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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의 <신뢰>

하계훈

그림 속에는 깔끔하게 양복을 갖춰 입고 중산모를 쓴 말쑥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그 뒤로는 뭉게구름이 가득 퍼져있는 하늘아래 넓은 모래사장으로 보이는 평원이 펼쳐져 있다. 남자의 이러한 복장은 교양있는 부르주와의 사회적 지위를 암시한다. 여기까지는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인물화 또는 어느 사내의 초상화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남자의 코앞에서 허공을 떠다니다가 멈춘 듯한 담배 파이프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어느 물건이나 사람이 위치하여야 하는 제자리를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신발은 신발장에, 그릇은 찬장에, 칫솔은 목욕탕 세면대 앞에, 펜과 잉크병은 책상위에 있어야 하고 의사는 병원에, 운전기사는 자동차 안에, 선생님은 교실 안에 있어야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그런데 사람의 코앞에 떠다니는 담배 파이프라니.

이처럼 제자리가 아닌 이상스런 곳에 어떠한 물건을 낯설게 위치시키는 표현기법을 데페이즈망(dpaysement)이라고 한다. 전치(轉置) 또는 전위(轉位)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용어는 미술사에서 ‘초현실주의자’로 불리는 화가들이 즐겨 쓰던 방법이었다. 초현실주의 시인인 로트레아몽의 시에 “재봉틀과 박쥐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구절처럼 도저히 경험과 이성의 힘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데페이즈망 수법은 보는 이들의 의식에 낯선 충격을 던져준다. 이러한 표현 방법을 통해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우리의 무의식이나 꿈속에서 볼 것 같은 장면을 구성하여 상식과 이성을 희롱하고 인간의 잠재의식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그렇다면 마그리트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그가 살던 시기의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유럽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산업혁명과 계몽철학은 그들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살찌우고 미래에 대한 낙관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유럽 사회의 눈부신 발전과 번영이 20세기 초에 이르러 제 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량살육의 전쟁으로 귀착되자 유럽의 지성들은 그들이 신뢰하던 이성이나 과학적 사고에 대한 불신을 품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무의식과 낯섦에 의존했으며 이런 맥락에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동원된 회의와 저항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데페이즈망 기법이었다.

이지적이고 자신감에 찬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신뢰>는 떠다니는 파이프가 있는 인물의 모습에서 한번, 그리고 다시 제목에서 한 번 우리를 갸우뚱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의 그림에 대해 이성과 논리로 설명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통해 작품과 제목을 연관시켜보는 것이 이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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