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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우

하계훈

이충우는 작품의 재료로 책을 사용한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이충우는 책을 포함한 확장된 인쇄매체를 작품재료로 이용한다. 작가는 처음에 미술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관련된 독서를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독서행위의 대상인 책의 낱장들을 물리적으로 해체하여 털실이나 밧줄처럼 꼬아내기 시작했다.

과거에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 책을 만든다는 것은 표지부터 끝장까지 온전히 한권을 손으로 직접 필사하여야 했다. 이 작업은 지극히 노동집약적이면서도 정신적 긴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니 그 시절에 사람들이 책 한권을 얼마나 소중히 했을 것인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를 시켜서 책을 복사하는 작업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노예에 의한 작업도 점차 고도의 정신적 숙련과 경험이 수반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쇄기술이 발달함으로써 사람들은 필사에 의해 책을 만드는 육체노동에서 해방되었고 이제 우리의 생활 주변에는 책을 포함한 각종 인쇄물들이 홍수를 이룬다고 표현할 정도로 넘쳐나고 있다.
이렇게 인쇄된 책과 그 안에 담긴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충우는 책의 본래의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정보의 보존과 전달, 그리고 대중적 배포를 넘어서 책에 대한 기능부여를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한다. 그는 책이라는 인쇄물의 낱장 자체를 잘게 자르고 꼬아서 마치 굵은 실이나 밧줄처럼 변형시켜 자신의 작품 재료로 채택한다. 이 프로세스는 지난 수천 년간 인류가 발전시켜 온 계몽과 의미전달의 도구인 책에 대한 도발적 행위로 읽힐 수도 있다. 만일 과거 필사본 시대에 이충우가 책을 자르고 있었다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호된 꾸지람과 체벌이 가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활자 정보가 과잉으로 넘쳐나고 소통 주체 양자간의 소통의 패러다임이 바뀐 세상에서 거의 기능 폐기된 책은 작가의 손에 의해 새롭게 의미를 갖는 측면도 있다. 비록 그의 작품에는 책 본래의 모습과 내용을 보존하고 있지는 않지만 밧줄이나 실 형태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텍스트나 단어들이 아직 책이라는 속성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시각적 소통형식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작가의 손에 의해 책은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탈바꿈 된 것이다.

실의 형태로 변형된 책장들은 다시 의복의 형태로 직조된다. 책의 변형을 통해 이충우가 창조해내는 오브제는 마치 장례에 이용되는 수의나 제의적 행사에서 사제가 입었을 듯한 범상치 않은 예복 형태의 작품이다. 이 옷은 성인의 평균적 신장을 훨씬 웃도는 크기로 제작되고 옷을 착용한 인물의 부재를 통해 더욱 신비감을 더해주며 그 부재하는 인물이 텍스트를 입는(이해하는) 자로서의 모뉴멘탈한 권위와 위엄을 지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최근 들어 이충우는 의복 형식으로 표현된 자신의 작품에 가벼운 색상을 도입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죽음이나 의식 등의 무거운 주제를 연상시키는 상태에서 다소 벗어나며 텍스트와 정보를 담은 인쇄매체로서의 책에서 출발하여 점차 탈(脫)텍스트화하면서 이미지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더욱 강조된다.

오브제 작업과 함께 이충우는 사진 작업을 병행한다. 책이란 추상적 의미를 내포한 문장이 종이와 잉크 등의 물질적 도움을 받아 구체적 형태로 탄생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충우는 책의 속성을 분리하여 텍스트를 책장에서 사람의 얼굴로 옮겨 놓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한다. “나를 길들여주세요!(Please tame me!)'라는 문장이 젊은 여성의 얼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작품은 우리에게 책이라는 지식과 정보의 그릇이 갖는 물성과 책에 담긴 정보나 메시지가 소통하는 전형적인 형식인 인쇄매체로 결합되어 온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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