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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손정희 / 다시 쓰는 전승 원형과 판타지의 서사

김성호

다시 쓰는 전승 원형과 판타지의 서사 


김성호(미술평론가)


I. 도자 조각 설치와 도자 은유 
II. 다시 읽는 전승 동화 - 깨뜨리기
III. 다시 쓰는 신화 - 적응으로부터 탈주하기  
IV. 동화/신화의 아키타입과 재해석 
V. 판도라의 판타지 서사   


도자 조각의 ‘조각적 설치’, ‘연극적 설치’를 감행하는 손정희의 작업은 옛 사람들의 전언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옛 서사이다. 그것은 비틀리고 해체된다. 그녀가 동화, 설화, 신화와 같은 전승(傳承)들에 내재한 전형(典型) 혹은 원형(原型)이라고 번역되는 아키타입(archetype)을 훼손하면서 그녀만의 이야기로 변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작업은 옛것의 전승으로 시작해서 그것의 해체와 재구성, 다시 말해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라는 재해석으로 끝을 맺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손정희의 작업에 나타난 이러한 재해석의 지평이 어떠한 것들인지 꼼꼼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작가 손정희 


I. 도자 조각 설치와 도자 은유
그런데 옛것의 ‘전승’과 더불어 병행되는 손정희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는 흥미롭게도 ‘도자(陶瓷) 조각’의 조형 언어로부터 유발된다. 일견 내러티브의 원형을 재해석하는 이와 같은 주제 의식을 담아내기에 ‘도자 조각’이라는 그릇은 비좁아 보인다. 피상적으로 도예와 조각의 만남이라는 도자 조각이 연상케 하는 전통적인 조형 언어의 한계는 명징하다. 흙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한계를 당위로 보는 까닭에 조각 자체의 다양성을 수렴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를 담기에는 창작의 과정마저 개념화시킬 수 있는 미디어 아트나 개념 미술의 방식이 외려 용이해 보인다.  
그러나 손정희는 도자 조각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조형적 한계를, 자신의 주제 의식과 본질적으로 맞물리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테마로부터 출발함으로써 벗어나고자 한다. 즉 도자 조각의 조형적 속성이 유발하는 가장 기본적인 주제 의식인 ‘흙과 불’의 본원성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의 작업이 ‘흙과 불의 본원성’과 ‘옛것의 내러티브’를 동일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고 평할 수 있겠다.   
생각해 보라! ‘도자’의 조형 방식은 인간 존재론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미술의 장에서 유감없이 실천한다. ‘흙’이라는 자연체로부터 생명 탄생의 의미를 불러옴과 동시에 ‘불’이라는 자연 현상으로부터 장례 의식을 한꺼번에 소환하기 때문이다. 특히 손정희는 자신의 창작을 모두 인체상에 집중하고 있는 까닭에 자연스럽게 흙과 함께 하는 인체의 탄생과 더불어 불과 함께 하는 인체의 죽음이라는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도자의 조형 방식과 흡사한 인간 존재론을 함께 성찰하게 만드는 셈이다.   

“흙으로 인체를 빚을 땐 제가 신이 된 기분이죠.” 

우리는 그녀가 흙을 빚어 인체상을 만들고 있을 때 마치 아담을 창조한 야훼가 된 듯한 착각에 휩싸였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겠다. 구약 성서에 따르면, 야훼는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이름을 아담(Adam, הָֽאָדָ֔ם)이라 칭한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최초의 남성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사람이라는 의미의 보편 명사이기도 하다. 그것의 어원은 사실 ‘흙(또는 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Adama, אדמה)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인간이란 먼저 흙이라는 질료로부터 온 존재임이 명확하다. 더 나아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세기 1장 26절)라는 삼위일체의 신으로서 야훼가 진술한 언급이나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 2장 7절)는 언급들은 우리로 하여금 야훼를 흙으로 인간을 만든 최초의 조각가로 인식하게 만든다. 자신을 모방하여 생명체 아담을 만든 야훼를 재현의 미학을 실천한 조각가로 바라보기에 족하게 만드는 것이다. 

손정희, 아름다운 기형아_2014_도자_깃털_20×32×15 cm

그런데 손정희가 인간 창조주처럼 느끼는 ‘신이 된 기분’은 실상 야훼와 같은 일신(一神)이기보다 다신(多神)의 체험에 가까울 법하다. 아담과 하와를 만든 야훼이기보다 최초의 여성이라 불리는 판도라(pandora)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그리스 신화에서의 신들처럼 말이다. 최초의 여성 판도라는 주신(主神) 제우스가 다음의 다신들을 동원해 만든 피조물이었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그리고 헤르메스, 아테나 등. 실제로 작가 손정희는 2015년 개인전 주제를 판도라로 설정하고 이러한 그리스 신화에 내재한 인간 존재론을 탐구한다. 물론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에게 익히 전해져 오고 있는 원형적 내러티브를 해체, 변형, 재해석하면서 탐구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손정희의 인체를 탐구한 도자 조각이 인간 존재론과 연계하면서 은유하는 미학적 지점을 먼저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녀의 도자 조각에서 발견되는 ‘흙/불’이라는 근원적 요소가 견지하는 ‘삶/죽음’이 겹쳐 있는 인간 존재론에 관한 것이다. 도자 조각은 일차적으로 ‘흙’으로부터 만들어지지만, 이내 ‘불’을 만나 흙의 생을 마치고 도자라는 제2의 생을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흙으로부터 빚어진 인간이 결국 화장(火葬)되어 차안(此岸)에서의 흙의 인생을 마치고 피안(彼岸)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과 닮아 있다. 흙으로 새 생명을 입은 후 다시 유약을 입고 가마에 들어가 이전의 스스로의 모습을 죽이고 다시 태어나 또 다른 삶을 지속하는 도자의 삶은 분명히 차안으로부터 피안에 이르는 우리 인간의 삶과 닮아 있다. 인간의 삶! 그것은 도자의 은유에 다름 아니다.  
손정희는 이러한 도자의 은유를 도자 조각 자체의 조형적 속성뿐 아니라 조각체를 연결하는 연극적 설치의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도자 조각 설치! 이 조형의 방식은 전승되는 옛것의 원형적 내러티브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손정희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라는 작업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있어 제격이라 하겠다.  


II. 다시 읽는 전승 동화 - 깨뜨리기
손정희가 오랜 시간 동안의 작업을 마침내 선보였던 첫 개인전(2009, 갤러리 THE K)은 동화(童話)에 관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동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도자 조각으로 만들어 연극적 설치 장면으로 선보이되, 동화의 원래 메시지를 변형시켜 내는 것이었다. ‘깨진 동화(Fractured Fairytales)’라는 주제처럼, 그것은 결국 작가 손정희가 시도하는 동화 ‘다시 읽기’에 다름 아닌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작가의 이러한 작업들은 당시 세 아이의 엄마로서 늘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 주면서 느꼈던 단순한 의문들로부터 출발된 것이다. 즉, 대개 동화 속 주인공은 착하고 수동적이어서 끝없이 인내를 하는데, 이러한 예의 바르고 순수한 전형적인 인물상은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닌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작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부모들이 별 생각없이 자녀에게 유명 동화를 그대로 들려주고 있지만 ‘그 동화 중 이 시점에서 재논의돼야 할 동화는 없는 걸까’하고 자문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동화를 또 다른 측면에서 누군가는 비틀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삶이란 때론 피를 말리는 노력이 필요하고, 절망도 경험해봐야 할 만큼 복잡 미묘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불가사의한 것’임을 손정희는 자신의 전시 주제 ‘동화 비틀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 모든 동화들에 딴죽을 걸고 동화의 메시지에 하나씩 반문한다. 


손정희, 신데렐라Cinderella_2009

동화 ‘신데렐라(Cinderella)’의 경우, 발 하나만 아담하게 작아 유리 구두에 맞기만 한다면 왕자와 아무 탈 없이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인가? 동화 ‘빨간 두건(Le Petit Chaperon rouge)’의 경우, 할머니를 잃은 어린 소녀가 늑대에게 먹힌 후, 사냥꾼이 늑대의 배를 갈라 구해 주기까지 그저 사냥꾼의 도움만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동화 ‘인어 공주(The little mermaid)’의 경우 인간의 다리를 얻게 된 인어의 삶은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는가? 동화 ‘라푼젤(Rapunzel)’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그녀가 만약 아름다운 목소리와 외모를 소유하지 못했으면 그녀가 과연 왕자를 만났을 수 있었을까? 더 나아가 마녀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 


좌측부터, 손정희, 빨간 두건의 소녀Red Riding Hood_2009
손정희, 인어공주Mermaid_2009
손정희, 라푼젤Rapunzel_2009

작가 손정희의 이러한 여러 반문들은 결국 자신의 작업에 대한 성찰로 되돌아와 기존 동화에 대한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전개시켜 나가게 만드는 힘이 된다. 예를 들어, 착하디착한 ‘신데렐라’는 그녀의 작품에서 전혀 신데렐라 같지 않은 외모를 한 채 곡예를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상야릇한 포즈로 등장한 신데렐라는 유리 구두에 맞는 ‘자그마한 예쁜 발’만을 가진 여인으로 그려질 뿐, 진취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지 못한 채 단지 ‘왕자와의 결혼만을 꿈꾸는 어처구니없고 게으른 몽상가’로 표현된다. 반대로 ‘빨간 두건’의 소녀는 도저히 늑대에게 잡아먹힐 것 같지 않은 강인한 체격과 근육을 가졌을 뿐 아니라 냉철한 지혜를 지니고 난관들을 극복해 나가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삶의 난국에서 타자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나는 소녀가 아니라 어려움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는 여성으로서 말이다. 
한편, 손정희는 ‘인어 공주’에게는 육지나 바다 중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었던 방황과 망설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쏟아낸다. 한 다리가 그물에 걸린 채 위태롭게 설치되어 있는 인어 공주의 모습에서 우리는 손정희의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읽어낸다. 아울러 손정희는 ‘라푼젤’에게는 길고 멋진 금발의 머리칼이 사실은 동화와 달리 어떠한 구원도 될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기다란 머리다발을 지탱한 채 간신히 자신의 몸을 허공에 위치시키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손정희의 동화 라푼젤에 대한 ‘다시 읽기와 쓰기’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전승을 전형화된 내러티브로 고착시킨 동화에 대한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는 작가 손정희만의 독자적 산물은 아니다. 특정 동화가 오늘날의 특정 내러티브로 정착되기까지 무수한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는 이미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행해져 왔다. 오늘날 동화란 바로 원시시대의 설화문학으로부터 근원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옛날이야기, 민담(民譚), 우화(寓話), 신화(神話), 전설(傳說)’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이야기 전승들은 정착되기까지는 민중 전체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오면서 여러 가지 윤색과 개작을 거쳐야만 했다. 즉 ‘구전(口傳)-기재(記載)-정착’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오늘날의 동화로 구체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창작동화와 달리 대개의 전래동화 혹은 구전동화는 원본과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판본인 이본(異本)들을 무수히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동화 ‘빨간 두건 소녀’의 경우만 해도, 어린 소녀가 늑대를 만나 펼쳐지는 단순한 이야기는 무수히 많은 이본을 지닌다. 대표적인 예로, 이 이야기는 먼저 17세기 프랑스 문학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에 의해서 ‘소녀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정리되었지만, 18세기 독일의 ‘그림(Grimm) 형제’에 의해서 이 전승 이야기는 위기로부터 탈출하는 해피엔딩으로 각색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차원에서 손정희의 도자 조각들은 구전 동화 자체에 내재한 무수한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손정희 식으로 재실행한 것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물론 도자 조각이라는 조형물을 통해서 기존의 오디오적 메시지를 비디오적 메시지로 전환하면서 말이다. 


III. 다시 쓰는 신화 : 적응으로부터 탈주하기
손정희가 2009년 개인전에서의 동화에 대한 관심은 또 다른 전승의 내러티브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두 번째 개인전(2011, 갤러리 세줄)에서 전시 주제로 선보였던 ‘신화(神話)’가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손정희는 당시 전시 주제로 ‘적응(Adjustments)’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그녀가 “삶을 살아가며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그려본 것”에 다름 아니었다. 
손정희의 입장에서, 결혼으로 인해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던 일련의 변화에는 일정한 적응이 필요했다. 즉 ‘누군가의 딸’이라는 기존의 자리로부터 ‘아내’와 ‘엄마’라는 새로운 명명(命名)의 자리가 추가되었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적응’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러한 ‘아내’, ‘엄마’, ‘며느리’와 같은 여성의 자리는 실상 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로부터 명명되어진 나’라고 하는 객관적 지표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들)은 ‘타자와 대면한 개별 주체’를 지칭하면서 우리의 현실계에서 그것은 ‘타자(들)로부터 명명되어진 개별 주체’로 드러나 보일 뿐이다. 케네스 거겐(Kenneth Gergen)의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적 현대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수많은 주체와 자아를 동시에 받아들이도록 적절한 ‘적응’을 기대하게 하며, 수많은 역할을 하도록 구속한다. 케네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대사회에 완전히 흡수되고 적응한 자아(saturated self)는 ‘진실한 자아(authentic self)’의 개념을 상실하고 ‘전혀 없는 자아(no self at all)’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손정희가 바라보는 ‘적응’이란 일정 부분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외려 바보 같은 주체를 만드는 가장 경계해야 될 것이기도 하다.  
‘신화’는 이러한 ‘타자들로부터 명명된 개별 주체’를 탈주하도록 도와주고, ‘스스로 사유하고 인식하는 주체’ 즉 ‘현대인이 상실한 진실한 자아’에 이르게 하도록 도움을 준다. 어떤 면에서 신화란 적응하기 또는 오염되기 이전의 인간 주체를 찾는 일에 도움을 주는 존재라 할 것이다. 신화는 가장 날 것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원초적 욕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작가의 진술을 보자. 

“누군가의 엄마, 아내, 또는 딸이라는 자리는 나에게 행복이자 부담으로 다가온다. 뒤틀리고 변태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나의 환상들은 거룩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묻혀 버리지만, 작업을 통해 나의 ‘부적합한’ 생각들을 소심하게 내보인다. (중략) 나는 우리 사회의 무언의 규칙들에 반항하는 생각들을 이야기한다. 관람객들과 보다 쉬운 소통을 위해 동화 또는 전설을 사용하기도 하며 이미 알려진 인물을 상상력을 통해 변형시켜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규칙이 무엇인가, 그런 규칙이 존재하는가 등을 질문한다.”

‘우리 사회의 무언의 규칙들에 반항’하고 ‘이미 알려진 인물을 상상력을 통해 변형시켜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규칙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고? 전자 ‘무언의 규칙’이 사회 제도의 규율, 규범 그리고 관습이라면 후자의 ‘근본적인 규칙’이란 인간 주체의 욕망과 의지와 같은 것이다.  달리 말해 사회의 규칙에 적응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탈주하여 가장 ‘근본적 규칙’을 찾는 일이 이 시기의 손정희의 작업이라 할 것이다. 근본적 규칙 찾기는, 작가의 말처럼, 동화 또는 전설을 통해 모색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바로 ‘신화’ 혹은 ‘신화적 존재’라 할 것이다.

손정희_아라크네_ARACHNE


보라! 그리스 신화의 한 비운의 주인공을 대형의 설치로 선보인 작품 〈아라크네(Arachne)〉가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한다. 커다란 여인 형상의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 그물 위에서 똬리를 튼 채, 자신의 슬프고도 처연한 분위기의 그림자를 벽과 바닥에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리디아의 염색공 이드몬의 딸인 ‘아라크네’의 과신과 오만의 욕망이 야기한 비극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녀는 자신의 베 짜는 재주를 과신하여 오만을 부리다가 수공예의 신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형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죽지도 못하고 평생을 베를 짜는 거미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가 들려주는 이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여러 신들의 시기와 질투, 엇갈린 욕망의 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풍부한 신화의 세계에 잠입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작가 손정희는 ‘아라크네’를 비극적인 상황 속에 빠진 슬픈 운명의 여인으로 놔두질 않고, 자신이 처한 비극적 운명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개척해 나가는 존재로 그려낸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신화를 뒤집어 다시 쓰고자 한 것에 다름 아니다.  


좌측부터, 

손정희, 길들여진 메듀사Medusa Tamed, 42x42x40cm, 조합토, 고화도 유약, 2011

손정희, 자웅동체Hermaphrodite, 32x30x38cm, 조합토, 고화도 유약, 2011.



그리스 신화의 또 다른 비운의 주인공을 다룬 작품 〈메듀사(Medusa)〉는 어떠한가? 원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주지하듯이, 아테나 여신의 저주를 받아 꿈틀거리는 뱀 머리카락을 가진 괴물이 되고 말았던 메듀사는 자신을 보는 사람들이 돌로 변하게 되고 마는 엄청난 형벌을 받는다. 조각가 손정희는 이러한 메듀사를 비극적 존재로만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숨긴 메듀사의 모습을 그저 비밀처럼 간직한 채 남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일까? 그녀의 작업에서 한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쉬!’라고 다그치는 메듀사의 조각상이 빚어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다른 작품  〈허머프로다이트(hermaphrodite)〉는 동명의 자웅동체인 존재의 간절한 욕망을 재조명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르마프로디토스를 사랑했던 살마키스가 한 몸 되기를 실천하여 성공한 결과가 바로 허머프로다이트라는 자웅동체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자웅동체의 본질적 소망은 완벽히 성취된 것인가? 혹시 그렇지 않다면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욕망은 더 이상 없는가? 손정희는 허머프로다이트 조각 즉 도자 조각의 몸체 위를 덧입힌 천 조각을 통해서 또 다른 욕망이 있음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감추고 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동화 전승의 이본(異本)들이 무수히 많이 있듯이, 위의 신화들 역시 다양한 이야기들로 전승되어 왔다. 예를 들어 맨 처음 살펴본 ‘아라크네’ 신화는 16세기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 뿐 아니라 이미 여러 작가들에 의해 작품화되었다. 작가 손정희 또한 원래의 신화가 야기한 강력한 내러티브와 메시지에 매료되었음에도 이 신화를 자신의 독창적인 시각 언어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현실계 제도권에 몸을 맞추어 적응시켜 나가는 인생에 반해서 적응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신화적 욕망에 대해 살펴보는 일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즉 신화에 대한 다시 읽고 다시 쓰기를 실천하고 싶었던 것이라 하겠다. 


IV. 동화/신화의 아키타입과 재해석
손정희의 동화와 신화에 대한 재해석 즉 ‘다시 쓰기’와 ‘다시 읽기’는 동화/신화의 ‘원형(原型, archetype)’을 비트는 것이다. 즉 내용이나 형식이 “같거나 비슷한 여러 개가 만들어져 나온 본바탕”을 원형이라고 할 때, 이 원형은 전형(典型, prototype)의 개념과 대치 가능하다. “같은 종류의 사물 가운데서, 그것의 본질적이고 일반적인 특성을 가장 많이 지닌, 본보기로 삼을 만한 사물. 또한 제작물의 근본이 되는 본보기, 모범” 등으로 해석되는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동화/신화의 가장 근본적인 내용과 형식을 연상케 한다. 구체적으로 풀어 말하면, 동화/신화에서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내러티브의 양식이나 인물 유형 혹은 이미지’ 등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이처럼 동화/신화에 일정한 내용과 형식의 원형(혹은 전형)이 있다고 간주하는 태도는 결국 “어떤 일군(一群)의 사물에 공통된 특징이 있다고 간주되는 형식”과 “보편적인 것을 모범적으로 표시하는 대표적인 그 무엇”을 지칭하게 됨으로서 ‘유형론(類型論, typology)’에 집중된다. 쉽게 말해, 유형론이란 어떠한 대상 내의 자료들을 ‘유형(類型, type)’에 따라 범주화하고 분류(classification)하는 귀납적 방법에 의하여 그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조형예술의 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유형론을 베허 부부(Bernd and Hilla Becher)가 독일 곳곳에서 동종의 건축물을 촬영, 분류한 사진 작업을 떠올릴 수 있겠다. 공통적 범주로서의 내용 뿐 아니라 형식의 유형화를 쉽게 생각하면 되겠다. 예를 들어 동화/신화의 원형이라는 것은 해피엔딩을 주로 지향하거나,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동물을 의인화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내용적 측면도 있다. 이것은 서양과 동양의 차이가 크지 않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의 착한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한국의 ‘콩쥐팥쥐’의 이야기와 맥을 잇고, 서구에서 ‘빨간 두건 소녀’의 이야기는 한국에서 ‘해님 달님’ 이야기와 닮아 있다. 특히 그리스 신화로 대별되는 서구의 신화 체계는 아시아의 것과 유사하지는 않지만 다신의 세계관을 공히 드러내면서 양자 간 인간 전승의 내러티브를 일정 부분 공유한다. 

손정희, 선녀와 나무꾼_2009


그렇다면 서구와 한국의 동화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내용적인 원형을 재해석하는 손정희의 도자 조각에서의 형식적인 아키타입 즉 원형은 무엇일까? 도자 조각의 일반적인 원형이라면 소소한 크기와 흙의 성질을 강조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최소한의 유약과 색 등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반면 손정희의 도자 조각의 형식적 원형은 ‘풍자적이고 심미 비판적인 인체 형상’으로 정의될 수 있겠다. 흙에게 근육을 입히고, 유약으로 호흡을 넣고, 최소 세 차례 이상 가마에서 굽는 불의 과정을 거쳐서 그의 도자 조각은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한편 이렇게 만드는 그녀의 ‘도자 인체 조각’은 ‘연극적 조각’ 혹은 ‘상황적 조각’이라 작명될 수 있겠다. 전통적 흙-유약-조각일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통한 상황 미술이라고 그녀의 도자 인체 조각을 확장된 장르로 설명해 낼 수 있을까? 조형 언어의 형식에서 손정희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도자 조각이라는 전통적인 방식 너머에 헝겊, 실타래, 조명 등의 타 재료를 적극적으로 접목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일까? 동화, 설화, 신화를 재해석하는 내러티브가 탐구하는 원형 해석적 접근 즉 형식적 유형론적 방법론을 만나 그녀의 도자 조각은 확장된다. 즉 유형론적 내러티브가 연극적 상황, 설치로 확장됨으로써 다른 도자 조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면모를 드러낸다. 

좌측부터 

손정희, 큐피트 Cupid

손정희, 큐피트 Cupid

손정희, 제우스 Zeus



거기에 덧붙이는 그녀만의 독특한 풍자적인 조각 언어는 기존의 ‘원형 해석’에 있어서의 풍부한 변형의 가능성을 선사한다. 어린 큐피트가 아니라 작가 손정희에 의해 배불뚝이 아저씨 모습으로 해석되고 변화된 중년의 큐피트는 어떠한가? 또는 100일 동안 마늘만 먹어 인간이 된 웅녀를 조각화한 표정과 자태는 익살스럽기 그지없다. 거만한 표정의 제우스 상은 또 어떠한가? 예쁜 머리카락 색을 한 채 고뇌와 번뇌에 빠진 듯한 〈요정(nymph)〉, 방탕한 분위기가 가득한 고혹적 자세의 〈사티로스(satyr)〉 상은 또 어떠한가? 

좌측부터
손정희, 요정 Nymph
손정희, 시티로스 Satyr, 2013

유념할 것은 그녀의 작품에서 ‘신화는 더 이상 과거의 이야기’로만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끊임 없이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읽고 다시 쓰기를 지속하기 때문이다. 원시 신화로부터 근대적 의미의 종교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아키타입, 즉 원형을 자신만의 독자한 도자 조각의 언어로 찾아 나가는 것이다. 


V. 판도라의 판타지 서사
손정희는 가장 최근의 개인전(2015, 갤러리 학고재)에서 전시 주제로 ‘판도라’를 선보였다. 이 주제는 서두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원형적 내러티브를 해체, 변형, 재해석하면서 탐구하는 인간의 시원적 존재론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시원적 존재? 전시 장소에서 제일 안쪽 전시장에 자리 잡은 판도라의 어두운 공간은 최초의 여성 탄생의 신화를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보여준다. 비장한 표정을 한 황금빛 얼굴의 판도라 도자 조각상은 도자라는 질료적 속성을 뒤덮는 검은 깃털의 묵시적이고도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하다. 천장에 무수하게 매달린 나방들의 날갯짓이 펄럭이는 어둠의 공간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주체는 바로 제우스가 모든 신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판도라’라는 이름의 최초의 여성 인간이다. 
그러나 판도라 이전에 이미 인간이 있었다. 남성 인간이다. 이들에게 천상의 불을 훔쳐 준 프로메테우스를 미워하던 제우스는 그를 벌하기 위해 여자 인간인 판도라를 만들어 보낸 것이다. 어째 히브리 전승의 하와(חַוָּה, Ḥawwāh)의 내러티브와 닮아 있지 않은가? 하와는 야훼가 두 번째로 창조한 인간이자 아담을 위해 첫 번째로 창조한 여자이듯이, 제우스가 여러 신의 도움을 받아 창조한 판도라 역시 두 번째 인간이자 첫 번째 여자가 된다. 그렇다.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2차의 인간 존재이듯이, 판도라는 남자의 존재를 징벌하기 위해 등장한 2차의 인간 존재이다. 하와가 선악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아담에게 그것을 취하게 했듯이, 판도라는 상자 열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열어젖히고 만다. 하와가 선악과로 원죄를 만들었듯이, 판도라는 상자 열기로 세상에 모든 불행과 범죄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만 판도라 상자 안에 남겨진 ‘희망’만이 판도라에게 한 줄기 포기할 수 없는 꿈을 안겨 주었음을 유념하자. 이러한 차원에서 ‘희망’만을 남긴 채 인류에게 질병, 죽음, 질투, 증오 등 해악과 재앙을 안길 주범이 바로 판도라라는 것을 손정희는 다시 한 번 다음처럼 강조한다: “판도라는 신들이 공들여 만든 여자예요. 언젠간 날아갈 수 있는 힘을 내재하고 있는 여자죠. 사죄해야 하는 여자가 아니고요.”
괴기스럽고 묵시적인 분위기, 그 속에 드러난 판도라의 존재. 그것은 태초의 선과 악의 근원을 다루는 한 편의 판타지(Fantasy)이다. 나아가 그것은 실재이기보다 설화, 신화 속 심층 의식이나 환상의 영역에 거주하는 마술이나 초자연적 요소의 세계이며, 그것에 관한 작가의 이야기는 결국 ‘판타지 서사’라 할 것이다. 

손정희, 판도라, 2015, 도자, 깃털, 가변 크기, 전시 장면 



손정희는 고대 신화의 판도라를 오늘날에 조각의 몸체에 육화(incarnation)시키기 위해 전시장 전체를 공간 설치 작업으로 만들어 내었다. 신비한 조각의 몸체를 위해 흙을 빚어 유약도 바르고 도자 조각을 세 번 이상을 굽고 또 구웠다. 그 뿐 아니라 도자 조각 표면 위에 헝겊, 실타래, 깃털 등의 소재도 함께 추가해 그만의 판타지 서사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괴기한 듯 보이지만 전형적인 아름다움보다 더 매력이 있죠.”

그렇다! 신화 서사가 보여 주는 전형과 원형의 범주들을 이탈하면서도 그것을 아우르는 그녀만의 한 편의 판타지 서사를 구현하기 위해 손정희는 세부적 조형 언어뿐 아니라 주제 연구 또한 묵직한 것으로 펼쳐 나간다. 그녀는 이러한 묵직한 주제가 담긴 ‘전시를 통해 판도라처럼 세상이 원죄의 주범으로 여기고 손가락질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담고자 한다. 
또 다른 예로, 〈데뷔탕트 7대 죄악(Debutantes 7 Sins)〉이라는 제명을 지닌 일련의 프로젝트형 조각들은 이러한 묵직한 주제들의 손정희 식의 번안 작업이 된다. 손정희는 폭식(Gluttony), 탐욕(Greed), 나태(Sloth), 분노(Wrath), 오만(Pride), 색욕(Lust), 질투(Envy) 등 성경에 나오는 7대 죄악을 의인화한 조각들을 한쪽 전시장에 마련했다. 이 조각들은 더러는 기괴하고 더러는 섬세한 심리를 담고 있다. 이러한 시각 언어들로 7대 죄악의 메시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게끔 만든 이 조각들은 관객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손정희, 데뷔탕트 7대 죄악, 2015


손정희, 데뷔탕트 7대 죄악, 2015

앞으로 손정희의 작업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구체적으로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까지의 그녀의 작업을 가늠하면서 예견해 볼 뿐이다. 때로는 그녀의 작업이 묵시적이거나 그로테스크하고 때로는 그것이 엉뚱하고 재기발랄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그녀의 창작 태도는 기존의 것들에 대한 비틀기가 주를 이룰 것으로 예견해 볼 수 있겠다. 구체적으로는 동화, 설화, 신화 등 옛것의 내러티브를 오늘날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일이 앞으로도 그녀의 작업에 주요한 화두가 될 것으로 예견해 본다. “굳이 도예에 한정되고 싶지 않아요. 표현하고 싶은 걸 표현하자는 주의죠. 그래도 흙 만지는 게 좋으니까 그걸 버리진 않을 거예요”라는 말처럼, 그녀의 작업의 매체적 출발점인 도자 조각이라는 장르를 중심에 두고서 말이다. ●



손정희 개인전 전경 , 2015



출전/
김성호,「다시 쓰는 전승 원형과 판타지의 서사」, (손정희 작가론), 『미술평단』, 120호, 봄호, 2016, pp.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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