어는 같은 한자어라고 하더라도 문화나 역사적 배경이 다른 한국과 일본에서 사용되는 개념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나 개인적으로 이 ‘사이’하면 어린 시절 추운 겨울 밤 사람들이 마당을 지나가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창호지를 바른 문 사이로 끊길 듯하다가 이어지고 끊길 듯하다가 이어지고 그러다 끝내 사라지는 소리의 양태는 마치 선생의 <선에서>의 선들이 점차 소멸돼 가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일본말에 ‘사이(間)‘라는 뜻을 지닌 ’마(ま)라는 게 있는 것으로 아는데, 선생께서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시니까 이 ‘마’와 한국말의 ‘간간(間間)히’ 들리다와 같은 용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주기 바란다. 일본의 정서를 두루 아우르는 ‘여정(餘情)’이나 ‘유현(幽玄)’의 미학과 연결시켜 주면 더욱 실감이 나겠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문화에 두루 정통한 ‘사이의 존재’인 선생만큼 이 단어의 의미를 실감하실 분은 또 따로 없을 것 같기에 드리는 질문이다.
-이: 이를테면 한국의 은은함은 밝고 건조하고 흐르는데서 오는 아쉬움의 미학이라면, 일본의 유현은 어둡고 습하고 고이는데서 오는 단념의 미학 같기도 한데, 물론 억지와 과장으로 해 본 말에 불과하다. 여기에 준해 볼 때 한국어의 ‘사이’는 자연스런 불연속의 연속 같은, 끊어지다 이어지는 느낌이고, 일본어의 ‘마(ま:間)’는 의식화된 비연속의 시공, 호흡을 멈춘 상태의 침묵의 차원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사실 이 말도 억지다.

-윤: 선생의 작품세계에 관한 인터뷰는 그 동안 한일 양국에서 많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래서 이 자리는 ‘한국의 단색파’를 위한 것인 만큼 이와 관련된 질문을 드리고 싶다.
얼마 전에 곽인식 선생에 대한 글을 쓰면서 곽 선생의 작품에서 왠지 모르게 일본냄새가 난다고 했지만, 조셉 러브의 글을 읽으니 그는 거꾸로 한국 냄새가 난다고 썼더라. 솔직히 말하면 선생의 작품에서 어느 정도 일본 냄새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깔끔하고 정리가 잘 돼 있고 하는 거, 유난히 배치에 신경을 쓰는 것 등등. 선생의 초기 모노하 작업을 보면 가령, 방석 위에 돌을 올려놓은 작품의 공간 배치는 일본의 전통 정원 조원술인 ‘세키데이(石庭)’를 연상시킨다. 곱게 깔린 흰 모래의 표면에 물결치는 듯한 흔적을 내서 바다를 표현한 조원술은 인공미의 극치를 보여줌과 동시에 ‘사물을 다시 짜서 살짝 빗겨놓는’ 행위와도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선생께서 자주 예를 드시곤 하는 센리큐(千利休)의 곱게 쓴 마당에 낙엽을 한줌 흩뿌리는 행위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좀 어려운 질문이긴 한데, 한국의 단색화 작품에서 맡아지는 냄새를 묘사한다면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겠는지.
-이: 곽인식 선생이나 나의 작품에서 일본냄새가 안난다면 가짜다. 40-50년 이상을 생활하고 배우고 활동하면 당연히 그곳 물이 배는 것이 이치다. 어느 나라에 가던 마찬가지이고 다만 그 작가가 어느 나라가 아니라 얼마만큼 뚜렷한 퍼스널리티를 가졌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질문에 있는 센리큐의 일화는 비슷한 것이 원효대사에게도 있다. 단색화의 긍정적인 측면은 앞에서 많이 언급했는데, 첫 인상만 들자면 대단히 신체성이 강하고 절제된 서정성의 회화라는 점,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냄새에는 바로 그 예술 환상이 짙어 회화 자체에 대한 의문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윤: 흔히 말하길 한국의 단색화 작품에는 범자연주의, 비움의 미학, 선비정신, 기(氣), 선수행(禪修行), 어수룩한 맛, 중성성(neutrality), 여백, 등등 딱히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한국의 정신성 내지는 동양적 가치가 특유의 기법이나 재료를 통해 내면화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서구의 미니멀리즘이나 미니멀 아트가 지닌 특질과 차별화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나 정서, 주의주장을 너무 내세우면 자칫 국수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다고 생각되며, 또 이것이 한국의 단색화가 세계화의 길목으로 나아가는데 오히려 발목을 잡힐 수 있는 허점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예술은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론의 정립과 예술의 실천에 대해 선생의 조언을 듣고 싶다.
-이: 이 질문은 나로서는 적이 당황스럽다. 제 삼자의 눈으로 볼 때 거론된 어휘들이 제작에서 또는 작품에서 느끼기는 불가능한 말들이다. 그런 개념이 오늘날의 문명이나 상황과 너무나 동떨어졌을 뿐더러 자칫하면 시대착오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작가는 늘 추구하고 탐구해야 하는데 마치 도튼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좋지 않다. 가령 어떤 작가의 작품은 공예적으로 보일만치 매만져지고 다듬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프로덕션의 산업화 시대에 있어서는 제 삼자의 손이나 기계를 빌려서 대량으로 제작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적 요구에 걸맞는 제작 방식이다. 개인의 수공업적 혹은 전통적인 제작 방식에 억매일 것이 아니라, 현대적 방법이 더 큰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며 요망되는 터이다.
나의 경우는 표현을 타자와의 긴장관계로 극한까지 몰고가다보니 정신의 해방은커녕 신체를 혹사하여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이것은 시대적인 열린 표현이 아니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요구된다. 로칼리티 자체는 부정하지 않으나 국제적인 지평에서 열려 있어야 한다.
단색화를 살리는 길은 그것이 타자와 교통할 수 있는 생명체라는 보편성을 밝혀내는 길이다. 그 로컬리티를 글로벌한 차원에서 열어 보이고, 미지적이고 보편적이며 세계적인 컨텍스트를 제시해야 한다. 원컨대 초지(初志)로 돌아가 모순, 저항, 자기부정, 의문 등 잘 안 되는 쪽에 서서 고민하고, 투쟁하고, 시도하는 광경이 보이기를 바란다.
 
*김영나, ‘초국적 정체성 만들기:백남준과 이우환’, <한국 근현대미술사학>, 2007, 제18집.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이우환의 예술적 정체성은 근대와 탈근대, 오리엔탈리즘과 탈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이 교차하는 경계 위에, 그리고 일본, 한국, 동양, 서양이 맞물리는 초국적 공간에 유동적이고 불안정하게 위치한다.”
 
-출전 <한국의 단색화전>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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