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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역사와 21세기 미술관의 역할

하계훈

1. 미술관이란?

미술관(美術館)은 여러 종류의 박물관(博物館) 가운데 하나로서 과학 자료를 중심으로 다루는 과학 박물관, 역사 자료를 중심으로 다루는 역사 박물관과 함께 박물관의 중요한 세 분야를 형성하고 있다. 즉 미술관이란 미술박물관(美術博物館)의 줄인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술관은 박물관의 일반적인 성격을 대부분 공유하고 있다. 미술관/박물관의 정의는 국제 박물관 협회(ICOM, 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미국 박물관 협회(AAM, American Association of Museums), 영국 박물관 협회(Museums Association)등의 기관에서 천명하고 있는데 그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박물관을 ‘비영리적이고 항구적인 기관으로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대중에게 개방하기 위하여 소장품을 수집하고, 보존하며, 연구하고 전시하는 연구 및 교육 기관’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Timothy Ambrose and Crispin Paine, ‘Some Definitions of museum 1994, pp.15-16)

우리 나라에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별하여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굳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분리하여 설명하려는 논리를 살펴보자면, 미술관이 과학 박물관이나 역사 박물관들과 다르게 모조품이나 복제품을 다루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언제나 진품을 그 취급 대상으로 한다는 점일 것이다. 로케트의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 박물관에 전시된 로케트의 부품이나 완성품이 진품이어야 한다거나 선사시대의 주거지를 재현한 역사 박물관이 집 짓는 재료를 수 천년 전 것을 그대로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로케트나 선사 시대의 주거지는 동시에 여러 곳의 박물관에 세워질 수 있지만 모나리자는 동일한 작품을 여러 곳의 미술관에서 동시에 전시할 수가 없다.
이러한 미술관 자료의 제한성은 전체 박물관의 숫자 가운데 미술관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을 차지하게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작품의 경향과 재료가 다양해져 가면서 이제까지 미술관에서 중요시하던 원본의 유일성에 대한 가치 부여가 점차 느슨해져 가는 경향이 있다.


2. 미술관의 역사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미술관의 역사는 박물관의 역사를 통해서 대부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박물관을 뜻하는 영어의 뮤지엄(museum)은 그 어원으로 볼 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문예의 여신 뮤즈(Muses)의 거처인 신전을 뜻하는 뮤제이언(Museion)에서 유래하였다.
그 어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미술관/박물관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출발한 기관으로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학문과 예술의 보존과 연구 그리고 그 연구 결과를 가지고 교육을 통해 보급을 담당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미술관/박물관의 고대적 원형은 흔히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미 1세(Ptolemy I Soter)가 자신의 궁전 한편에 각종의 진귀한 수집품과 미술품 및 희귀 서적을 모아 놓고 뮤제이언이라고 부른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도서관과 박물관을 합쳐놓은 형식으로서 이때문인지는 모르나 서양의 박물관/미술관의 관리자나 도서관의 사서가 모두 큐레이터(curator)로 불렸던 시기가 있다. 프톨레미 1세는 자신이 세운 뮤제이언에 많은 학자들을 수용하여 소장품을 연구하고 학자들간에 서로 토론을 하도록 장려하였는데 이러한 기능은 또한 오늘날의 대학의 기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박물관/미술관이 학문적 연구를 그 기능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사람들은 도시마다 신전을 세워 자신들의 신을 봉안하고 이 신전에 공물을 헌납하였는데 경우에 따라서 이렇게 헌납된 공물들은 별도의 건물에 보관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공물들은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경우에 따라 약간의 관람료가 부과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어로 회화관을 뜻하는 피나코텍(pinakotheke)은 이 무렵 신전에 바쳐진 그림들을 소장, 전시하는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일부 국가에서 미술관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로마 시대는 그리스 시대에 비해 미술품과 진귀한 물건들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기회가 적었다. 전리품을 중심으로 황제와 귀족, 장군들이 수집한 소장품들은 궁전과 저택에 소장됨으로써 일반인의 접근 기회가 많지 않게 되었다.

중세에는 교회가 모든 지적, 예술적 생활의 중심이었으며 따라서 박물관/미술관의 기능도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동로마 제국이 터키족의 공격으로 멸망해가는 과정에서 많은 수의 학자와 예술품, 자료 등이 서로마로 건너온 것들도 주로 교회에 보존되면서 서양 문화의 명맥을 이어오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을 겪는 동안 유럽인들은 보다 넓은 지역을 여행하게 되었으며 이러는 가운데 미술품과 진귀한 물건들이 매매, 수집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 교회의 예술과 학문 보호 역할이 세속의 상업 귀족들에게 넘어간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家가 세운 우피치(Uffizi) 갤러리는 이러한 중세 박물관/미술관의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다.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17세기로 들어선 서양에서 이제 박물관/미술관의 수집과 보존 기능은 군주들의 손으로 넘어간다. 유럽 각 나라의 군주들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진귀한 예술품과 골동품들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자신들의 궁전 한 부분에 진열하고 제한된 소수이기는 하지만 외부인들에게 과시하여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 소장품의 공개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오늘날 박물관/미술관의 기본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인 연구와 교육의 기능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루이 14세가 1678년 왕궁을 루브르에서 파리 근교의 베르사이유로 옮기면서 루브르 궁전은 미술품을 보관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이 부여되어 당시 재상었던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 1619-83)가 왕명을 받아 궁전의 일부분에 아폴론 갤러리(Gallery)를 설치하고 미술품들을 진열하였다.
근대적인 의미의 박물관/미술관의 효시는 1683년 영국의 애쉬몰卿이 자신이 평생동안 수집해 온 소장품을 옥스퍼드 대학에 기증하여 세운 현재의 애쉬몰 박물관으로서 특히 영국의 경우에는 이처럼 귀족들의 소장품이 정부에 기증되면서 공공 박물관/미술관이 문을 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1789년의 시민 혁명의 후속 조치로서 혁명 정부가 루브르의 왕실 소장품을 대중에게 공개한 것이 오늘날의 박물관/미술관의 첫 발걸음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왕실의 소장품과 반혁명 귀족 세력의 소장품들은 혁명 정부의 손에 몰수되어 파괴될 운명에 놓여 있었으나 계몽주의자들이 이들 소장품이 대중 교육에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펴서 귀중한 예술품들이 파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이처럼 예술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논리에서 대중들에게 개방되는 과정에서 초기에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었다. 호기심에 찬 군중들이 몰려 들어오면서 작품이 파손되거나 도난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박물관 측은 박물관을 일시적으로 폐쇄하고 작품의 보안 조치를 강화하여 다시 문을 열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박물관/미술관들이 대중에게 문을 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영국의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1847년 개관), 스페인의 프라도(Prado) 미술관(1810년 설립), 러시아의 에르미타쥬(Hermitage, 1764년 설립) 미술관, 암스테르담의 국립 미술관(Rijksmuseum, 1817년 개관) 등이 있다.


3. 우리 나라의 미술관의 역사

우리 나라의 박물관/미술관의 역사는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원형을 추적할 수 있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견당사가 중국으로부터 비단과 병풍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며 이렇게 가져온 진귀한 물건들은 일정한 장소에 보관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밖에도 백제와 신라의 임금들이 진귀한 동식물을 수집하여 임류각(臨流閣), 안압지 등의 인공적인 정원을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도 박물관의 원시적인 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왕실을 위한 동, 식물원 성격의 공간이 있었으며 예종과 의종 때에는 서화를 수집하여 진열하고 이러한 저장고의 경비를 엄중히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오늘날의 미술 전시장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공간이 존재하였음을 미루어 추측해 볼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 우리 나라에 박물관이 처음 탄생한 것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던 1909년에 李王家 博物館이 일반에게 공개되면서부터다. 1907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동물원, 식물원 및 박물관의 설립은 1908년 御苑事務局이 설치되고 1912년에는 이왕가 박물관의 완공을 보게 된다.(이난영, <박물관학 입문> 76-82쪽)
한편 1909년 덕수궁에 석조전이 완공되자 이 곳에는 고종 재위 당시 외국 사신들이 가져온 각종의 진귀한 물건들이 보관되고 일본의 근대 미술이 전시되기도 한다. 1938년에는 덕수궁 내에 새로운 미술관이 세워지고 이왕가 박물관에서 미술품들이 이곳으로 분리 이관되어 이왕가 미술관이 설립된다. 이 건물은 8개의 전시실 이외에 수장고, 강당 등 미술관으로서의 제 모습을 갖춘 우리 나라 최초의 미술관이었다.
이왕가 미술관은 해방되던 이듬해인 1946년 덕수궁 미술관으로 개칭되었고 6.25 동란을 겪으면서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1953년 환도하여 1969년 국립 현대 미술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덕수궁에 머무르다가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던 해인 1986년 지금의 자리인 과천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국립 현대 미술관 이외에 중요한 미술관으로는 1982년 개관한 호암 미술관, 1971년 첫 전시회를 개최한 간송 미술관등이 있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 선재 미술관, 월전 미술관, 성곡 미술관, 금호 미술관 등의 사립 미술관들이 설립되게 된다.

4. 미술관의 주요 기능

지금까지 간단하게 살펴 본 것처럼 박물관/미술관은 인류의 수집의 역사와 함께 탄생하여 귀중한 문화 유산을 보존, 연구하고 그 결과를 대중에게 교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근대 시민 사회가 도래하면서 박물관/미술관은 대중을 위한 사회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각 나라마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설립하는데 적지 않은 힘을 기울였던 것은 이처럼 미술관과 박물관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물관/미술관이 대중에게 공개되던 초기에는 교육적, 예술적 의미보다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평등권의 실현이라는 점이 보다 더 강조되었다. 이 때문에 관람객에 대한 체계적인 안내와 교육이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주로 소장품을 보호하고 제한된 인원이 접근하여 연구하는 장소로서 박물관/미술관이 그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전에는 구경하기 힘든 진귀한 물건들과 예술품들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호기심에 찬 대중들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이 초기 박물관/미술관 근무자들의 고민이었다. 이러한 박물관/미술관의 초기 상황은 프랑스의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의 소설 <목로 주점>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유럽의 경우 박물관/미술관은 계몽주의자들의 철학을 실현시켜 주는 장소로서 예술을 통해 인성을 교육하고, 나아가 사회를 바르게 인도하는 도구로서의 박물관/미술관의 역할이 지도층의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미술이 도덕적 건실성의 척도(index of a societys moral health)가 된다고 말했다. 즉 박물관/미술관을 통한 대중 교육은 대중의 미의식 개발 차원을 넘어 대중의 정신 문화를 통제하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의 박물관/미술관의 탄생 배경이기도 하며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이러한 생각은 긍정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예술품을 통한 국민 계몽 활동이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으며 권력과 부가 맹목적적으로 추구되는 사회로 이행해 갈수록 예술의 역할은 무시되거나 천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박물관/미술관을 통한 국민 교육에 한계를 안고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박물관/미술관의 사회 교육 기능은 보다 커다란 틀로서의 정치, 경제, 교육 등의 분야와 긴밀히 협조하여 펼쳐 나아가야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미술관은 또한 계층간의 갈등이 완화되는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서양의 경우 근대 산업 자본가의 부의 축적 과정을 바라보는 대중의 부정적 시선을 누그러뜨리는 방편으로서 사회 각 분야에 환원되는 부의 상당 부분이 박물관/미술관을 통해 가시화되었고 이것은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중요한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박물관/미술관의 이러한 역할은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나 이제까지 이 부분이 서양에 비하여 훨씬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박물관/미술관은 대외적으로 국가의 위신을 세우는 상징적 도구이며 관광 산업의 틀을 짜기에 좋은 재료다. 따라서 박물관/미술관의 본질적인 기능인 보존, 연구, 교육 등의 기능이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소홀히 다루어질 위험성이 있는데 이 부분은 엄중히 경계되어야 한다. 박물관/미술관의 전문 직원이 중심이 되어 박물관/미술관의 본분에 충실한 가운데 국가가 행정적으로 지원하기만 하고 간섭을 최소화하는 운영방식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5. 21세기 미술관의 역할

고대부터 20세기까지의 박물관/미술관이 담당해 온 기본적인 역할이 21세기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전면 부정되거나 대폭 수정될 필요는 없다. 어느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는 것이며 박물관/미술관의 경우에도 소장품의 수집과 보존, 연구와 해석, 그리고 대중을 향한 교육과 여가의 제공 등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 새로운 사회 현상에 따르는 몇 가지 임무가 부가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제까지 박물관/미술관이 맡아온 사회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좀 더 세분화 전문화하여 정규 교육의 보조적 역할로서의 교육 기능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평생 교육 기능으로서의 박물관/미술관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교육 기능을 담당할 전문 인력이 체계적으로 양성되어야 한다. 보다 입체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을 위하여 이제까지 박물관의 고유 활동 범주에 들지 않았던 공연, 영상물 방영 등의 행사를 도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분야의 전문기관과 제휴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최근 새롭게 요구되는 박물관/미술관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보다 편안한 휴식의 장소로서의 박물관/미술관에 대한 요구다. 점차 소장품의 숫자와 부대행사 등의 규모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박물관/미술관 공간도 점차 확대되는 추세에 있는데 이는 관람객의 감상의 폭을 넓혀주는 동시에 물리적으로 관람객의 피로감을 더해줄 수도 있다. 따라서 전시장 안에서 관람객이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는 점을 고려하여 적당한 간격을 두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식 공간에 대한 배려나 점차 늘어가는 관람객의 숫자가 초래하는 공중 위생의 문제 등에도 새롭게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최근에 등장한 인터넷을 통한 가상 공간으로서의 박물관/미술관 기능을 어떻게 현실 공간과 조화롭게 병행시키며 박물관/미술관들 사이에 자료와 정보 교환을 위한 네트워킹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가의 문제를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 분야의 기술은 더욱 빠르게 발달할 것이고 이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박물관/미술관 근무자들의 환경이 새롭게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박물관/미술관 관련자들의 사고의 전환과 실질적인 측면에서 조직의 재편성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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