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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현

하계훈

조덕현은 프라이머를 바르지 않은 무명 캔버스 천에 콩테나 연필로 정교하고 섬세한 인물 드로잉을 하는 작가다. 그는 자신의 작품 제작을 위하여 다양한 인물과 풍물이 담긴 오래된 사진을 발굴하는데 주력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빛바랜 사진 속의 인물처럼 과거를 머금고 있지만 작가는 그들을 단순히 과거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오늘날의 현실공간으로 이끌어낸다.

조덕현의 캔버스는 양 옆과 위부분의 프레임이 캔버스 천을 단단하게 지지하고 있지만 아래 부분의 틀에서는 캔버스 천이 나무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 전시장 공간으로 길게 흘러내린다. 이렇게 되면 작품 속의 인물과 그 인물이 입고 있는 의상이나 팔에 걸치고 있는 외투 등은 화면 속에 박제되어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시작하여 3차원적인 현실의 공간으로 연장됨으로써 관람자와 같은 공간에서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는 인물과 물건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번에 작가가 발굴한 인물은 한국에서 서구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선구적으로 미국유학 길에 올라 한국에서 그 당시로서는 생소하기만 한 패션 공부를 하고 돌아온 노라 노(Nora Noh)라는 여인과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손 모델을 하다가 영국 일간지인 데일리 메일의 회장인 로더미어 자작(Viscount Rothemere)과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게된 이정순이라는 여인이다.

노라는 잘 알려진 것처럼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이름으로서 본명이 노명자인 그녀가 이런 서양식 이름으로 개명한 것은 개화기 때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씌워졌던 사회적 관습의 굴레를 벗어버리려는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다. 노라 노와 이정순은 한국의 유교적 전통 속에서 탈출하여 그들 또래의 보통 여성들과는 다르게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한국 여성들이다. 낡은 사진 속의 인물을 통해 일상의 삶을 시대적 서사의 구조로 맥락화하는 작가의 작품 속에서 두 여인의 삶은 우리 근현대사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서사적 내러티브와 리얼리티를 담아낸다.
조덕현은 이들의 삶을 발굴하여 자신의 작품 속에 복원함으로써 그들이 관람객과 동일한 시공간에서 소통하기를 바란다. 작가가 오래된 사진에서 인물을 복원하는 작업에 집중하여 온 것은 그의 개인적인 역사와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탓에 사진으로만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었던 작가로서는 낡은 사진 속의 인물들을 작품으로 부활시키는 것이 남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국제갤러리 두 개 층의 전시장에는 각각 이 두 여인들과 주변의 연관된 인물들의 사진으로부터 확대 묘사된 인물들이 콩테와 연필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좌우대칭의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조덕현은 이번 전시의 키워드를 기억과 대칭으로 보고 있다. 마치 거울에 비춰놓은 듯 대칭을 이루는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세한 차이를 읽을 수 있다. 한 작품이 모델의 객관적 이미지라면 다른 한 작품은 작가가 해석하는 모델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칭적으로 작품이 배치된 전시장은 엄격하고 고전적인 분위기가 압도하는 속성이 있어서 화면 속의 인물을 현실로 이끌어내는 시도를 순조롭게 만들지 못하는 측면도 함께 가지고 있다.

좌우 대칭 이외에 작가가 즐겨 쓰는 기법은 거울을 활용한 이미지의 무한적 증식이다. 이번 전시에서 거울을 통해 화면 속의 한 인물이 가상적 공간으로 확장되어 나아가며 무수히 많은 사람으로 증식 복제되는 것은 유교적 한국사회를 벗어나 열린 세계로 나아가려는 무수히 많은 이 땅의 여인들의 기원을 상징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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