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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풍경 01

윤진섭

Ⅰ.
19세기 말, 근대화의 여명기에 이 땅을 밟은 서양인의 눈에 조선은 조용한 ‘은자(隱者)의 나라’로 비쳐졌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고 구한말에 조선을 찾은 한 서양인 기자는 쓰고 있다.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가 <동방의 등불>이란 시에서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묘사한 이래, 이 ‘고요’는 ‘흰옷’과 함께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가 되었다.
고요는 사전적 의미로는 조용함을 뜻한다. 일체의 번잡함이 없는 상태, 즉 속세의 시끌벅적함을 떠나 마치 조용한 산사에 머무는 듯한 적막감이 감도는 상태가 바로 고요다. 그것은 마치 깨끗한 백지의 표면처럼 침잠된 상태다.
이 시를 지을 당시 타고르의 마음속에는 과연 어떤 심상이 떠올랐을까?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한국 땅에 대해 그는 어떤 심사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묘사한 것일까? 혹시 나지막한 연봉들 너머로 바다 저편에서 붉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찍은 사진을 본 것은 아닐까?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타고르의 시적 상상력이 한국을 ‘고요’라는 단어로 표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흰옷’과 ‘고요’는 모두 외국인이 바라본 한국의 인상이란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말하자면 타자적 시선인 것이다. 타자적 시선이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빨리 빨리’라는 말이 의미하듯 이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부지런한 민족으로 외국인들에게 각인되고 흰옷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부산한 몸짓과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한국인의 마음 이면에는 여전히 ‘흰옷’과 ‘고요’의 정서가 깔려 있다. 그것들은 박제된 것이 아니라 단지 호출되지 않았을 뿐이다. 아니, 호출되길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김소월의 시 <초혼(招魂)>에 나오는 구절처럼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인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부르다 죽을 정도로 절박하게 만든 것일까. 흔히 말하듯, 한(恨)일까? 아니면, 칼 융이 말한 것처럼 ‘집단 무의식’의 중핵을 이루는 ‘원형성(archetype)’일까?
 이 전시의 초대작가 중 한 사람인 정창섭은 생전에 자신이 즐겨 다루던 한지(韓紙)을 가리켜 유별나게 ‘한지(寒紙)’로 불렀다. 한지는 추운 겨울에 다뤄야 제 맛이라는 게 그 이유다. 이 말은 마치 평양냉면은 추운 겨울날 이불을 쓴 채 얼음이 어석어석 씹히는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어야 제 맛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의 이 말 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한국인 특유의 미적 정취가 담겨있다. 그는 생전에 무려 50여 년간 닥(楮)만 다루다 작고했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몇몇 작가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김환기, 곽인식, 윤형근이 그들이다. 이 분들은 지금 살아있으면 100세에서 80대 중반에 달하는 연령이다. 
 1970년대 초반에 ‘단색화’1)가 이 땅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972년, 한국미술협회 주최로 열린 제1회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이동엽의 <컵>과 허황의 <가변의식>이 그 첫 징후였다. 공식적으로는 이 작품들이 최초의 단색화로 간주되지만2), 김환기는 60년대 후반부터 이미 뉴욕에서 청색 점화(點畵)를 그리고 있었으며, 곽인식은 그 보다 훨씬 이전인 1961년에 빨강과 노랑의 단색으로 이루어진 작품 을 제작한 바 있다. 이우환은 1968년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에서 핑크와 빨강색 계열의 단색화 작품 3점(풍경Ⅰ, Ⅱ, Ⅲ)을 발표하였다.
 이상 대략 살펴본 내용이 바로 1970년대 중반이후 본격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이루게 되는  단색화의 선례들이다. 1972년의 제1회 [앙데팡당]전에 일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山本 孝) 사장이 그 무렵 일본 화단에서 혜성처럼 떠오른 작가 겸 미술평론가인 이우환과 함께 파리비엔날레 출품작가 선정을 위한 심사위원 자격으로 내한했다. 이미 그 이전부터 한국을 드나들며 조선의 백자에 심취해 온 야마모토 사장은 이동엽의 작품을 보고 “조선의 백자 냄새가 난다.”3)며 주목, 같은 심사위원인 이우환과 함께 이동엽을 회화 부문의 1석(席), 허황을 2석으로 낙점했다. 훗날 일본에서 벌어진 한국 단색화 전시회의 유행을 예고하는 이 결정에 대해 그 당시만하더라도 이러한 징후에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말하자면 한국의 백색 단색화는 외국인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이른바 타자적 시선이 아닐 수 없다.
 이동엽의 회고에 의하면4), 그는 이 발탁을 계기로 군에서 제대하던 해인 1975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는 동경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다섯 가지의 흰색]전5)의 참가차 도일(渡日), 약 1달간 야마모토 사장의 집에 머물면서 동경의 미술계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이 전시는 한국에서 단색화의 붐을 일으키는 촉매가 되었다. 즉, 1972에 창립된 [앙데팡당]전을 비롯, 1974년에 창립된 [대구현대미술제], 1975년에 창립된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 드 서울] 등 대규모 현대미술 전시회에 흑백 단색화가 대량으로 출품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의 백색 단색화가 그것을 낳은 주체인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 발견된 사실은 나중에 ‘백색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원인이 되었다. 한국의 미술사학계에서 두고두고 논란이 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이른바 ‘비애론’과 연결된 것이 그것이다6). 조선 도자기에 나타난 백색의 특질에 대한 야나기 ‘비애론’의 초점은 색의 결핍에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화려한 채색도자기와 달리 조선의 백자에는 색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의 차이에 기인한다. 야나기의 그러한 관점에 대해 훗날 최순우는 ‘흰빛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우리민족 전체의 집단 개성 중 하나’임을 언급한 바7) 있다.
 백색을 집단 개성으로 파악한 최순우의 관점은 한국의 백색 단색화에 대해 이론적 논거를 부여해 준다. 즉, 우리의 조상들이 즐겨 입었던 횐 옷뿐만 아니라 달 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백자, 백일이나 돐 등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 때 상에 놓는 백설기, 문방사우에 속하는 화선지와 각종 빛깔의 한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우리의 문화적 자료체가 70년대의 백색 단색화가 보여준 집단 개성에 이론적 근거를 보태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단색화가 반드시 백색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검정도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이번 전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듯이 빨강, 청색, 노랑, 녹색 등 오방색의 기미를 띤 작품들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회색이나 베이지, 갈색 등 중성색 계통도 높은 비중을 차지하여 이번 전시에 초대된 단색화 작가들이 연령에 관계없이 극단적인 색채를 기피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아무튼 야나기가 조선의 백자에서 ‘비애의 미’를 발견했든, 동경화랑 사장 야마모토가 이동엽의 작품 표면8)에서 조선의 백자를 연상했든 그것은 이 자리에서 논할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의 관심은 그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단색화9)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백색과 검정, 그리고 탈속한 오방색과 중성색이 지닌 다양한 빛과 색의 변주와 그에 따른 고유의 미적 특질에 있다.

Ⅱ.
근대화의 여명기에 한 외국인 기자가 거리에서 본 흰 옷의 이미지는 100년이란 시간을 건너 뛰어 이 자리에 다시 호출되고 있다. 그와 더불어 타고르가 한국의 이미지로 생각했던 ‘고요’ 역시 전시장의 주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관객들은 전시장을 걸어 다니며 비로소 타자적 시선이 다름 아닌 나의 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풍경이다. 풍경이되 잊었던 혹은 잃어버린 풍경인 것이다. 근대 서구의 원근법적 공간이 자아내는 풍경이 아니라,10)  몸의 기원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려고 애쓰는, 그래서 그 기원을 오늘의 현장에 불러내 현재화하는 몸짓들이 자아내는 풍경임을 관객들이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첫 번째 전시실 안으로 들어선 관객들은 맨 먼저 김환기의 점화(點畵) 앞에 마주서게 될 것이다. 커다란 캔버스에 점점이 찍힌 무수한 푸른 점들. 그것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김환기는 뉴욕의 화실에서 서울에 두고 온 친구와 지인들을 생각하며 고독하게 점을 찍어나갔다. 그는 그와 동세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엄격한 유교적 전통 속에서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다. 동경 유학 시절, 일본을 통해 일찍이 근대,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을 통해 변질된 서구의 근대를 체험했으며, 훗날 유럽과 남미, 그리고 미국을 거치는 일련의 문화적 편력을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달 항아리와 새를 소재로 한 반추상 화풍이 사라지는 시기가 바로 뉴욕 체류가 시작되는 1960년대 중반임을 감안할 때, 그의 근대적 각성이 세련된 순수 추상화를 낳은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김환기를 비롯한 1세대 단색화 작가들 대부분이 일제강점기와 6. 25 동란을 통해 형성된 정신적 외상(外傷)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 중 특히 김환기, 곽인식, 정창섭, 윤형근, 박서보, 정상화, 권영우 등 현재 80세를 넘긴 세대는 일본어에 익숙하며, 한자문화권의 특징인 수신(修身)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관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박서보의 “수신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11)는 언명이나 윤형근의 작품 배면에 흐르는 중도의 윤리는 모두 유교적 가치관의 산물이다.
 일찍이 서구의 근대라는 타자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이우환이 세계를 관계성의 관점에서 파악하게 된 것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도도한 세계사의 보편적 질서, 즉 서구적 이성에 맞서고자 한 그의 의지는 서구의 입장에서 볼 때 돈키호테적 만용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보다 큰 우주적 틀에서 바라본다면 그의 관점은 지극히 합당하다. 관객들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점차 소멸돼 가는 점과 선의 자취 속에서 <주역(周易>에 기초한, 무한히 반복되는 우주의 순환 원리를 유추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의 수신(修身)은 유교적 덕목의 핵심인 수기치인(修己治人) 중에서 수기에 가깝다. 그것의 목적은 인격의 도야에 있지만(大學, 爲己之學), 궁극적으로는 타인을 위한 봉사로 발전해 나간다는 점에서 군자적 삶의 근본을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 단색화 작가들이 그림이란 수행(修行)의 방법을 통해 타자를 위해 나아가지 못하고 자아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전기 단색화가 지닌 한계임에 분명해 보인다.12)
수행의 관점에서 봤을 때, 곽인식, 김환기, 박서보, 정상화, 김기린, 최병소, 이동엽 등 대부분의 전기 단색화 작가들이 주제의 심화나 행위의 반복을 통해 어떤 극점을 향한 구극(究極)의 자세를 평생 일관되게 유지한 것은 한국의 단색화가 지닌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작가적 삶의 태도는 보는 관점에 따라 상이한 평가가 가능하다. 가령, 그것을 일종의 매너리즘으로 보느냐 아니면 최고로 순화된 미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몸짓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들에 대한 비평적 평가는 어긋난다.
 대부분의 전기 단색화 작가들이 지향하는 미술의 이념은 형식주의자인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품었던 작품의 ‘질(質)’에 대한 생각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와 키치>라는 글에서 당시 미국사회에 팽배해 있던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사이의 길항관계를 분석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키치와 같은 하위문화의 확산을 우려했다. 그는 키치와 같은 저급한 하위문화가 당시 미국의 문화를 오염시키는 원인으로 봤던 것이다.13)
여기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아방가르드를 가리켜 “‘절대’를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추상과 비대상적 미술에 도달했다”14)고 본 점이다. 주지하듯이, 그가 긴 비평 활동을 통해 클리포드 스틸(Cliyfford Still:1904-1980),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 한스 호프만(Hans Hofmann:1880-1966),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1915-1991), 마크 토비(Mark Tobey:1890-1976), 아쉴 고르키(Arshile Gorky:1904-1948), 바네트 뉴만(Barnet Newman:1905-1970), 마크 로드코(Mark Rothko:1903-1970) 등등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가리켜 ‘미국형 회화(‘American-Type’ Painting)’로 명명하며 미국의 대표적 작가로서의 입지 구축을 위해 노력한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나는 그린버그가 <미국형 회화>라는 글의 후반부에 쓴 “1954년도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시된 드 쿠닝의 작품이 옆에 나란히 걸린 벤샨의 것은 물론 자기 또래나 혹은 다른 전시관에 걸린 연하 작가들의 작품을 얼마나 볼 품 없이 만들고 있는가.”15)하는 발언에 주목하고 싶다.
이 발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구상화가인 벤샨과 추상화가인 드 쿠닝의 대비적 등식에는 그린버그 특유의 추상회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함께 구상회화를 은근히 폄훼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 그린버그에게 있어서 좋은 작품의 절대적인 가치 기준은 곧 ‘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린버그에 의하면 예술의 질을 이끌어내는 것이 취미인데, 그것은 직관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 취미란 증명이 불가능하며 그만큼 모호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취미란 “정의할 수 없고 단지 인식할 수 있을 뿐”이며, 또 진정한 취미란 “흔들리거나 변질되지도 않는다.”16)고 말한다.
 한국의 단색화와 관련시켜 볼 때 나는 그린버그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미적 취미의 항상성이야말로 한국의 단색파 작가들로 하여금 그토록 오랜 세월을 단색화란 한 우물만 파며 버티게 만든 힘인 것이다.
 1970년대 한국 단색화를 보면서 추사 김정희와 같은 조선 사대부들의 미적 취미에 관해 생각해 봤다. 당시 이들의 취미란 직접적으로 ‘질’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건국 초기부터 조선의 지배 엘리트 계층으로 정치의 전면에 부상한 사대부 계층은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양당 체제를 수립해 조선조 5백년의 긴 역사를 지배하였다. 주지하듯이, 조선조 말 실학으로 대변되는 격동과 변혁의 시기를 살았던 김정희는 청(淸)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이 땅에 신문화를 정착시키고자 했다.17)
비단 학문뿐만 아니라 시ㆍ서ㆍ화와 전각에까지 두루 능했던 김정희 예술의 핵심이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에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학문을 갈고 닦아 고매한 인품이 예술에 깊숙이 스며들 때 고품격의 작품을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녔던 것이다. <세한도>는 곧 고난 속에서도 변절하지 않는 선비의 꼿꼿한 기상과 인륜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미에 대한 헌사(獻辭)인 것이다.18) 나는 조선조 사대부의 예술이 궁극적으로는 예술에서의 ‘질’을 추구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향한 것은 궁극적으로 인격의 완성이었다.19) 칸트와 의사 사이에 얽힌 이 일화가 보여주듯이, 도덕적으로 성숙한 칸트의 인간적 면모야말로 추사의 고매한 인격과 학문과 예술을 통해 그가 지향한 목표가 같은 지평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비평적 기준으로 삼았던 칸트의 ‘무관심성’ 개념은 세속적 이익이나 관심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탈속(脫俗)’이야말로 바로 추사가 말하는 ‘서권기문자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한국의 단색화가 보여주는 미적 세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Ⅲ.
 여기서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동일한 지평에 놓고 논할 수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정신세계를 추구한 동양과 물질세계를 추구한 서양 사이에서 배태된 간극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다 같은 인류 차원의 문제라는 점에서 상생을 위한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오늘날 세계를 하나로 묶는 끈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ing Service:SNS)’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이 새로운 정보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가령, 현재 9억 명에 달하는 페이스북의 사용자가 하루에 올리는 정보는 약 1억 건에 달하는데, 이는 글로벌한 차원의 소통이 실시간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아날로그 패러다임에서 디지털 기반의 패러다임으로 세계 문명의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서양의 관심사가 곧 동양의 관심사이고 동양의 관심사가 곧 서양의 관심사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 문제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국가나 민족, 종족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인류는 바야흐로 ‘상호접촉’ 내지는 ‘상호작용’의 열풍 속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볼 때 스마트폰이나 아이폰은 이제 국경을 초월한 인류 공통의 통신 기기(器機)이다. 이른바 무수한 셀(cell)과 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초국가적, 리좀적 혼성체가 탄생하고 있다. 이는 지역과 지역 간의 소통이 곧 세계화를 의미함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이다. 미술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작품의 창작, 소비, 구매, 전파, 교환, 유통 등이 전대미문의 새로운 전자 시스템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새로운 창조가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20) 이제 예술작품은 점차 ‘앱(어플리케이션의 약어)’을 통해 앞에서 열거한 방식에 의해 확산되고 있으며, 다양한 클라우드의 개발에 의해 새로운 예술의 창작 모드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통신기기에 의해 인류가 하나의 끈으로 연결돼 상호 유대를 다지는 것은 장점이지만,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경고한 ‘권력(大兄)’의 깊숙한 일상생활에의 침투와 감시는 지양해야할 단점임에 분명하다. 아울러 롤랑 바르트가 언급한 바 있는 ‘저자의 죽음’ 또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구체화되고 있는 실정이다.21)
그러나 한편으로 볼 때, 컴퓨터 기반의 디지털 문명이 이른바 ‘재현된 이미지(simulacrum)’에 의해 발생하는 가짜 문제를 낳고 있는 것 또한 심각한 현실이다. 가령, 사회적으로는 성형수술이나 복제인간이 야기하는 윤리적,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를 비롯하여 예술의 경우에는 작품의 진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수 있다. 여기서 재현된 이미지를 또 하나의 실재로 간주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문제는 새로운 복제술에 의해 원본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복제품, 즉 하이퍼 리얼리티에 의한 ‘작품’이 탄생할 경우이다. 머지않아 이러한 도전에 직면할 경우 한국의 단색화와 같은 전형적인 아날로그 작품의 가치와 존재 이유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발터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에 있어서 ‘아우라’의 상실을 예고한 이래, 기술의 진보는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해 왔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이번 전시에 초대된 최병소나 이동엽의 작품 제작 태도에 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문제는 이번 전시에 초대된 모든 작가들의 경우에도 해당된다는 점을 덧붙여둔다.
 최병소는 1970년대 중반, 예의 신문지 위에 볼펜과 연필을 이용하여 새카맣게 뒤덮는 작업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 반복적인 행위를 통하여 그는 신문지라는, 그 스스로 선택한 재료의 물성을 바꿔놓았다. 그 세월이 무려 40여 년에 달한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다. 인류의 문명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점차 이행해 온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시뮬라크라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는 중심이 분명히 존재했던 모더니티에서 다원성이 인정되는 포스트 모더니티의 사회로 이행해 왔다. 예술에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오로지 최병소의 선을 긋는 행위다. 지면 관계상 간단히 말하자면, 여기서 나의 관심은 “과연 미래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정교하게 발달된 복제술이 최병소의 작품에 깃든 시간성(역사성), 육체성(살/몸), 물질의 전화(轉化) 과정, 정신의 투여 등 한 마디로 요약하여 ‘몸성’22)을 재현할 수 있는가.”23)하는 질문에 있다. 이 점에 대한 나의 견해는 부정적이다. 최병소가 40여 년에 걸친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견지할 수 있었던 부정의 정신을24) 신뢰하기 때문이다.
 
 
- 02편에 계속
 

참고문헌

1) 단색화에 해당하는 영어는 ‘monochrome painting’으로 미국의 경우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1913-1967)를 비롯하여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1930- ),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1912-2004) 등등 백색 혹은 검정색 작품이 이 계열에 속하며, 유럽의 경우에는 이브 클랭(Yves Kline:1928-1962))의 청색 모노크롬 작품과 피에로 만조니(Piero Manzoni:1933-1963)의 백색 모노크롬 작품 등이 대표적이다. 1960-70년대에 미국 화단을 풍미한 미니멀 아트 경향의 작품들 대다수가 여기에 속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1970년대 초반이후 본격화한 다양한 단색 회화 작품들을 총칭하는 용어로 나는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 기획한 [한일현대미술단면]전 이후 이 특정한 경향의 작품들을 가리켜 ‘Dansaekhwa’라는 고유명으로 불러왔다.

2) 서성록은 1972-3년 경 이동엽과 허황 외에도 최명영, 권영우, 정영렬 등의 개인전 또는 단체전에 단색의 그림이 출품되고 있었다고 당시 활동한 작가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기술하고 있다. 서성록, ‘[에꼴 드 서울] 20년의 발자취’, <에꼴 드 서울 20년, 모노크롬 20년>, 관훈디자인연구소, 1995, 서문. 한편, 한국의 70년대 한국 단색화를 선도한 사람은 박서보이다. 당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재직한 그는 [앙데팡당]전과 [에꼴 드 서울]전을 창설하고 [서울현대미술제]를 비롯한 부산, 강원, 광주, 전북 등 지역의 현대미술제 창설의 산파역을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 도록에 수록된 필자의 이우환 인터뷰를 참고할 것.

3) 이 시기의 단색화를 다룬 비평이나 미술사 분야의 글에 흔히 인용되는 발언이다. 그러나 최근 필자와 가진 이우환과의 인터뷰에서 이우환은 야마모토 사장이 이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리에서 한 발언이 아니라 후일에 한 것이며, 또 백자 냄새가 났기 때문에 선정한 것이 아니라 작품이 신선하고 훌륭해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자세한 것은 본 도록에 실린 이우환과 필자와의 인터뷰를 참고할 것.

4) 이동엽과 허황이 [파리비엔날레] 참가작가로 선정이 되었지만, [파리비엔날레] 본부에서 입체부문만 초대하기로 결정, 이들의 [파리비엔날레] 참가는 무산된다. 1973년에 열린 [제8회 파리비엔날레](1973. 9. 15-10. 21)의 참가자는 입체부문의 심문섭과 이건용이었으며, 이동엽과 허황은 2년 뒤인 [제7회 카뉴국제회화제]에 참가하게 된다. 이동엽, 인터뷰, 2012. 1. 5. 가락동 이동엽 작업실.

5) 초대작가: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 황, 기간:1975. 5. 6-5. 24. 한편, 이 전시는 최근에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설문 조사한 미술전문가 앙케트에서 해방이후 가장 성공적인 해외 전시에 선정된 바 있다. 선정위원:김선정, 김승덕, 김홍희, 박서보, 서성록, 서승원, 송미숙, 오광수, 윤범모, 윤진섭, 이용우, 최열. 이 전시를 계기로 일본에서의 단색화 관련 전시는 증가하게 된다. 대표적인 전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한국 현대미술 6인전](무라마츠 갤러러:1977),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센트럴미술관, 동경/1977), [아시아미술:후쿠오카시립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특별전](1980),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전](쿄토 시립미술관/1980), [70년대 후반 하나의 양상전:한국 현대미술전](1983), [현대의 백과 흑전](사이타마 현립근대미술관/1986), [히로시마전](히로시마 현대미술관/1989), [한국 현대미술 12인전](센다이 미야기미술관/1993)

6) 백색미학을 야나기 무네요시의 ‘비애론’과 관련시켜 문제를 제기한 논문으로는 김정희의 ‘한지(韓紙:종이의 한국 미학화’, <현대미술사 연구>, 현대미술사학회, 2002’와 김현숙의 ‘단색회화에서의 한국성(담론) 연구, <한국현대미술사연구회 심포지엄-한국현대미술, 1970-80>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비판적 논의에 대해 한국의 백색미학을 최순우를 비롯한 김환기와 정양모의 심미안을 잇는 줄기로 파악한 논문으로는 박계리의 ‘박서보의 1970년대 <묘법>과 전통론-야나기 무네요시와 박서보 사이의 지도그리기’가 있다. 한편, 이우환은 최근 필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의 백자와 관련된 야나기의 ‘비애론’에 대해 언급하며, 그러한 국내의 시각 자체가 ‘어이없는 몽상’에 불과하며 야나기의 선(線) 중심의 비애론이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비애의 개념이 야나기 (개인의) 날조물일 수 없다’고 주장해 주목된다. 자세한 것은 본 도록에 실린 ‘이우환과의 대화’를 참고할 것.

7) 최순우, ‘백색의 아름다움’, <대한일보>, 1979. 5. 11. 박계리,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8)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이동엽의 <컵>은 1972년 [앙테팡당]전에 출품한 시리즈 3점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작품이다. 인쇄용 잉크를 사용하여 그린 이 작품의 표면은 심하게 균열돼 마치 조선 백자의 갈라진 표면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9) 단색파는 1970년대 초반 이후 단색화 작업을 한 일단의 작가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 용어는 오광수를 비롯한 미술평론가와 몇몇 미술사학자들이 사용한 이래 갤러리현대 주최의 [한국의 단색파] 등 전시회의 제목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단색파(Dansaekpa:The Korean Monochrome Movement)로 표기한다.

10)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박유하 옮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민음사, 1997. 207쪽.

11) 박서보, <작가 노트> 중에서,

12) 가령, 1980년대에 들어서 전기 단색화 작가들을 포함한 모더니즘 진영에 대한 민중미술 진영의 비판은 이의 전형적인 예이다.

13) 1970년대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변함없이 대다수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이 구태의연한 구상적 화풍에 대해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미술에 있어서 이 ‘질’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상미술에 대한 이러한 반응이나 평가는 자신들의 미적 취미에 대한 확고한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 당시 단색화는 아방가르드와 동의어로 인식된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인식은 그린버그가 논하는 아방가르드(모더니즘)의 입장에 비쳐볼 때 흥미 있는 부분이다.

14) Clement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 , Beacon Press Boston, 1965, p. 5

15) Clement Greenberg, ibid, p. 220.

“At the Biennale in Venice in 1954, I saw how de Kooning’s exhibition put to shame not only the neighboring one of Ben Shahn, but that of every other painter his age or under in the other pavilions.”

이 화가들은 1940년대와 50년대에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 독자적인 개인적 양식을 수립한 ‘뉴욕화파(New York School)’ 작가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을 ‘화파(School)’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전시에서 보듯이 이 작가들이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물론 이 중에는 김환기, 곽인식, 윤형근, 정창섭 등 작고 작가들이 다수 포함돼 있지만)이고 또한 이들의 작업이 현재 40-50대에 이르는 후기 단색화 작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활동이 끝나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난 ‘뉴욕화파’와는 근본적인 면에서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전후기 단색화 작가들에 대해 ‘단색파(Dansaekpa:The Monochrome Movement)’란 호칭을 부여하고자 한다.

16) Clement Greenberg, ‘Taste’, 1983년 1월 18일에 웨스턴 미시건 대학에서 행한 강연의 녹취록. http://www.dangpow.com/-sam/greenberg/crisis.html

17) 최완수, ‘추사의 학문과 예술’, <추사집>, 현암사, 1976. 17-20쪽.

이 변혁기에 서양의 원근법과 명암법에 근거한 사실적 화풍의 천정화를 접한 뒤 감탄하고 놀라는 장면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속에 잘 묘사돼 있다. 당시 연암은 청나라 연경에 있는 한 천주교 성당을 방문한 뒤 그 소감을 적었다.

18) 오주석, ‘추운 시절의 그림, 김정희의 <세한도>’,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솔, 2011, 153쪽.

<세한도>의 발문에 있는 추사의 글에서 이와 관련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 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세한도>는 추사가 그런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19) 이는 칸트의 정언명법이나 인간미, 도덕률과 결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음의 일화를 보라.

“Nine days before his death Immanuel Kant was visited by his physician. Old, ill and nearly blind, he rose from his chair and stood trembling with weakness and muttering unintelligible words. Finally his faithful companion realized that he would not sit down again until the visitor had taken a seat. This he did, and Kant then permitted himself to be helped to his chair and, after having regained some of his strength, said, ”Das Gefühl für Humanität hat mich noch nicht verlassen-“The sense of humanity has not yet left me.”

E. A.C. Wasianski, Immanuel Kant in seinen letzten Lebensjahren(Ueber Immanuel Kant, 1804, Vol. Ⅲ), reprinted in Immanuel Kant, Sein Leben in Darstellungen von Seitgenossen, Deutsche Bibliothek, Berin, 1912, p.298. Erwin Panofsky, , The Overlook Press, 1974, p. 1에서 재인용.

20) 윤진섭, “Now new creation comes out from the fingertips.”, “Nowadays, iphone or computer monitor is a kind of minimized cave wall.”, “The world is in my hand.” etc.

이 점에 대해서는 나의 기발표 논문 ‘현실 혹은 가상? 나의 페이스북 체험기’, <유렵문화학회 논문집, 2010>와 ‘소셜 네트워크와 대안적 사회교육의 가능성’, <유럽문화학회, 2011>을 참고할 것. 여기서 나는 예술의 사회교육에 관한 실천 프로그램인 ‘국제상상대학(International University in Imagination:IUI)’과 장차 도래할 사이버 국가의 문제를 다룬 ‘파자마공화국(Pajama Republic)’을 통해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 두개의 프로젝트는 내가 직접 페이스북에 창설한 것이다.

21) 이 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입장에서의 논의는 내가 페이스북에 창설한 ‘부러진 삽(Broken Shop)’을 통해 위의 논문에서 전개된 바 있다.

22) 이동엽 역시 반복되는 붓질에 의한 자기 작업의 요체는 ‘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필자와의 인터뷰.

“나는 흰 공간에 붓질을 한다. 화면과 상을 하나의 ‘몸’으로 의식하기 위해 나는 늘 흰 바탕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선을 긋고자 한다.” 이동엽, <작가 노트>

아울러 최병소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보라.

“신문지라는 ‘존재론적 조건’에서 출발한 나의 작업은 ‘바탕과 표면’, ‘지지체와 안료’라는 이원의 구조를 하나로 ‘일체화’시키는데 집중되었으며, 서로 흡수되고, 침투하며, 지우고, 칠하며, 부딪히고, 격렬하게 접촉되어 찢어지고, 작렬하는 충격과 마찰의 물리적 과정에서 몸(행위)의 ‘살아있음’은 감각의 부활과 함께 ‘의식의 연금(鍊金)’으로 이행되고, 신문지는 ‘하나의 숭엄한 순수물질’로 변하게 되어, 완전히 변용돼 버린다.”

23,24) 단색화 작가들의 반복적인 행위나 작품의 양태를 매너리즘으로 보는 관점이 흔히 야기하는 비평적 오류가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이다. 오래 전에 윤형근은 작품의 변화를 촉구하는 나의 비평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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