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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전 / 대량소비 사회에서 유통되는 가공된 풍경

하계훈

근대 영국의 귀족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명망 있는 가정교사들에게 맡기고 그 교육이 끝날 무렵 그들의 자녀들이 교사들과 함께 유럽대륙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도록 장려했다. 이러한 여행은 대장정(Grand Tour)이라고 불렸다. 이뿐만 아니라 독일의 유명한 시인 괴테같은 사람도 문학적 영감의 재충전을 위하여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을 두루 여행하고 그 소감을 글로 남기기도 하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여행에 대한 욕구는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다만 과거로 거슬러 갈수록 교통수단의 한계와 여행 도중의 신변의 위협, 여행 경비 조달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욕구가 억제되어 왔을 뿐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중세 유럽 기독교의 권위를 붕괴시키고 르네상스의 싹을 키운 원인 가운데 하나도 십자군 원정이라는 이름의 여행에서 비롯되었다. 18세기 유럽 저널의 인기 있는 섹션 가운데 하나도 먼 나라의 소식이었으며 낭만주의자들의 관심 가운데 하나도 이국적 정취였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해외 배낭여행, 각급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도 결국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인간 본연의 호기심에서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예전부터 자신이 가본 곳에 대한 감상과 추억은 글이나 그림으로 기록되었고,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상상 역시 환상적 이야기나 상상의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기록 행위가 글보다는 이미지 중심으로 주로 카메라를 이용하여 이루어진다. 이지현은 카메라를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기구로 보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카메라가 생산한 이미지를 편집하고 가공하여 이상화시키거나 낭만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시도를 감행한다.

이지현의 작품은 이국적이고 랜드마크적인 풍경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그녀가 다루는 풍경은 사실주의적 회화로 재현되거나 사진을 통해 우리 앞에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상태의 풍경이 아니다. 작가는 유명 관광지의 관광엽서나 포스터에 등장하는 이미지나 웹상에서 얻을 수 있는 파노라믹한 풍경들을 채택하여 작업의 재료로 삼는다. 이렇게 채택된 풍경들은 이미지가 편집되고 가공되어 마치 일상의 상품처럼 팔고 살 수도 있고 스크랩북에 차곡차곡 모아 소유할 수도 있으며, 그것을 소유한 이 뿐 아니라 보는 이의 상상을 자극하고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과거 여행자들(또는 여행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감상이나 상상처럼 풍경 이미지의 환상적 가공과 편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 2000년대 초부터 5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 작가는 대량 소비사회의 물량주의와 이미지의 상품화를 목격했고 사진을 통한 기억의 물성화에 집착하는 유명 관광지에서의 관광객들의 행동을 관찰해왔다. 작가의 눈에 들어온 관광객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그 장소를 추억할 수 있는 기념품과 스티커 사진을 수집함으로써 기억을 소유하려고 한다. 관광객들의 이러한 행동들은 기억의 물질적 소유 욕구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낯선 공간에 대한 적응과 친화의 시도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낯선 환경에서 경계심과 관찰력이 증가한다는 사실도 이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작가는 풍경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관광문화의 도식화된 특징과 미국 대중소비 문화의 무한적인 이미지 생산과 자기복제의 현상을 작업의 모티브로 선택한다. 그녀가 표현하는 풍경은 화면 안에서 작가의 선택에 의해 이미지가 편집되고 배경의 색상이 조율되어 전반적으로 색다른 분위기를 띤 새로운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작가는 자신이 직, 간접적으로 체험한 풍경을 단색으로 채색된 바탕 화면 위에 라미네이트 코팅이 된 디지털 출력 이미지 사진으로 부착하고, 그 이미지들을 커팅과 콜라쥬 기법으로 가공한다. 그럼으로써 화면은 오려진 사진 이미지와 작가가 선택한 분위기에 맞는 고유한 색상의 배경이 결합된 사진과 회화의 이중적 구성을 갖게 된다.
그녀가 체험한 풍경은 낯선 이방인의 놀라운 시선이 처음으로 개입되고, 점차 그 시선은 자신 앞에 펼쳐진 이미지들을 물성화하여 사진에 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통하여 유명관광지의 괄목할 만한 경관은 교환과 판매 뿐 아니라 소유가 가능한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로 가공된다. 관광산업의 소비를 위하여 대량 인쇄된 이미지들은 이지현의 손을 거쳐 상품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잠재력을 가진 예술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이어지는 8개의 유명 관광지를 재현한 연작에서는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 속에 작가의 손맛이 드러나는 선 드로잉이 가볍게 첨가되기도 한다.

이지현이 제시하는 풍경의 이미지는 유명 관광지와 같이 일견 익숙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장면으로 구성된 일종의 이상화된 광경이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작가가 제시하는 풍경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감각을 기만하고 환상을 갖게 만드는 짓궂은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지현의 이미지를 선별하는 눈썰미와 색채감각에 의해 조작되는 작품 속의 화면에서는 오히려 밝고 화려하며 가벼운 해학이 드러날 뿐 오늘날의 대중문화와 관광산업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는 태도를 엿볼 수는 없다. 이지현이 제공하는 화면은 과거 유럽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대량 소비사회에서 유통되는 가공된 풍경으로 재맥락화하는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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