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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를 통해서 본 국제교류의 성과와 반성

하계훈

1. 서론

1995년 광주비엔날레가 처음 출발한 이후 2002년까지 4차례의 행사가 개최되었다. 비엔날레(Biennale)라는 용어가 의미하듯 이러한 형태의 국제미술 전시행사는 원칙적으로 2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어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과 평론가, 큐레이터 등이 한군데 모여 작품을 비교 감상하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관람객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지역의 새로운 미술경향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일종의 미술축제의 장에 참여하는 것이다.

비엔날레 가운데 가장 오래된 베니스 비엔날레의 경우 1895년에 시작하여 2차 세계대전 무렵에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지속되어 2001년 49번째 행사를 치렀다. 미술 전시에 있어서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비엔날레 행사나 이와 비슷한 도큐멘타(Documenta) 1)독일의 카셀(Kassel)시에서 1955년부터 시작하여 초기에는 4년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5년마다 개최하는 미술행사로 2002년 11회전시가 개최되었다.
마니페스타(Manifesta) 2)1996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처음 열린 이후 매 2년마다 유럽 전역의 문화예술 네트워크 구축을 목적으로 유럽지역 안에서 장소를 바꿔가며 열리는 미술행사. 2002년에는 프랑크프르트에서 개최되었다.

와 같은 국제 행사들 이외에 199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을 거점으로 비엔날레 형식의 행사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진행되는 비엔날레의 수만 하더라도 이미 120개 정도나 되고 그중 상당수가 광주비엔날레처럼 비서구권에서 각 지역의 문화선전과 이에 따르는 관광이나 지역개발 등의 산업적 파급효과를 노리며 비슷비슷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광주비엔날레의 입장으로 볼 때 어느 면에서는 이러한 행사들과 경쟁적인 관계에 처해있는 셈이다. 3)동아시아권의 주목할 만한 비엔날레와 이와 유사한 형식은 대만의 타이페이 비엔날레(1998년 출범), 중국의 상하이 비엔날레(1996년 출범), 그리고 일본의 요코하마 트리엔날레(2001년 출범) 등이 있다.


비엔날레의 중요 목적 가운데 하나가 미술을 통한 국제교류이고 이 교류의 의미를 넓게 해석하여 미술부문에 있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국제교류를 포함한다면 동, 서양 모두 오래 전부터 미술상의 국제교류가 진행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 개인의 개별적인 국제활동과 무역이나 외교활동 등에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국제적 미술교류를 제외한다면 미술에 있어서의 국제교류의 틀을 잡은 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군주들이 세력을 쥐고 있던 시대의 왕립 미술아카데미나 산업혁명의 결과로서의 기술적 진보를 국제적으로 경쟁하며 자랑하던 만국박람회의 일부분으로 개최되었던 미술전시가 두 가지 중요한 계기를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베니스 비엔날레도 파리의 만국박람회의 형식을 빌어 출발하였으며 이러한 베니스의 비엔날레 형식은 뒤이어 창설되는 많은 비엔날레 행사에 의해 참조되거나 극복되어왔다. 그밖에도 상업화랑들의 국제 아트페어, 각국의 신문사의 국제적 성격의 전시 개최, 주재국 문화원을 통한 미술전시 등이 있으나 오늘날 가장 대표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그 파급효과가 극대화되는 국제 미술교류 행사는 비엔날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우리 나라를 포함한 세계의 국제 미술교류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우리 나라에서 열리는 국제미술행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광주비엔날레를 중심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국제문화교류를 통한 이제까지의 성과와 여기서 얻은 우리의 역량에 대한 검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국제 미술교류의 역사

오랜 옛날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하고 과학적 지식이 모자라는 까닭에 미지의 상황에 대한 공포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잘 모르는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건 차원의 중대한 결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 사이의 인적, 물적 교류가 별로 활발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공포와 무지는 과학기술의 진보와 이에 따른 인간 이성의 발달로 점차 극복되기 시작하였다.

서양의 경우 중세의 무지와 미신에서 벗어나 십자군 전쟁, 지리상의 발견, 종교개혁운동 등을 거치면서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고 예술적 감각이 향상되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교통 및 통신수단의 발달에 의해 점차 더 넓은 지역 사이의 인적, 물적 교류가 증가하게 되었다.
미술분야에 있어서 르네상스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17년 프랑스 국왕 프랑스와 1세의 부름을 받고 프랑스의 앙브와즈로 가서 건축, 운하 공사에 종사하고 ,4)지오르지오 바사리(이근배 역)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 (탐구당, 1985) 633-46쪽 참조
베네치아의 화가 티에폴로(1696-1770)는 오스트리아, 독일, 스페인 등으로 초빙되어 군주의 저택에 천정화를 그렸으며 스페인의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츠는 국왕의 명령을 받고 로마에서 작품을 매입하면서 1650년 성요셉 축일에 열린 미술품 전시에 출품했던 사실처럼 5)Robert W. Berger, Public Access to Art in Paris-- A Documentary History from the Middle Ages to 1800,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9) p.62


르네상스 이후 미술분야에 있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국제적 교류는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미술교류를 제외하고 하나의 제도로서의 미술의 국제교류의 틀을 마련한 것은 아카데미(Academy)의 공로라고 볼 수 있다. 아카데미란 원래 그리스시대 플라톤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교육의 장소에서 유래하였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플라톤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면서 이탈리아에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의 미술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두 기관으로는 1562년에 피렌체에 문을 연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Academia del Disegno)와 1577년 로마에 설립된 아카데미아 디 산 루카(Academia di San Luca)를 들 수 있다. 피렌체 아카데미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반면에 로마의 아카데미는 보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운영되었는데 1648년 파리에서 문을 연 프랑스의 미술 아카데미(Acadmie des Beaux-Arts)는 로마의 아카데미를 본보기로 설립되었으며 이 뒤를 이어 유럽의 각국에 미술 아카데미가 생겨나게 된다. 나중에 로마의 아카데미아 디 산 루카는 프랑스가 파리 아카데미의 분관 형식으로 로마에 세운 아카데미 드 프랑스(Acadmie de France)에 형식상으로 흡수되면서 양 기관의 교사들의 교류가 일어나기도 한다. 6)아카데미의 전개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독일출신의 미술사학자 니콜라우스 페브스너의 <미술 아카데미의 역사> (다민 1992)를 참조할 것

이러한 미술 아카데미는 처음에는 궁중 화가들이 회비를 걷거나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아 자체적으로 운영하였지만 점차 군주의 보호와 후원을 받게되면서 후원자의 취향을 반영하는 공식적인 미적 기준을 채택하게 된다. 초기의 아카데미는 중세부터 이어온 길드조직과 대립하게 되는데 길드조직은 외국의 예술가가 자국에 유입되어 작품 제작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 지역의 작가가 자신이 소속되어 있지 않은 다른 지역에서 작품제작 주문을 받는 것도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서 지역간, 국가간의 미술교류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자유경쟁 경제에 반발하는 조직이었다. 7) A.하우저(백낙청, 반성완 공역),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근세편 상> (창작과 비평, 1980) 26-8쪽, 46-8쪽, 68-70쪽 참조

아카데미가 길드조직과 대항하여 왕실의 보호와 후원을 얻어내게 된 것은 미술의 국제교류 측면에서 다행스런 일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서 아카데미는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르 살롱(Le Salon)전을 통해 자국의 미술가들의 창작을 지원하고 격려하면서 외국 작가들에게도 출품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8)1824년 파리 살롱전에는 영국의 풍경화가 컨스터블이 유명한 <건초마차(Haywain)>를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이 작품은 젊은 들라크르와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Horst de la Croix, Richard G. Tansey, Art Through the Ages (HBJ, 1986) p.832

근대에 들어서 미술의 국제교류에 더욱 박차를 가한 계기 가운데 하나는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개발의 성과를 국제박람회라는 형식으로 발표하면서 산업생산뿐 아니라 예술적 영역에서도 국제적인 교류와 경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근대적인 국제박람회의 효시로 알려진 1851년 런던의 박람회 9)정식 명칭은 <만국산업물산대박람회(The 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ustry of All Nations)>.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제 13집 (2000 상반기) 75-106쪽 참조

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첨단 건축기법으로 수정궁(Crystal Palace)을 지어 전람회장으로 활용하였으며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박람회의 미술전시장도 관람객에게 미적 감동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전시는 정해진 기간동안만 전시된다는 제한점이 있었으나 세계 각국의 미술품을 한 장소에 모아서 집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형식상 오늘날의 비엔날레 행사와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었다.

14,000점의 제품과 작품이 출품되어 600만 명의 관람객을 끌어들이며 성공을 거둔 이 박람회는 1853년 뉴욕 세계박람회, 유명한 에펠탑이 세워지게 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등으로 이어지면서 20세기에도 계속되어 그 규모와 내용을 확장시켜 갔으며 마침내 1928년에는 파리에서 만국박람회의 개최에 관한 국제박람회조약을 체결하고 국제박람회협회가 탄생하게 된다. 계속해서 국제박람회는 유럽과 미주 이외의 지역으로 확산되어 우리 나라에서도 1993년 국제박람회협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대전 엑스포 ‘93>이 열리게 된다.

오늘날의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사실상 어느 지역이 이제 더 이상 외부와 단절된 고립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까지 전세계의 심리적, 물리적 간격을 좁혀놓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어져 오는 국제박람회는 점차 그 내용이 세분화되며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각 지역간의 긴밀한 연계와 상호소통을 증진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 네트워킹의 주무대로서 세계박람회가 잉태시킨 미술분야의 대표적인 행사가 비엔날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미술의 국제교류

한국의 미술이 국제적인 교류를 시작한 시기는 기록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백제의 아좌태자(阿佐太子)가 597년 일본으로 건너가 <성덕태자와 이왕자상(聖德太子及二王子像)>을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거나 고구려의 담징(曇澂)이 6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법륭사(法隆寺) 벽화를 그렸다거나, 가서일(加西溢)이 성덕태자 사망 후 극락왕생을 빌기 위하여 제작된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의 밑그림 제작에 참여하였다고 전해지는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이웃나라와의 교류가 있었다. 10) 안휘준, <한국의 미술과 문화> (시공사, 2000) 51-8, 321-4쪽 참조

이러한 교류는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이어지며 19세기 말 우리 나라가 복잡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일본, 미국, 프랑스 등의 국가들과 잇따른 통상수호조약을 맺으며 좀 더 폭넓게 전개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우리 나라는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일명 신사유람단)을 파견한다든지 1899년 우리 나라에 온 미국화가 휴고 보스나 1900년 파리에서 온 셰브르 공예학교 교사 레미옹 등을 통해 서양미술의 한 단면을 접하는 한편 서양에서 개최되고 있는 박람회에 대해서도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1884년 한성순보 제 15호에는 짤막하게 런던 박람회에 대해 실린 적이 있으며 1889년 유길준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 박람회에 대해 언급을 하기도 했다. 11)이구열, ‘1990년 파리 萬博의 韓國館“ <근대한국미술사의 연구>(미진사 1992) 153-161쪽 참조

마침내 우리 정부는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콜럼버스의 미국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서 열린 만국박람회(World Columbian Exposition, Chicago)에 최초로 참가하게 된다.
하지만 이 박람회에 출품한 한국의 물품들은 가마, 식기, 신발, 장기판, 연 등 본격적인 미술품이기보다는 공예적 성격이 강한 물품들 12) 이 박람회의 출품을 준비한 주무부서가 농상공부(農商工部)인 것으로 보아서도 출품된 물품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상세한 물품목록은 김영나의 글 101-4쪽 참조
이며 박람회에 설치된 여러 건물 가운데 <미술관(The Palace of Fine Art)>에 전시되지 않고 민속촌 성격의 <제조와 교양관(Manufactures and Liberal Arts Building)>에 전시되었다. 이러한 민속공예적인 물품의 전시는 1900년에 파리박람회에서도 계속되는데 이 박람회에서 우리 나라는 별도의 한국전시실을 세우고 이전과 같은 공예품 이외에 도자기나 그림, 금박을 입힌 木造佛 등 순수 미술품에 속하는 물품들도 전시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1890년에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라는 사람이 전시를 참관하고 “한국문화가 얼마나 섬세한가...기하학적으로 완벽하며 아름답다...중국보다 세심한 관찰력이 있어 환상적”이라는 평을 남겼다. 13) 이구열, 앞의 글 155쪽

우리 나라의 이러한 국제박람회 참가 이외에 미술 분야의 국제적 교류는 일본을 중심으로 인적, 물적 교류가 이어지다가 해방과 건국 이후 6.25전쟁을 지나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과의 교류가 진행되며 일본과의 공식적인 교류는 양국 사이의 국민감정때문에 상당기간동안 단절된다. 휴전 이후 가장 빠른 시기에 열린 외국작품의 국내전은 1953년 서울신문사 주최로 열린 <벨기에 현대미술전>으로 6명의 작가 작품 80여 점이 소개되었다. 1957년에는 <미국현대회화조각 8인전>이 소개되는가 하면 고희동 외 12명의 작품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전시회를 갖는 것을 비롯하여 60년대와 7,80년대를 거쳐 파리, 뉴욕 등을 중심으로 한 서양과 도쿄, 타이페이, 마닐라 등의 아시아 지역에서 현대 미술을 중심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1961년에는 파리 비엔날레, 1963년에는 상파울로 비엔날레 등의 국제행사에도 참가하기 시작하였고 1986년부터는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14)국제교류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달진의 <바로보는 한국의 현대미술> (발언, 1995)의 375-433쪽 참조

1980년대부터는 호암미술관, 워커힐미술관 등의 사립 미술관들과 가나화랑, 진화랑, 신세계와 롯데 백화점 부설 화랑 등을 통해서도 외국 전시들이 소개되었으며 1986년 아시안 게임을 기점으로 과천으로 확장 이전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보다 많은 국제적 성격의 전시가 개최되었으며 1988년 올림픽을 기회로 잠실의 올림픽 공원 내에 국제적 성격의 조각전이 열리고 그 결과물들이 현장에 영구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외국작품의 국내전들은 순수한 예술적 의도보다는 당시 한반도가 처해있는 군사적, 정치적 환경과 관련되거나 15)예를 들어 1957년의 <미국현대회화조각 8인전>은 시애틀 미술관에서 기획하고 미국공보원(USIA)에서 후원하였는데 그해 7월 22일자 타임지에 실린 내용을 보면 이 전시의 중요한 의도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의 예술가가 국가의 통제하에 작업하는데 비하여 미국 미술가들이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Moojeong Chung, Abstract Expressionism, Art informel, and Modern Korean Art, 1945-1965, (PhD. thesis, City University, N.Y. 2000) pp.132-3참조
앞뒤의 전시와 관련된 맥락에서 필연성을 갖지 못하는 산발적인 전시회들이 많았으며, 우리 미술의 해외진출도 미술 전문가들이 아닌 행정공무원들의 손에서 처리되면서 졸속으로 기획되고 전문적인 경험축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 그 한 예로 197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하여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를 돌며 전시된 <한국회화 유럽순회전>은 그 무렵 우리 미술의 국제교류 역량을 잘 보여준다. 이규일, “한국회화 유럽 순회전의 명암”, <뒤집어 본 한국미술> (시공사, 1993) 243-54쪽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크고 작은 미술분야의 국제교류와 아시안 게임, 올림픽, 엑스포 등으로 우리 나라가 국제적 감각을 조금씩 키워 온 연장선상에서 결국 1995년 광주비엔날레가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광주비엔날레를 통한 국제교류의 성과와 반성

비엔날레라는 미술행사는 그 내용상 예술적임을 표방하지만 개최동기가 매우 정치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운영상으로도 국제적 규모의 행사이므로 개최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담당자나 주제선정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 경우가 있다. 17)예를 들어 2003년에 예정된 제 50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감독(director of visual arts) 임명을 둘러싼 정부측과 재단의 갈등은 이러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Rossella Lorenzi, ' A 'Soap Opera' Biennale--Battles over appointments to run Venices top cultural events become part of the show', (ARTnews, 2002년 5월호) 70쪽 참조
현재까지 개최되는 비엔날레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베니스 비엔날레의 경우도 국왕의 은혼식을 기념하여 군주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 베니스 공화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시관의 운영을 국가가 주관하여 25개의 국가관에 각 정부로부터 선정된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자국의 전시관이 없는 국가들은 시내의 여러 곳에서 임시 전시장을 빌어 행사를 치른다. 18) 천윤희, <문화매개 개념을 통해 본 광주비엔날레 진흥방안 연구> (경희대 석사논문 2002) 26-8쪽 참조

그리고 최근에 개최된 비엔날레 가운데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이 종식되고 새로운 민주정부의 출범을 알리는 기회로 삼기 위하여 개최되었으며 타이페이 비엔날레의 경우에는 1990년대부터 중국의 국제적 진출이 확대됨에 따라 대만이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실리추구 위주의 외교활동으로 인해 국제적 고립의 위기에 처한 상황을 돌파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92년부터 타이페이 시립미술관이 실시해오던 전시를 국제적으로 확대시켜 출발하였다. 광주비엔날레의 경우에는 새로 들어선 문민정부의 입장에서 광주가 받은 1980년 민주화운동의 상처를 어떠한 형태로든 어루만져 주어야했으며, 비엔날레가 시작된 1995년은 정부가 선언한 ‘미술의 해’였고 때마침 대통령은 ‘세계화’를 언급하고 있었으므로 여러 가지 정황이 비엔날레를 개최할 명분을 충분히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 그러나 진행과정에서의 준비부족과 공무원들의 일과성 행사쯤으로 여기는 의식수준, 지역주민들과의 공감대 형성 실패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시각차이 등으로 인해 첫 행사는 ‘광주비엔날레’라는 관변적 행사와 5.18묘역 주변에서 열린 ‘광주통일미술제’라는 시민사회 중심의 안티광주비엔날레 성격의 행사가 동시에 개최되었다. 조인호, “인류사회로 향한 문화의 창, 광주비엔날레” <남도의 숨결> (다지리, 2001) 295-305쪽 참조

광주비엔날레는 대부분의 비엔날레가 그러하듯이 출발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20)이와는 다르게 1932년 창설된 미국의 휘트니(Whitney)비엔날레의 경우는 철저하게 미국 미술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행사다.

주최측이 창설 취지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의 민주적 시민정신과 예술적 전통을 바탕으로 건강한 민족정신을 존중하며 지구촌시대 세계화의 일원으로 문화생산의 중심축”으로서의 역할을 모색하며 “동, 서양의 평등한 역사창조와 21세기 아시아 문화의 능동적 발아를 위해서 그리고 태평양시대 문화공동체를 위하여” 미술이라는 표현형식을 빌어 국제적 소통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처럼 광주비엔날레 역시 미술형식을 도구화하여 문화행사 이외에 국내의 정치적 화해나 국제적 외교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점을 감추지 않고 있으며 실천적이기보다는 선언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있고, 당시의 최고 통수권자의 의지를 거스르지 않고 ‘지구촌시대’나 ‘세계화’와 같은 구호를 삽입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어서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유럽의 비엔날레 행사들과 비교해 볼 때 관주도적인 성격이 많이 드러나고 있었다.

제 1회 광주비엔날레에는 우리 나라의 국제미술 교류 역사상 가장 많은 51개국에서 94명의 작가들이 7개의 권역으로 나뉘어 각 지역 담당 커미셔너에 의해 초대되었다. 총예산 180억 원으로 기획된 이 행사는 건국이래 단일 행사로는 최대규모로서 정해진 짧은 기간 동안 외국의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을 소개하는 행사였고 무엇보다도 외국의 최신 예술경향에 대하여 관심이 적었거나 별로 아는 것이 없었던 국내의 미술인들과 관람객들에게 현대미술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와 관점을 자극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비엔날레 행사를 통한 국제교류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비엔날레 측은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고문, 자문위원, 명예 홍보대사 등으로 위촉하여 협력관계를 넓히는 시도를 해왔으며 각 분야별 인사들을 초청간담회나 학술세미나 형식으로 국내에 초청하거나 외국 현지에서 행사를 열고 초청하기도 하였다. 21)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2002광주비엔날레 결과보고서-- 도약을 위한 멈춤> 3쪽 참조

이제까지 네 차례의 비엔날레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우선 첫 회에는 <경계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전세계의 작가들을 초청하면서 제3세계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황으로는 본전시의 시상제도에 의해 대상 수상자로 결정된 작가가 당시로서는 무명작가였다고 할 수 있는 쿠바의 크쵸로 결정된 점을 들 수 있다. 크쵸의 경우처럼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국제미술계에 제 3세계 작가들을 진출시킨 것이 광주비엔날레의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광주비엔날레의 출발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99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수입한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전>의 주제가 <경계선>이었고 22)국립현대미술관, <1993 휘트니비엔날레 서울> (삶과 꿈, 1993) 52-6쪽 참조
이 행사에 휘트니 미술관측의 코디네이터 자격으로 참여한 미술평론가 이용우가 제 1회 광주비엔날레의 전시총감독 역할을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광주비엔날레의 탄생에 휘트니 비엔날레가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1997년 두 번째 열린 비엔날레는 <지구의 여백>이라는 주제 아래 속도/공간/혼성/권력/생성이라는 소주제를 선정하고 각 소주제별 커미셔너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비엔날레측의 자체 결과보고서에 의하면 제 2회 광주비엔날레는 국내외 전문가들과 언론으로부터 전시 형식적인 측면과 내용적인 측면에서 질적인 향상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23) 천윤희, 앞의 논문 45쪽에서 재인용
특히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리던 해럴드 제만이라는 독립큐레이터를 영입하여 광주비엔날레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였다.

제 3회 전시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정도로 나빠진 국내 경제사정 때문에 당초 예정된 1999년에 열리지 못하고 한해 뒤에 열렸는데, <인(人)+간(間)>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전반적으로 아시아성을 강조하면서 북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미술의 주변부를 중심으로 끌어드리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이 전시 역시 6명의 커미셔너에 의해 6개의 권역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1회부터 3회까지 커미셔너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기획방식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진행상의 시간적 제약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으며 작가선정에 있어서 개인의 독점적 판단이 지배하는 구조를 견제할 수 있다는 장점과 커미셔너의 자질에 의해 전시의 질이 좌우되거나 상대적으로 방만한 제도에서 오는 주제에 대한 집중성이 저하될 위험이 있다는 단점이 함께 지적되고 있다. 24) 천윤희, 앞의 논문 46-7쪽 참조

2002년에 열린 제 4회 전시는 이제까지의 전시감독과 커미셔너로 구성된 집행조직을 바꿔 전시총감독을 포함한 공동 큐레이팅 방식을 채택하였다. 전시에 있어서는 본 전시와 부대전시나 특별전시로 구성되는 방식을 바꿔 동등한 비중을 둔 네 개의 프로젝트로 구성하였으며 내용상으로는 의도적으로 세계 미술문화의 중심인 미국을 배제하고 유럽과 아시아 등의 미술에서 대안공간의 미술들을 끌어들여 계속해서 이전의 전시와 마찬가지로 주변부의 중심진입, 혹은 양 진영간의 대등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주변부와 중심 사이의 관계는 올해 개최된 제 11회 카셀 도큐멘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 결과 미국인들 가운데에는 카셀 도큐멘타를 ‘지구촌 좌파들의 미국에 대한 증오’라고 해석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번 도큐멘타의 예술감독인 나이지리아 출신의 오퀴 엔웨조(Oqui Enwezo)도 카탈로그 서문에서 9.11테러사태를 ‘서구의 가치에 대한 보복’이라고 표현하여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감추지 않고 있어 근래에 와서 서구 중심의 체제가 예전과 다르게 주변부로부터 도전받고 있으며 광주비엔날레도 여기에 소극적이나마 일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5) Niklas Maak, 'Documenta beats its own record--Renaissance of utopia replaced an elegiac Nihilism at the 11th quinquennial art show in Kassel', (Frankfurter Allegemeine Zeitung Sept. 20. 2002)

이제까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행사를 통해 광주비엔날레는 비록 광주 자체의 힘만으로 이룩한 것은 아니지만 국제적 문화중심으로서의 광주, 그리고 나아가 우리 나라의 위치를 서서히 굳혀가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국제 위상제고와 연결되며 개별 작가의 국제적 활동 여건도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를 통하여 미술 저널리즘이나 미술 이론가와 전시기획자들, 그리고 나아가 문화산업 종사자들이나 일반 관람객들도 시야를 국제적인 지평으로 넓히고 새로운 자극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2000년 제 3회 전시를 치른 비엔날레 측은 자체 평가에서 비엔날레의 성과를 첫째, 광주-한국-아시아로 확산되는 지역적 정체성의 확보, 둘째, 흑자운영, 셋째, 주관 부서 민영화를 통한 민-관 협력모델 창출,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람객의 질적 개선을 통한 문화기반의 확대로 들고 있다. 26)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2000광주비엔날레 결과보고서--회고와 전망>
그리고 2002년 제 4회 전시에 대한 평가보고서에서는 조직의 재정운영, 전시, 홍보 마케팅, 관람객 조사를 통해서 제 4회 광주비엔날레를 분석하였는데 주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제안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주비엔날레가 이룩한 성과나 행사의 준비, 진행, 수습을 통해 나타난 문제점을 짚어보는 것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국내,외 언론의 보도나 미술관계자들의 평가를 통해 많은 점들이 지적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차기 전시회가 개선되어 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 새롭게 언급되는 성과나 여태까지 지적되지 않고 지나친 문제점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다만 이제까지의 문제점 가운데 아직 해결이 미흡한 사항들을 간단하게 지적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광주비엔날레를 두고 거론되는 몇 가지 문제점은 첫째로 아직까지 전문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우선 비엔날레 자체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데서 오는 밀린 숙제이므로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비엔날레가 채택해온 커미셔너 제도나 공동 큐레이터 제도에서 외국의 경험 많은 기획자들을 국내의 기획자들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하여 전시를 진행하고, 여기에 보조자로서 젊은 인력들이 그들로부터 배우며 경험을 쌓아오고 있으므로 미래에는 좀 더 전문적인 인력들이 주축이 되어 행사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제까지 계속적으로 지적되어 오는 행정관리 업무 중심의 운영이 전문인력의 활동을 중심으로 개편되고 행정적인 협조가 보조적 차원에서 수평적이고 능률적으로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는 전제 아래서만 이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고려할 것은 비록 광주비엔날레가 국가적, 그리고 나아가서 국제적인 행사의 성격이 있긴 하지만 그 기본 바탕에는 광주의 전문인력과 광주 시민들의 힘으로 닦아놓은 튼튼한 토대가 있어야만 세계적인 행사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광주 지역의 미술계뿐 아니라 교육기관과 행정부서, 시민단체, 경제단체 등이 힘을 합하여 지역에 연고를 둔 전문인력을 장기적 계획아래 육성할 필요가 있으며 중앙정부와 타지역의 미술관련 단체나 개인의 협조도 절실히 요구된다.

두 번째 문제는 재정적 안정의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는 비단 광주비엔날레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비엔날레가 안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재정의 안정 문제는 원칙론적으로 합리적인 조직구성, 합리적인 업무절차, 효율적인 자원운영, 문화복지 차원에서의 정부지원 확대요청, 법과 제도 개선을 통한 기부금 유도와 면세혜택 확대, 적극적인 마케팅 기법 도입 등을 고려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규모에 맞는 운영과 그 분야 종사자들의 바른 마음자세일 것이다. 이러한 상식적인 원칙이 명실상부하게 잘 지켜지기만 하여도 광주비엔날레의 재정상태는 지금보다 훨씬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광주비엔날레의 예산 지출상황을 살펴보면 180억에서부터 60여억 사이에 거의 3배까지 차이가 났지만 그 효과는 이에 비례하여 3배라고 말할 수 없으며 이는 그저 단순히 경험부족에서 초래된 시행착오의 대가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광주비엔날레가 지역주민으로부터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 4회 행사가 끝난 뒤 2002년 8월 20일에 개최된 시민토론회에서도 논의가 되었다. (재)광주비엔날레/광주광역시, <광주비엔날레 발전을 위한 시민토론회 “지역사회 참여와 소통”> (2002. 8. 20, 한국통신 호남본부 세미나실) 참조
비엔날레가 첨단의 현대적이고 난해한 전시내용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보통의 관람자로서 미술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과 감각을 가지고 있는데 머물러있으므로 해서 발생하는 간격을 어떻게 좁혀나갈 것인가가 광주비엔날레를 포함한 우리 미술계가 풀어야할 숙제일 것이다.

이렇게 쉽지 않은 문제를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할 수 있는 제안을 해본다면 우선 장소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광주시 북쪽에 자리잡은 광주비엔날레 행사장은 대부분의 광주시민들의 일상생활의 동선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행사 개최장소를 시민들의 생활동선으로 침투하는 방법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번 결과보고서를 보면 이러한 침투방향보다는 현재의 비엔날레 본전시장이 창고처럼 흉물스럽게 낡았다는 이유로 새롭게 치장할 필요가 있다는 걱정스런 의견이 나오고 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의 본전시장은 흉물스럽지도 않고 비엔날레 전시장으로서의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지지도 않는다. 염려하건대 불필요한 예산이 쓸데없이 낭비되었다는 지탄을 받지 않도록 예산집행에 주의를 하였으면 한다.

지역주민들과 비엔날레가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초기의 외국의 박람회에서처럼 전시 내용을 이원화하는 것이다. 즉 본격적인 현대미술 전시와 같은 비중으로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볼거리를 제공해주면서 서서히 그들의 관심과 안목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 한 예로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는 소위 엘리트 문화와 대중문화를 두 장소에 나누어 전시했다. 엘리트 문화를 상징하는 본 전시는 시카고 호숫가의 늪지대를 개발하여 신고전주의 양식의 흰색 건물들을 지어 ‘화이트 시티(White City)라고 이름 붙인 지역에서 전시했고, 여기서 한 1마일쯤 떨어진 곳에 놀이공원 성격이 강한 ’미드웨이 플레잔스(midway Plaisance)‘라는 곳에 각종 오락시설과 함께 전시를 제공함으로써 대중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었다. 28)김영나, 앞의 글 77-81쪽 참조
아니면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서 무조건 큰 행사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제적 규모의 대형 비엔날레 전시가 벌어진다면, 이와 동시에 우리 나라 미술계의 시사적 이슈를 담은 중간 크기의 전시회가 있고, 거기에다가 광주라는 지역의 도시가 갖고 있는 특색을 보여주는 소형 규모의 전시가 함께 공존하여 규모와 내용 면에서 다양한 형태와 색채를 이루는 행사를 함께 진행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제4회 광주비엔날레와 같은 시기에 개최된 일본의 후쿠오카 아시아 트리엔날레가 광주비엔날레보다 약 1/6 정도의 예산을 들여 1/9정도의 관람객을 유치하였던 비교적 작은 규모의 행사였지만 그 준비와 운영에서 보여준 기획력과 행사 후 전시작품을 구매하는 방식은 우리가 참고해 볼만하다.
윤재갑, “‘멈춤’과 ‘상상된 공방’--제 4회 광주비엔날레와 제 2회 후쿠오카 아시아 트리엔날레 관람기”(미술세계, 2002년 5월호) 116-08쪽 참조

이 밖에 일반인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지난 8월 20일의 시민 토론회에서 한 교수가 제안한 상설공간으로서의 가칭 <카페 비엔날레>라는 광주비엔날레에 관한 대화와 정보의 교환 장소를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편리한 시내에 설치하는 것도 검토해볼 만하다. 30) 성진기, “시민사회 참여와 소통을 어떻게 넓할 수 있나”, <광주비엔날레 발전을 위한 시민토론회 “지역사회 참여와 소통”> (2002. 8. 20, 한국통신 호남본부 세미나실) 15-9쪽 참조


5. 결론

이제까지 간단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미술에 있어서 국제교류의 역사적 흐름은 아주 오랜 옛날의 개인적, 소규모의 교류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세의 왕립미술아카데미나 국제박람회의 미술전시관등에서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미술관의 탄생에 밑거름이 되기도 하고, 나아가서 비엔날레라는 현대미술의 국제적 교류행사에서 그 절정에 이르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나의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지역간, 국가간의 여러 가지 조건의 차이에 의해 각 나라마다 비엔날레를 운영하는 측이나 참관하는 측의 입장이 다르겠으나 한가지 공통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비엔날레라는 행사가 거의 대부분 국제적 성격을 띠며 지역간의 교류에 있어서 문화 이외에 상당한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 행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비엔날레를 통해 창출되는 인적, 물적 국제교류의 효과는 교통과 통신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편승하여 점차 고조되고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여기에 따르는 지역간의 경쟁이나 가치관의 대립과 같은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한 지역의 비엔날레의 성공을 위해서는 미학적 우수성이 그것 자체만으로 족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기본적인 필요조건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성공적인 비엔날레는 지역에 뿌리를 두면서 보다 커다란 세계로 공감대를 넓혀갈 수 있어야 하고, 미래지향적이며 호혜적인 목표 아래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효율성 있게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전세계에서 개최되고 있는 약 120개의 비엔날레에 모두 적용될 수 있으나 실제로 반영되는 정도는 각 비엔날레 행사마다 차이가 있다.
이러한 국제적 정황 아래 우리 나라에서 1995년부터 개최되어 온 광주비엔날레는 이제 제 5회 행사를 앞두고 있다. 출발 당시의 잡음을 초월하여 이제까지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얻어낸 성과도 적지 않지만 이에 못지 않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도 많이 남아있다. 물론 문제점으로 지적된 사항에 대한 사람마다의 견해의 차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전문성을 더욱 높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지역사회와의 합의와 공감대를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제 문제점은 충분히 지적되었고 그 해결을 위한 노력만 남은 셈이다. 그리고 이 노력의 결과에 따라 광주비엔날레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 출처 / 2002.11 한국예술경영연구학회 세미나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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