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아직도 숙직하십니까?

하계훈


우리는 가끔 영화 속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날쌘 도둑에 의해서 소장품을 털리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곳의 경비원들의 행동은 멍청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나라의 국, 공립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일반직원은 물론이고 큐레이터들까지 전시장 문을 닫은 후에 퇴근도 못하고 박물관/미술관의 한 귀퉁이에서 돌아가며 밤새도록 지키는 소위 야간당직 또는 숙직이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 숙직제도는 비단 박물관과 미술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은행, 학교, 동사무소 등 거의 모든 기관에서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어 왔었다.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이러한 기관들은 숙직 제도를 없애고 전문 경비업체에 용역계약을 하여 교사와 직원들을 해방시켰지만 유독 국, 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은 아직 이러한 제도를 고집하고 있다.

그렇다면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숙직제도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귀중한 소장품 때문이라면, 숙직하는 사람은 날쌘 도둑을 막을만한 특수한 능력이 있어야 될 것이다. 적어도 방범 전문가거나 무술 유단자 또는 특수부대 출신쯤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면, 과연 이들이 화재 진압의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다. 이도 저도 아니고 혹시 높은 분(?)이 한밤중에 불쑥 찾아올 경우에 대비해서라면, 한밤중에 박물관/미술관을 찾아와서도 여전히 일과중의 자신의 신분에 맞게 누군가가 자기를 맞아주기를 요구하는 그 사람의 정신상태가 이상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형평성이라는 말을 남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숙직제도에 있어서도 타부서와의 형평성을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박물관/미술관의 숙직제도가 불필요한 것은 알겠지만 숙직 근무를 하는 타부서 행정기관 사람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우리만 폐지할 수 없다는 말이라면 그것은 더욱 한심한, 그야말로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비능률이다.

짐작컨대 숙직제도는 우리 정치사에서 한동안 힘깨나 쓰던 군출신 정치인과 관료들이 민간사회에 군대 내부의 운영제도를 이식시킨 결과로 생각된다. 거기에다 윗사람, 높은 사람의 생활은 중요하고 아랫사람의 희생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전근대적이고 불평등적인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있을 때에는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고치려 들지 않았던 듯하다. 한밤중에 철책선을 넘어 살상과 파괴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경계 근무의 필요성은 당연히 인정된다. 하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은 군대나 전쟁터가 아니다.

박물관/미술관에서의 숙직제도를 시행하는 책임선상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따라잡고자 하는 외국의 박물관/미술관에서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유사기관 시찰이니 뭐니 하여 그럴듯한 구실로 외국 나들이를 심심치 않게 하면서 쓸데없이 유명한 박물관/미술관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이나 할 게 아니라 그런 기회에 이러한 불합리한 제도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연구하기 바란다. 우리가 공염불처럼 외우는 국제경쟁력이라는 것도 이러한 비능률을 제거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될 것이다.

- [컬처뉴스] 2003-12-22 오후 4:26:36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