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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분야에서의 양극화 현상

하계훈

미술계, 힘과 경제논리에 예속되고 양분되다


힘과 경제로 양극화된 미술계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경쟁원리에 의해 급속하게 성장해 가면서 그 성장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는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사이의 사회적 위상과 경제적 소유의 차이는 전보다 더욱 벌어지고 있다. 어느 나라나 사회적인 빈부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나라처럼 근대화의 과정에서 정치사회적 왜곡을 겪으며 짧은 기간 동안 압축 성장을 해왔으면서도 성장 결과의 분배와 소외계층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의 확보에 소홀하였던 나라에서는 그 진통과 후유증이 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누가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거의 실시간으로 모두에게 공개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스스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남들과의 상대적인 비교를 피하기가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공개적 정보사회이자 경제적 양극화사회에서 각 개인의 사회적 좌표는 본인이 원하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상대적 비교 현상은 문화예술 각 분야에서도 사회의 변화와 함께 나타나고 있으며 미술 분야에서도 최근 들어 몇 가지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원래 경제 분야에서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중간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산층이 점점 희박해지면서 양극단의 계층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인 양극화는 미술 분야에서도 힘과 경제의 논리에 예속되어 작가들의 출신학교나 미술단체와 개인의 소재지, 전시 프로그램의 규모 등에 의해서 비교적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유학파 VS 비유학파 출신

미술계의 창작부분에서의 이분법적 양극화 현상은 예전부터 출신학교를 기준으로 소위 잘 나가는 학교 출신과 그렇지 못한 학교 출신이 비교적 명확하게 나뉘어져 왔다. 우리 사회에서 출신 대학에 의해 사회생활의 좌표가 정해지는 현상은 비단 미술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유독 미술계에서는 최근까지 대학교육의 출발점에서부터 예술가의 미래를 예정해놓을 정도로 차별성을 드러내왔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작가로 활동하는데 있어서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가가 그 사람의 미래에 영항을 주고 있긴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이러한 상황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서울에서 1988년 하계올림픽이 개최되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으며 유학생이 증가하면서 정보의 국제적 순환이 이전보다 빨라진 시기를 말한다. 이제 미술 분야에서도 외국 유학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도입되면서 외국에서 미술대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미술 분야 유학생들이 수적으로 크게 늘어남으로써 이제까지의 양극화된 미술계에 제 3의 집단으로 등장하여 우리 미술계의 새로운 판도를 구성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술 분야의 작가에게 있어서 얼마 전까지의 유일한 등용문은 각종 공모전이었으며 작가로서 공모전 입상은 미술대학 전임교수 임용과 작품판매 가격의 상향 등 쉽게 외면하기 어려운 유혹들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좋은 시절을 구가해온 중진작가들의 이력을 들춰보면 그들 역시 대부분 무슨무슨 공모전에서 큰 상을 받은 이력이 쉽게 발견될 것이며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술대학의 전임교수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지금과 다른 그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 공모전 입상이 작가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던 차에 1990년대 들어서면서 미술계의 판은 국내에 한정되었던 이제까지의 활동반경이 국제적 무대로 확대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국제적인 미술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90년대 중반 무렵부터 국내, 외에서 비엔날레나 그 밖의 국제적인 미술행사가 적극적으로 도입되면서 국내에서의 우수 작가를 가려내는 공모전에 입상하는 것의 의미가 이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에다 때마침 새롭게 배출된 젊은 작가들이 신세대 젊은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개인주의적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출신학교를 바탕으로 한 집단의식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들의 사회활동 중에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라도 그러한 파벌의식이 망령처럼 되살아날 가능성은 항시 잠복되어 있다.

이제 작가의 등용문은 더 이상 국내 작가들 중심의 공모전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아니며 젊은 작가들은 기존의 공모전보다 여러 가지 국제 행사에 발탁되어 국제무대에 진입하는 과정을 선호하게 되었다. 물론 일부 국제미술행사에서는 시상제도를 두었지만 수상의 의미보다는 국제미술행사를 주관하는 유력한 기획자의 눈에 띄어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며, 국제무대로 연결되고 더 나아가 국가적 프로젝트나 공공미술 사업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 새롭게 형성된 작가들의 출세를 위한 진화단계의 도식으로 등장하였다. 결국 우리 미술계의 출신학교를 바탕으로 한 양극화 현상은 미술활동의 무대가 국제적으로 확장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유학이 가능한 작가와 그렇지 못한 작가 사이의 새로운 양극화 현상이 잠재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중앙 VS 변방

우리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미술 분야에서도 수도권과 지방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양극화는 현격한 편이다. 모든 시설과 재원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인구의 절반가량이 이곳에 몰려 복닥거리며 살고 있는 까닭에 막상 전시회를 개최하여도 동원될 수 있는 관람객마저도 수도권이라야 어느 정도 확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형편이니 작가는 작가대로 수도권으로 몰리고 관람자들은 관람자들대로 자신이 속한 지역의 문화행사보다 중앙의 행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여기에 미술 저널의 중앙 집중 조명현상이 더해지면 지방은 그야말로 거의 고사상태에 이르고 만다.

미국 뉴욕 타임즈의 미술평론가 가운데 한 사람인 로버트 휴스(Robert Hughes)는 ‘문화적 비굴성(cultural cringe)’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작가로서 인정받는 것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뉴욕과 같은 세계미술의 중심지만을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해바라기 근성을 꼬집은 것인데, 우리의 경우에도 서울로 서울로만 작가와 관람객들이 집중하는 현상이나 우리나라의 작가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는 외국 미술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을 이러한 개념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 정부에서는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의 수도권 집중현상을 해소해보려고 주요 정부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진행 중이므로 앞으로 중앙과 지방의 시설이나 재원의 양극화는 어느 정도 해소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미술에 있어서의 중앙과 지방의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는 방법은 현재 상태로서는 무엇보다도 지방의 문화적 인프라를 강화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단순한 시설의 확보가 아니라 이에 따르는 전문 인력의 확보와 운영기법의 전수 등이 필수적으로 동반하여야 하므로 이것은 국가 차원의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작가들의 출신지역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인센티브 제도나 중앙을 거치지 않고 지방 도시의 문화단체들이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약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경로를 효과적으로 마련한다면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양극화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상론적으로 말하자면 문화뿐 아니라 사회, 경제적으로도 중앙과 지방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보다 효과적으로 이러한 양극화가 해소될 것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섣불리 지방문화를 활성화시키겠다고 중앙에서 통용되는 노하우를 들고 점령군처럼 지방으로 다가서는 방법도 경계해야 하며, 그보다는 지역의 인력이 중심이 되어 자생적으로 지역문화를 키워나갈 수 있게 중앙의 인력들이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블록버스터 전시 VS 일반 전시

한편 미술 전시 프로그램 부분에서의 양극화도 역시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한 시기부터 외국의 유명미술품 전시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그 차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에서 언급한 중앙과 지방의 문화 인프라의 차이와도 관련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품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수도권에서 전시가 이루어지고 지방 순화전이 열릴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 관객동원에서 목표한 바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1990년대 이전에는 수도권에 있는 우리나라의 미술 전시공간이라고 해봐야 1986년에 덕수궁으로부터 이전 개관한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과 시내의 몇몇 사립미술관이나 신문사 사옥에 부속된 공간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대형 국제전시가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8년 올림픽을 치르고 나서 급속하게 성장한 경제 분야의 확장은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공간의 신설과 확장을 가능하게 하여 1991년에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이 개관하였고 그 후 서울 시립미술관, 서울 역사박물관 등의 대형 공간들이 속속 개관하여 국제적 대형 미술전시를 개최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확보하여 왔다.

넓게는 19세기 유럽의 만국박람회로부터 시작되었고 좁게는 1960년대 말부터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관장이었던 토마스 호빙(Thomas Hoving)에게서부터 시작된 소위 블록버스터 전시라고 부르는 대형 전시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대량의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그에 따르는 대량의 효과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너무 현학적이었던 박물관과 미술관의 전시를 일반 대중들의 눈높이로 낮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선언적 의미의 바탕에는 대규모 관중동원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비전문적인 대중으로까지 관람객층을 확장할 수밖에 없다는 고민이 깔려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블록버스터 전시가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하나 둘씩 소개되기 시작하여 이제 막 외국의 미술정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국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적지 않은 흥미를 끌었고 몇몇 전시의 경우는 양적으로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러한 블록버스터 전시와 일반 전시가 그 규모면에서나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현상에서 양극화 현상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블록버스터 전시가 관객동원이나 입장권을 비롯한 각종 관련 상품 판매 면에서는 일반 전시회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러한 면에서는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공의 배경으로 볼 수 있는 요소는 과감하게 투입된 대형자본의 힘 이외에도 이제까지 국내에서 개최되던 비교적 작은 규모의 전시와는 다른 새롭고 이국적인 내용의 브랜드화한 전시와 그 전시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신문사와 방송사의 제휴, 그리고 이전의 국내 전시회와 다르게 전시 주최측이 적극적인 홍보와 마케팅 활동을 도입한 것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블록버스터 전시가 상당히 과대 포장되어 있고, 전시 준비 단계에서부터 우리의 힘으로 큐레이팅을 하기 보다는 작품을 대여해주는 측에서 결정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으며, 전시 경험이나 학문적 성과의 축적이 미미한 것에 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너무 많다는 비판이 따른다. 그러나 막상 전시가 개막되면 비록 상업적 목적이긴 하지만 조직적으로 운영되는 전시 진행의 절차들은 일반 전시의 모습과는 차이가 나며, 이 부분은 일반 전시 기획자 측에서 참고로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 전시 기획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부족한 여건만을 탓하지 말고 혹시 스스로 적극적인 태도가 결여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의 기회를 가져볼 필요도 있다.

우리 미술계에서의 양극화가 미술인의 출신배경이나 소재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블록버스터라고 불리는 대형 기획전시와 일반 전시 사이에서 드러나는 양적 성과의 차이 역시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양극화의 해법이 한쪽을 억제하고 다른 한 쪽을 의도적으로 촉진시켜 전체를 균등화시키는 것이어서도 안 될 것이다. 작가 개인이건 미술단체건 진정으로 노력하고 성실하게 작업하고자 한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하며 양극화의 물결 속에서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낙오자는 과감하게 제외시키는 결단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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