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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 / 전통의 변용과 재해석을 통한 독자적 작품세계의 구축

하계훈

유화를 통해 우리나라의 산수화를 재해석해 온 문호의 조형적 탐구 과정은 전략적으로도 관람객에게 쉽게 다가가는 데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익숙하고 전통회화에 맥을 잇고 있는 청전(靑田) 이상범의 풍경화 이미지를 도입하였고, 그것을 전통의 틀 속에 가둬두지 않고 동서양의 이미지가 한 화면 안에서 조우하는 해학을 시도하기도 하고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통해 픽셀 단위로 색을 분해하여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쳐 현대적 감각의 이미지로 전용하여 화면에 모더니티를 부여하기도 하였으며, 다시 이러한 이미지를 화면에 완성시키는 방법으로서 손작업에 의한 유화 채색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전통의 맥락과 현대적 이미지, 예술적 수작업의 요소들을 모두 하나의 화면에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한국화라고 부르는 장르는 국제적 미술의 장에서 독특한 매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동북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근대회화의 역사에 있어서 특이한 전개 양상을 보여 왔다. 서양과는 달리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문화권에서는 글 쓰는 필기구로서의 붓과 그림 그리는 화구로서의 붓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없었다. 따라서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필요조건인 붓에 대한 익숙한 운필(運筆)요령은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글씨를 배워온 계층의 문인들에게 좀 더 용이하게 터득될 수 있었으며, 문인들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그림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대상의 사실적 재현보다는 철학 혹은 문학적 의미가 함축된 표현에 두어왔다.
화가 문호는 캔버스 위에 유화 작업을 하면서 이러한 정신이 담긴 우리나라의 동양적 회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의 관심을 끈 작가는 우리 근대 회화사에서 굵직한 획을 긋고 있는 청전 이상범이었다. 문호는 청전의 작품에서 화려하지 않은 담백함과 간결함을 보았고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괴테의 말을 연상시키는 한국적 미의식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문호가 관심을 갖는 1960년대 절정기의 청전의 작품의 특징은 낮은 언덕에 자리잡은 외딴 산골의 허름한 집이 보이는 적막하고 소박한 풍경 속에서 한국적 산야의 평범함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문호가 자신의 작품을 시작함에 있어서 전통성을 모티브로 선택한 것은 바람직한 출발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농경사회의 오랜 전통이 청전의 시대까지 이어져 왔으며 그러한 생활환경이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에 사실적으로 담겨있다. 청전의 작품 속에 한가로이 강 위에 떠있는 배에서 낚시하는 어부의 모습이나 집 앞 텃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 등은 도교적 무위자연의 경지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현대인들에게 어린 시절의 고향에 대한 진한 노스탤지어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도시화, 공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태어나 성장기와 학습기의 전부를 도시에서 살아온 문호에게는 이러한 화면 속의 풍경이 낯설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청전의 작품을 대하면서 지금과 같은 현대적 시각을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호는 이렇게 전통적이면서도 현대 도시인들에게 낯선 환경을 제공하는 화면 속의 풍경에 관심을 갖고 처음에는 화면 속에서 동양과 서양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이때 나타난 화면은 청전의 산수에 반 고흐의 <별빛이 흐르는 밤>에 그려진 별과 달이 표현된다거나 쿠르베의 <안녕하십니까, 쿠르베선생>이라는 그림 속의 인물들이 청전의 그림 속에서 계곡의 좁은 다리를 건너가는 등의 표현으로 나타났었다. 작가는 이러한 이질적 이미지들의 조우에서 해학적 표현을 시도하였다.
문호의 작품은 이러한 해학에서 출발하여 순수하게 청전의 필선과 구도에 대한 작품연구로 이어지고 마침내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통해 청전의 작품을 현대적 감각의 이미지로 새롭게 태어나게 만들었다. 청전 작품에서 시작된, 픽셀을 기본으로 화는 화면의 구성은 이제 다시 그의 작품에서 주제를 도출하여 자연 속에 자리잡은 풍경 속의 외딴집이 주는 분위기로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온고지신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통의 변용과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문호의 작품에는 가볍고 경쾌하면서 근본을 깊이 두고 있는, 그래서 현대적인 경쾌한 맛과 전통의 깊은 맛을 함께 음미할 수 있는 묘미가 담겨있다. 선택된 이미지가 컴퓨터 작업을 통해 픽셀 단위로 분해되어 다시 조합되는 과정에서 그의 화면은 가까이 다가가면 작가의 손맛이 느껴지는 유기적 색면의 추상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점점 작품으로부터 멀어져 가면 어느새 그 화면이 나무와 집 등의 구체적 형상을 드러내는, 추상과 구상의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제 전업 작가로서의 출발선상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가지며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탐구해가는 문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전통의 현대적 변용의 가능성을 읽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앞으로 작가가 디지털 시대의 조형 감각을 발전시켜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소통 가능한 보편적 조형언어를 개발하는데 성공하도록 지켜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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