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조귀선 개인전 서문
물의 생명력으로 창출하는 숲, 빛 그리고 우주
김성호(미술평론가)
물빛 수채화 – 재현으로부터 표현으로의 변주
조귀선이 오랫동안의 조형 실험과 연구를 거쳐 선보여 왔던 담백한 수채 풍경화는 최근에 이르러 표현주의적 즉발성이 일렁이는 추상적 회화로 변모했다. 그간 그녀의 화업에서 오랜 화제(畫題)이자 제재(題材)였던 연꽃(蓮花)이라는 특수한 조형 대상의 구상성과 구체적 면모가 자신의 몸을 허물고 추상성으로 변모한 것이다.
구상으로부터 추상으로 전이하고, 수채화지로부터 한지와 먹을 사용하는 재료의 변화를 실험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최근작에는 수채화라는 조형 언어와 수채 질료의 근원적 속성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다. 그녀의 작업은, 물감이 물과 만나 서로를 한 몸으로 섞으면서 변화를 거듭하다 끝내 물을 떠나보내고 그 흔적을 고스란히 종이 위에 남기는 가장 기본적인 수채화의 질료적 속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녀는 물과 습기를 먹은 종이 위에 ‘뿌리기’, ‘흘리기’는 물론 ‘번지게 하기’, ‘퍼지게 하기’와 같은 동사형 조형 행위를 지속하면서도 결국에는 뿌림, 흘림, 번짐, 퍼짐과 같은 명사형 조형 결과로 흔적을 남기는 수채의 조형언어를 그대로 드러낸다. 때로는 이전의 조형 언어를 뒤덮는 불투명 수채로, 때로는 그것 위에 겹쳐 올리는 투명 수채로 그녀의 작업이 발현되지만, 불투명과 투명의 구분은 그녀의 작업에서 무의미하다. 종이를 적시고, 말리기를 거듭하는 과정 속에서 신비하게 물감을 풀어내고 뭉치게 만들면서 종이와 물감을 만나게 만드는 매질(媒質, medium)의 존재가 주요할 따름이다.
그녀의 수채화에서 종이와 물감을 중매하는 매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연코 물(水)이다. 그녀의 이전 ‘물빛 풍경’은 많은 부분 묘사와 재현의 대상으로서 존재했던 미시적 존재를 위해 물의 매개적 역할을 필요로 했다고 할 것이다. 즉 풋풋한 연잎을 햇볕 아래 실제 펼쳐진 것처럼 그려 내고, 소박한 연꽃을 화면 위에 실제처럼 단아하게 피워 올리기 위해서 물이 매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반면 최근의 ‘물빛 풍경’은 이러한 재현(representation)의 기치를 떠나 식물, 숲, 자연, 우주라는 거시적 존재의 풍광을 표현(expression)의 추상 이미지로 표출하기 위해 물의 매개적 역할이 적극적으로 요청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기적 물의 생명력’이란 존재는 양자 모두에서 동일하지만, 전자에서 물이란 연꽃이라는 미시적 존재를 보살피기 위해 언제나 필요했던 생명의 샘물이었다고 한다면, 후자에서 물은 메마른 대지를 죽음으로부터 살려주는 장대비로 퍼붓는 기적의 생명수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조귀선으로 하여금 표현주의적 즉발성과 예측 불가능의 우연성이 주도하는 미지의 조형 세계로 자신을 내던지고 거침없이 이끌고 가게 만드는 원동력임은 물론이다.
비밀 자연 – 감추어지는 숲, 드러나는 빛
조귀선의 최근작인〈숲(forest)〉 시리즈에서는, 수채지로부터 한지로 변용하는 가운데, 그리고 연꽃이라는 미시적 세계로부터 숲, 자연이라는 거시적 세계로 확장하는 가운데, 그녀의 물빛 수채화에 나타난 ‘푸른 생명력’이 표현주의적 즉발성으로 극대화된다. 여기에는 창작의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예견치 못하는 우연성이 개입하면서 그녀의 작품을 매우 생동력 가득한 화면으로 만들어낸다. 물감을 흩뿌리고, 화폭을 기울여 다시 흘리고, 덧칠하기를 반복하면서 격렬했던 회화 행위의 시간성을 고스란히 쌓아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적의 시간성은 투명 수채화의 맑은 투영 효과와 더불어 불투명 수채화의 탁한 중첩의 효과가 겹쳐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작가는 먼저 칠한 색이 마른 후에 그 위에 투명하게 겹쳐 올리는 글래이징(glazing) 기법은 물론이고, 종이가 젖어 있는 상태에서 젖은 물감으로 작업하는 웨트 온 웨트(wet-on-wet, 습윤법) 기법을 병행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드러내기를 한편으로는 감추기를 실행한다.그것은 마치 동양 수묵의 적묵법(積墨法)과 더불어 발묵법(潑墨法) 혹은 파묵법 (破墨法)을 병행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드러낸다. 여기에 마른 후 불투명 수채를 올리면서 드러내기를 감추기로 변주하는 시도를 감행함으로써 이전의 시간성을 투명한 막 위로 드러내던 조형 언어는 이내 드러내기와 감추기(혹은 지우기)를 오가는 변주의 효과를 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기법이 교차하는 그녀의 화면은 마치 축축하게 습기를 먹은 듯 되살아나는 듯한 싱그러운 숲의 풍경을 만들거나 물감비(色雨)가 내려 세상을 씻어 내린 듯한 자연의 풍경을 선보인다. 그것은 자연의 구체성이 아닌 자연이라는 ‘하나의 이미지 덩어리’로 현현된다. 이러한 조형 방식은 자연의 본성을 드러내기에 제격이다.
한지(韓紙)의 질료적 속성이 도모하는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효과는 또 어떠한가? 목재 펄프와 부가 원료를 섞어 기계적으로 만드는 양지(洋紙)와 달리 수공으로 닥나무의 인피 섬유만을 사용하는 한지는 유연하고 투명하며 질김이 강한 만큼, 물감이 침투하여 만든 표면 질감은 양지의 것과는 다른 차원을 지닌다. 한지 배면으로 깊이 침투한 엷은 물감 층이 은은히 그 밑색을 드러내거나 반대로 두텁게 중첩된 물감 층을 지탱하면서 밑색을 감추는 그것은 자연의 ‘드러내기/감추기’의 본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그려진 화면을 반투명한 한지로 가리고 일부는 다시 뜯어내어 드러내는 콜라주적 장치는 또 어떠한가? 회화적 물성과 질료가 겹쳐진 그녀의 회화에서 거칠게 때로는 축축한 습기 속에 ‘감추어지는 숲’과 그 사이에서 은은하게 ‘드러나는 빛’, 그리고 양자를 오가는 산뜻한 공기의 기운, 그것은 가히 ‘비밀 자연’이라 할 만하다.
상상 우주 – 어둠의 혼돈으로부터 빛의 질서로
또 다른 최근작 〈코스모스(cosmos)〉 시리즈에는 화가 조귀선이 그리는 우주가 있다. 그것은 재현으로부터 탈주하는 표현으로 분출되는 심상의 이미지인 ‘이미저리(imagery)’이다. 그것은 천체 운행의 규칙성을 탐구하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분석과는 상관없다. 그것은 시공간과 물질을 아우르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회화의 언어로 성찰하는 것일 따름이다. 우주란 빅뱅으로서의 대폭발로 생성되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여전히 팽창을 지속하는 거대한 운동체로서 이해되고 있지만, 우주의 미래는 현재의 과학적 연구가 거듭되어도 여전히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최근작에서 태초의 혼돈 속을 함께 유영하고, 그것으로부터 우주의 질서를 만드는 것은 오롯이 화가 조귀선의 몫이다. 격렬한 뿌리기와 흘리기라는 드리핑과 거친 붓질을 통해서, 그녀는 우주의 존재를 화가의 자격으로서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지 위에 올린 짙은 먹색의 바탕 위에 원색의 물감 뿌리기를 통해 마치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우주를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더 구체적으로 그녀 자신을 돌아보려는 인간 존재론적 사유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분출하는 회화는, 모래알 같은 별들에 이름을 붙이며 별자리로 묶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유목민 칼데아인, 고대 이집트인과 바빌로니아인들과 같은 상상의 환희를 각박한 오늘날 현대 문명인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그것은 우주의 짙은 어둠의 혼돈(chaos)로부터 ‘하나의 이미지 덩어리’를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빛의 질서를 찾고자 했던 것으로 노력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적어도 그녀로선 “중력이 너무 커서 심지어 빛조차도 빠져나갈 수 없는 천체”인 블랙홀(black hole)로부터 이번 전시를 통해 화이트홀(white hole)을 찾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
출전 /
김성호, 「물의 생명력으로 창출하는 숲, 빛 그리고 우주」, 카탈로그 서문, (조귀선 개인전, 2015. 3. 9-3. 13, 경성대학교미술관 제1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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