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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재 - 쌀알을 통한 정신적 생명력 표출

하계훈

쌀을 비롯한 곡물을 중심적 재료로 삼아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들의 초상을 제작해온 이동재의 작품에서는 미술의 흐름 속에서 오래 동안 이어져 온 인간의 시지각과 시각적 현상에 대한 반응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에서부터 회화는 오랜 시간동안 인간의 시각에 착시현상을 부여하여 우리가 환영(幻影)을 실재로 믿게 하려는 시도를 진행하여 왔다. 최초의 예술가는 벽에 그려지는 그림자의 윤곽선을 숯으로 표현하여 그 대상의 존재감을 표현하려 했으며 동굴벽화를 그린 화가들은 자연에서 채취한 안료를 이용하여 대상의 실재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대상의 재현에 대한 노력은 때로는 사실적으로, 또 때로는 상징적으로 진행되었다.

시각의 자극은 점차 그 강도를 더할수록 우리를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고 과학의 발달은 이러한 시각적 반응의 원인들을 논리적으로 규명해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을 발견한 예술가들과 인상주의 시대의 색채 물리학자들은 화가들로 하여금 색채가 우리의 망막에서 착시적으로 수용되는 현상의 원리를 규명하여 이를 당시 화가들의 회화 표현에 응용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동재가 아크릴로 바탕색을 칠한 캔버스 화면에 실제 쌀알을 가지고 형태반복적인 배열을 형성함으로써 드러나는 화면 역시 이러한 시각적 표현에 있어서 착시현상의 긴 역사의 한 끝에 맥을 잇고 있다. 신인상파 화가들의 수많은 붓터치에 의한 색점이 우리 망막에서 혼합되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듯이 이동재의 화면에서도 쌀이 만들어내는 점들의 조합이 우리의 눈에서 재미있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이동재의 화면을 클로즈업하면 마치 텔레비전의 브라운관 픽셀처럼 가로 세로 5 밀리미터의 면적을 단위로 쌀알이 놓인 부분과 비어있는 부분이 종횡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평면을 점차 뒤로 물리면 일정한 거리에서 화면이 새로운 이미지를 드러낸다. 이렇게 화면을 픽셀 단위의 집합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실크스크린 판화 기법이나 신문과 잡지의 망판, 그리고 십자수 기법 등에서도 유사한 방법으로 이용되어 왔지만 쌀알을 가지고 작품의 기본 조형요소로 응용한 것은 이동재의 작품이 세상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셈이다.




칸딘스키는 점의 속성을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이르는 교량 또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비약을 위한 준비운동 단계의 상태라고 보았다. 이 말은 이동재의 작품에 도입된 쌀알 하나하나의 역할과도 연관될 수 있다. 화면에 규칙적으로 전개된 쌀알들은 미시적 시점에서는 그 하나하나의 조형성과 리듬감을 읽을 수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보면 상호간의 연결과 반복적 나열을 통하여 이미지의 운동성과 입체감을 형성하기도 하고 시각적인 현상 이상으로의 의미 있는 조형적 전개를 이루기도 한다.

이동재가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쌀은 화면을 구성하는 기본 화소의 단위로서의 기능적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생명력이나 민족문화의 상징물로서의 의미도 함께 포함하고 있으며, 디지털 입자의 기계적 확대 및 반복 기능과는 달리 일일이 작가의 수공이 들어가는 반복적 노동에 의해 표현된다는 점에서 디지털 이미지의 대척점에 서는 아날로그적 작품의 속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작가 스스로도 쌀이 단순한 일상의 물질이나 식량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매체로 이해하고 있듯이 이동재의 화면 위에 놓인 쌀은 화면 구성요소로서의 점 또는 디지털 코드 이상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유기적 생명체이자 민족의 정신적 생명의 상징인 것이다.




이동재는 쌀 이외에도 녹두나 콩 등의 곡물들을 사용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단추와 알약 등의 입자들을 가지고 화면을 구성하기도 한다. 한때 그는 영어의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를 이용하여 영국의 희극배우 로완 애킨슨(일명 미스터빈)을 콩으로,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를 쌀로 묘사하기도 하고 동학농민 운동의 주인공 녹두장군 전봉준을 녹두를 이용하여 묘사하기도 했다. 원래 문학에서 재담(pun)으로 이용하던 이러한 기법은 한편으로 재치 있는 유머로 읽히기도 하고 때로는 묘사대상의 의미나 인상을 강화시켜주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쌀알을 이용한 이동재의 최근 작업 가운데에는 동일한 이미지를 관람자의 시점의 각도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 포착할 수 있도록 화면의 표면을 잡아당기듯이 표면장력을 늘이거나 캔버스의 호수를 점증시키는데 따라서 이미지 묘사에 소요되는 픽셀(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쌀알의 숫자)을 증가시키는 기법을 채택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화면을 커다란 픽셀의 종합의 장으로 설정해놓고 쌀이라는 곡식을 점이라는 조형의 기본 단위처럼 도입하고 있는 이동재의 작품을 읽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보기에 따라서 그의 작품은 텔레비전의 화소처럼 디지털 시대의 첨단적인 조형어법으로 읽을 수도 있고, 작가의 순수한 손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반되는 장인적인 노력의 결과로 읽을 수도 있으며, 또 보기에 따라서는 대중친화적인 팝아트의 전형으로 읽거나 화면의 이미지와 관계없이 쌀을 비롯한 곡류의 알맹이들이 지니는 사회적, 역사적 의미나 생명주의의 메시지로도 읽을 수 있다. 다만 그 어느 방법으로 읽혀지더라도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쌀을 조형의 기본 요소로 채택하였다는 참신한 발상과 성실한 수공의 노력에 의존하여 작품을 구축해나간다는 점에서 이동재의 작품의 맛과 깊이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깊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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