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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퀀텀 점프전 / 약동하는 청년 작가와 전시 지원 모델

김성호

퀀텀 점프-약동하는 청년 작가와 전시 지원 모델

김성호(미술평론가)


I. 들어가는 글 - 협력의 전시 지원 모델
경기창작센터(센터장 서정문)와 경기도미술관(관장 최은주)의 협력 전시 사업인 《퀀텀 점프: 경기창작센터 청년작가전》은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의 작품 발표 지원을 다각화한 하나의 모델이라고 하겠다. 이 사업은 도심과 현저한 거리를 두고 있어 관객들이 잘 찾지 않는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 위치한 경기창작센터 내부의 전시장 대신 비교적 시민들의 왕래가 빈번한 경기도미술관의 전시 공간을 활용한다. 경기창작센터의 입장에서는 레지던시 본연의 창작 지원 실무에 집중하면서도 입주 작가들에게 작품 발표 기회를 다각화해서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경기창작센터의 고뇌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경기도미술관의 입장에서 이 사업은 미술관의 1층 로비 공간의 한 끝에 마련한 ‘프로젝트 갤러리’의 전시 공간으로서의 위상과 더불어 활용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했다. 미술관 유리 외벽을 파티션으로 둘러싼 채 전시공간의 면모를 얼추 갖추었지만, 이 전시장은 채광, 조명, 공간상의 난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공간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미술관 공간의 효율적 활용에 대한 다양한 모색을 미술관 외부의 작가들로부터 구하는 셈이라 하겠다. 미술관의 학예 인력이 미처 간파하지 못한 다양한 가능성을 위해 외부에 문을 열어 둔 이러한 시도는 매우 유의미하다. 
이번 프로젝트는 작가들의 입장에서도 창작의 결과물을 공간 연출의 방식을 통해서 어떻게 구현할지를 미리 연구하고 준비하게 만드는 훈련을 거치게 했다는 점에서, 향후 작가들의 전시 구현에 있어 셀프 매니즈먼트의 효과를 일정 부분 거두었다고 하겠다.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한 문화재단 소속의 기관과 또 다른 기관이 협업한 네트워킹의 시너지 효과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개인전으로 참여하는 작가들의 치밀한 사전 계획이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풍부하게 변모해 가는 과정 속에서 관객들은 기존의 미술관의 획일화된 공간이 작가별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공간의 멋진 변주’를 매번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번 프로젝트 형 전시는 전시 결과에 대한 비판적 점검에 앞서 출발부터 일거양득을 넘어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기관과 기관의 협업과 네트워킹은 물론이고 공모와 심사 그리고 지원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전시를 미리 점검하고 준비하는 새로운 전시 모델을 구현했다고 하겠다. 물론 이번 전시에 대한 비판적 논점 역시 없지 않다. 이 글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하고 향후 바람직한 개선 모델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II. '퀀텀 점프'라는 주제 의식의 난제
이번 프로젝트 형 전시명은 《퀀텀 점프: 경기창작센터 청년작가전》이다. 이러한 작명은 이번 사업이 ‘경기창작센터의 입주 작가들을 위한 전시 지원’임을 피력함과 동시에 이 전시를 통해 예견하는 기대효과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즉 “유망한 청년작가들에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약’을 의미하는 ‘퀀텀 점프(Quantum Jump)’라는 용어는 그 메시지가 매우 명확하지만 청년 미술가 지원이라는 점에서 풀 수 없는 난제를 태생부터 배태한 것이기도 하다. 
‘퀀텀 점프’는 물리학 용어에서 나온 만큼 굳이 번역을 한다면, ‘양자 도약’이 되겠다. 이 용어는 양자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과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가 20세기 초에 제안한 개념이다. 그는 물체에 열을 점점 가함에 따라 물체의 색이 빨간색, 노란색, 하얀색으로 변하는 이유를 이 ‘퀀턴 점프’로 설명했다. 이것은 원자에 에너지를 가했을 때, 핵 주위를 도는 전자가 낮은 궤도에서 높은 궤도로 나아갈 때, 에너지의 위치를 계단을 뛰어넘듯이 갑작스럽게 불연속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을 지칭한다. 이처럼 양자(量子)화된 도약 즉 ‘퀀텀 점프’에는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전개가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급작스러운 전개만이 있다. 즉 점층적 상승 곡선이기보다 갑작스럽게 뛰어넘는 비약, 도약을 상정한다. 
한편 ‘퀀텀 점프’라는 이 물리학 용어는 경제학에서 사업 혁신을 통해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실적이 호전되는 경우를 지칭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물리학에서 이러한 ‘퀀텀 점프’라는 ‘양자 도약’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지극히 안정된 기저상태(基底狀態)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매우 미시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것을 광범위한 차원에서 벌어지는 경제적 급성장의 변화에 적용할 수 있는지는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노정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 용어가 미술 전시 현장에서 주제로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도 난제 그 자체이다. 미술(사)의 변화를 기술적 진보처럼 발전적 개념을 정초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개별 미술가들의 활동을 이러한 급작스러운 도약의 개념으로 제시한다는 것이 다분히 부적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용어가 제안하는 주제 의식에 대한 이해는 실제로 어렵지 않다. 심사를 거쳐 선정된 작가들에게 지원하는 이번 4인의 릴레이 개인전이 역량 있는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도약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경기창작센터의 기대치와 더불어 이번 사업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잘 드러내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 주최 측은 “2015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진행될 ‘퀀텀 점프: 경기창작센터 청년작가전’ 프로젝트를 통해 창작센터 작가들이 ‘작업’이라는 고독하고 긴, 지난한 여정에서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런 면에서 혹여 있을지 모를 풀리지 않는 예술의 깊은 수렁으로부터 탈주하고, 예술을 향한 지난한 여정에서 이번 전시가 4명의 지원 선정 작가들에게 도약적 발전의 사건이 되기를 기대하는 주최 측의 희망이 잘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미술 창작을 지원하는 공적 기관에서 미술 창작 세계에서의 도약을 이야기하는 것은 경쟁력 있는 문화 컨텐츠를 만들어 내려는 상업 기획자의 입장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적 문제의식이 제기될 수 있다. 20세기의 미술이라는 것이 이전 시기의 미술을 구태의 것으로 밀어 내고 ‘새로운 것’을 향한 끊임없는 진보적 세계관으로 이끌어 온 미술운동사(movements in art history)의 연속이었지만, 아서 단토의 지적대로 오늘날의 21세기 미술은 진보적 세계관에 종지부를 찍은 ‘미술종말 이후의 미술’(Art after the end of Art)의 세계이자. 다원주의 미술의 세계이지 않은가? 
 

III. 통시적 도약으로부터 공시적 도약으로 : 프리뷰 전시
유념할 것이 있다.《퀀텀 점프: 경기창작센터 청년작가전》사업의 주제 의식에서의 긍정적 면모는 역사에서의 도약만을 지향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것은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도약으로부터 공시적(共時的,synchronic))  도약으로 확장한다. 전자가 역사의 종(縱)적인 도약이라면 후자는 지금, 여기라는 현재적 횡(橫)적인 도약이다. 이것은 작가 개인의 작업사 속 도약만이 아닌 작가와 작가들 간의 네트워킹과 소통 속에서의 도약을 도모한다. 
‘퀀텀 점프’전은 선정된 특수자 개인의 종적 도약에만 집중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같은 주제 아래 경기창작센터 입주 작가 중 4명의 릴레이 개인전을 연속적으로 개최하는 것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선정 지원의 결과물인 개인전 이전에 그룹전인 프리뷰 전시를 만들어 미리 전체 그림을 조망하는 이유도 작가와 작가 간의 횡적 연합을 유념하고 있는 까닭이다. 달리 말해 지금, 여기의 네트워킹을 통해서 특수자의 종적 발전사로부터 보편자의 횡적 발전사로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선정 작가 4인(고우리, 민성홍, 홍란, 편대식)은 경기도미술관 1층 프로젝트갤러리에서 2015년 8월 1일부터 24일까지의 일정으로 《퀀텀 점프: 경기창작센터 청년작가전》라는 이름의 프리뷰 전시를 개최했다. 2015년 11월부터 2016년 3월까지 같은 장소에서 릴레이로 이어질 개인전을 미리 점검해 보는 장이자, 창작의 색이 다른 참여 작가들의 개성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서로 다른 4가지 작업이 한 장소에 모여 이뤄 낼 시너지 효과를 실험하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이것은 “청년작가들의 각각 독립된 작업이 퀀텀 점프의 흐름과 같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인과적 요소로 새로운 국면의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횡적 연합’ 혹은 ‘공시적 네트워킹’이 이어지는 릴레이 개인전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가 지니는 횡적 네트워킹의 유의미한 담론을 곰곰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참여 작가들의 상호작용만이 아니라, 이 프리뷰 전시는 경기창작센터와 경기도미술관이라는 두 기관의 협력,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전시 콘텐츠를 선사하려는 기획 의도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품, 작가와 또 다른 작가, 작가와 관객, 작가와 기획자, 작가와 미술관 그리고 창작센터로 이어지는 연쇄의 네트워킹에 대한 관계 모색은 그 어느 것 하나만이 강조될 수 없다. 일상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일상이 되는 오늘날 그리고 일상계와 예술계의 경계가 사라진 오늘날 시대에 네트워킹은 여전한 화두이다. 
그런 면에서 ‘퀀텀 점프’에서의 ‘도약’이란 현재로부터 미래로의 도약(도약적 발전)만이 아니라 현재 작가들 간의 ‘역동적이고 응축된 에너지’의 상호 교류라는 네트워킹에서의 도약(도약적 운동성) 역시 주요한 키포인트가 된다고 할 것이다. 



IV. 도약적 운동성의 미시 세계 : 릴레이 개인전
경기도미술관 1층 프로젝트 갤러리는 전시를 기획하고 공간 연출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제약과 동시에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장소이다. 원래 전시 공간으로 설계되지 않은 곳을 후일에 전시공간으로 섹터화를 시도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고 할 것이다. 전시 지원에 응모했던 작가들은 대부분 이 점을 주목하면서 실내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장소특정적인 상황들을 십분 고려한 흔적들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천착해 나간 4작가의 내밀한 작품 세계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민성홍의 《중첩된 감성(Overlapped Sensibility) : 채우다(Imbued)》
퀀텀 점프의 첫 번째 릴레이 개인전인 민성홍 전(경기도미술관 프로젝트갤러리, 2015. 11.20 - 12.13)의 정확한 전시명은 전체 주제가 앞서고, 영문이 주가 된 채 한글이 병기된,《퀀텀 점프_민성홍 Overlapped Sensibility : Imbued 채우다》이다. 
민성홍은 사진, 콜라주, 드로잉,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조형 언어를 사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중첩된 감성’이라는 단일한 주제를 자신의 작품에 사용해 왔다. 우리가 늘 사유의 대상에 대해 호불호의 감정이 엇갈리고 참과 거짓의 판단에 있어 양자를 오가는 것처럼, 우리의 감성이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늘 변덕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이를 오간다. 작가는 그것을 ‘의미적 재인식 과정’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감성의 방황 혹은 횡보 속에서 일련의 내러티브가 등장한다. 그것은 작가와 환경 혹은 대상 사이의 관계 맺음에서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인식 과정 속에서 유발되는 중첩의 감정이기에, 구체적이라고 하기보다 이미저리(imagery)와 같은 막연한 심상(心像)의 내러티브를 드러낸다.  
민성홍은 이러한 인간 주체의 감성의 양면성을 하나의 대상 위에 겹쳐 올린다. 그것은 동시다발적으로 함께 생성되거나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다른 감성들’이지만, 민성홍은 자신이 마주하는 사물들 위에 이내 그것들이 하나로 포개지는 상황을 구현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대상화된 사물들이나 수집된 이미지들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반복적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예를 들어 ‘사진을 반복적으로 잘게 찢어 붙이거나 잘라낸 화면 속 공간들을 투명 테이프로 다시 붙이는 과정’을 통해서 생성되는 감정(들)을 작가는 작품 위에 중첩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중첩되는 감성’은 대부도 인근의 폐가의 지붕들에, 안뜰에서 재생된다. 그는 이 폐가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만한 새 형상의 두상들을 배치하고 촬영한 사진들을 벽면에 붙여 놓았다. 아울러 폐가의 지붕들을 재료로 가져와서 이 상황들을 전시장 중앙에 구조물로 재연해 놓았다. 4개의 지붕이 1개의 구조물에 연결된 채 재연된 폐가와 그 아래 군집으로 놓인 새 형상의 두상들은 과거와 현재의 감성을, 버린 자와 버려진 자의 감성을, 공포와 연민의 감성을 뒤섞어 놓는다. 그것은 그가 대부도의 실제 폐가로부터 가져와 만든 지붕의 구조물로부터 유발된 것이기도 하다: “지붕에는 두 가지 모순된 속성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방어의 기능인 폐쇄성이고, 다른 하나는 소통의 기능인 개방성이다. 지붕의 철학은 바로 이런 호의적인 대립 속에 자리한다. 지붕은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노출시킨다.”
민성홍은 티에리 파코(Thierry Paquot)의 저작『지붕(Le Toit)』(2003)에서 글을 가져와 관객과의 소통을 도모한다. 파코가 지붕을 ‘우주의 문턱’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인간 존재와 세계를 만나게 하는 접점인 까닭이다. 마치 지붕은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1927-1940)에서 19세기 파리의 파사쥬(passage), 더 구체적으로는 문지방이라 번역되는 독일의 쉬벨러(Schwelle)'가 보여 주는 ‘안/밖’의 양가 통합적 입장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지붕에는 위로의 열림과 아래의 닫힘이 하나로 존재한다. 
민성홍에게 있어 폐가 재료로 만든 지붕 구조물은 대부도 폐가에서 촬영한 이미지를 실재화하는 효과를 발현시킨다. 작가가 언급하는 중첩된 감성을 ‘채우기’하는 일련의 메시지도 전하는 이중의 효과를 획득한다. 게다가 도자로 만들어진 새의 두상들은 폐가의 주인이었을 인간을 훌륭히 은유함으로써 실제의 공간으로부터 창출되는 연결의 내러티브를 가시화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이전 작업에서 선보인 ‘낯설지만 산뜻한 조형 효과’를 훌륭히 연장하면서도,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고 ‘작업과 생활이 일치’하는 작가가 되길 원하는 민성홍의 진지한 작업 태도를 잘 드러낸다. 이번 그의 전시는 무엇보다 대부도의 폐가라는 장소특정적인 상황들을 화이트 큐브로 무리 없이 연결하는 작가의 노련한 조형적 스킬과 더불어 대상과 주제를 대면하는 따뜻한 감성이 돋보인 전시라 할 것이다. 


민성홍, 전시 전경, 2016



2. 고우리의 《잡히지 않는 것들》
퀀텀 점프의 두 번째 릴레이 개인전인 고우리 전(경기도미술관 프로젝트갤러리, 2015. 12 . 18 - 2016. 1. 10)은  ‘잡히지 않는 것들’이라는 주제 아래 회화 작품 11점을 선보인다. 
주제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작가는 평면 회화 그것도 추상적 회화를 통해서 규정될 수 없거나 범주화될 수 없는 감정들의 시각화를 시도한다. 그것은 타블로라는 캔버스 작업 위에 올리는 물감의 운위의 흔적과 그것이 남긴 마티에르의 흔적들로 시각화된다. 그녀의 작품들에는 화면 구성과 경영에 있어서 이성적 통제를 시도하기보다 감정적 흐름에 몸을 맡긴 흔적들이 고스란히 화면 위에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은 대개 물감이라는 매질의 것이지만 그녀의 작품에서 주요한 부분은 이 물감을 운위시킨 화가의 실제적 신체라는 점이다. 
고우리는 사회적 인간으로 거주하는 사회 속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유발되는 감정들을 작품화시킨다. 그것은 밝고 쾌활한 것이기도 하지만 불편, 분노, 미움과 같은 것들이기도 하다. 감정이란 분절된 언어들을 통합하는 ‘몸으로서의 언어’로 표상된다. 그래서 감정을 구체적인 언어로 맥락화하여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오히려 순수한 회화적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더 수월해지기도 한다. 특히 고흐(Vincent van Gogh)와 프랑스 야수파(Fauvisme)로부터 뿌리를 두고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로부터 촉발했던 표현주의 (expressionism) 류의 ‘뜨거운 추상’ 언어는 이러한 감정의 진폭과 깊이를 표현하는데 있어 유효하다. 1945년 이후의 미국발(發)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란 원래 비평가 바(Alfred Barr)가 1929년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화를 지칭하면서 사용한 이름이지 않든가? 
고우리의 전시명 《잡히지 않는 것들》이란  감정과 추상의 공유 지점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형상이 없는 평면의 화면에서 엉뚱한 감정이 먼저 충동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며 보이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도록 한다.”라는 작가의 언급은 따라서 감정 표현에 있어 추상의 유의미성을 견지한다. 그녀가 설정한 인간관계로부터 기인한 감정의 추상적 표현은 그래서 이렇게 잡히지 않는 것(감정)들을 포획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해소가 되기도 전에 스쳐 지나가는” 순간적이며 임시적인 것들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그녀는 “고정되어 있는 관념들과 감정을 결합시켜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엉뚱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한다. 비언어의 층과 언어의 층 사이를 오가는 감정 표현의 회화적 제스처란 이처럼 모호한 가운데서 증폭한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것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거나 언어보다 비언어의 효용성을 간과하는 오늘날 그녀의 ‘감정의 문제를 다루는 회화’ 그리고 ‘감정을 앞세운 회화’는 소통에 있어서 주요한 지점을 건드린다. 
미국의 사회학자 메라비안(Meharabian, 1939-)에 따르면 인간 소통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7%이지만, 비언어적 요소는 55%이다. 버드 휘스텔(R. Lay. Birdwhistell 1918-1994) 역시 인간 소통에서 음성 언어가 전달하는 정보의 양보다 비언어가 전달하는 정보의 양이 월등히 높음을 주장한다. 그에게서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란 동작 언어의 소통(bodily communication)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후기기호학자들에 의해서 이것은 이미지 커뮤니케이션(image communication)으로 재정의된다. 감정을 표현하는 얼굴 표정, 손짓 등이 모두 그러한 예들이다. 하물며 이미지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비언어적 기호인 이미지는 어떠한가?  이성보다 감성, 언어보다 비언어가 앞지르는 인간 소통은 고우리의 작품에서처럼 추상적 표현이 제격이다. 
게다가 고우리의 회화는 ‘이중 분절(double articulation)의 언어’ 대신 분절되지 않은 신체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녀의 작품은 가히 ‘신체 회화’라 부를만하다. 붓의 다양한 크기와 모양이 아닌 손의 다양한 표정들, 일테면 그녀는 “손바닥, 손날, 손끝은 물론, 손끝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손톱”에 이르기까지 변화하는 감정에 따라 자신의 몸을 세우고 눕히면서 온몸으로 회화하기를 행한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회화의 가장 순수한 추상성에 잠입해서 그것의 표현적 언어를 매만지고 있는 그녀의 작업은 유의미하다. 게다가 탈신체화를 촉구하는 디지털 시대에 그녀의 신체성과 수공성의 회화는 분명 그 대안적 모델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유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비판적 문제 제기는 있다. 오늘날 추상이란 어느 누구의 작품이든 새롭거나 독자성을 발현하기 쉽지 않다. 엄밀히 말해 추상이란 근대적 소산으로 출발해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결국 근대적 영역을 탈주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이미 종결한 구태의 장르라 할 수 있겠다. 화가 고우리가 자신의 손의 흔적이 꿈틀대는 여러 작품들에 각기 다른 내러티브와 제목들-예를 들어 〈엄마와 싸운 날〉, 〈노란 바다〉, 〈따사로운 27일〉과 같은-을 사용한다고 한들 그녀의 표현주의적 추상회화의 근원적인 결과물은 20세기 미술사의 작품들이 지닌 조형 미학과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 개념이 구체화되든지, 추상 언어가 변화되든지 새로운 과제 설정이 필요해 보인다. 



고우리_하얀 바다_캔버스에 유채_91.0_116.8cm_2015


고우리_비우기위해필요한시간_캔버스에 유채_ 130.3_387.8cm_2015



3. 홍란의 《무리지어 엉켜 있는 상태(Situation tangled-grouped)》
퀀텀 점프의 세 번째 릴레이 개인전인 홍란 전(경기도미술관 프로젝트갤러리, 2016. 1. 15- 2. 10)은 ‘무리지어 엉켜 있는 상태’라는 주제 아래 펼쳐졌다. 
동양화의 전통적인 기법을 확장하여 평면은 물론 설치 작업에까지 이르는 전시 프로젝트는 압권이다. 특히 악어라는 뒤엉킨 동물 무리와 보석들을 뒤섞어 놓는 방식으로 인간 사회에 대한 은유의 전략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인간의 음험한 욕망들을, 한편으로는 경쟁에 지친 현대인의 이상향에 대한 염원들을 뒤섞은 채 말이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특히 신경 쓴 부분은 전시장에 구획된 공간 구분에 부합하는 멋진 공간 연출이었다. 원래의 공간 자체가 가벽들이 많이 세워진 분할적인 공간인 탓에 한두 점의 대형 설치 작품으로 전시를 꾸리기에는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공간 구조의 특성을 활용한 흥미롭고도 다양한 공간 연출이 필요해졌는데, 작가 홍란은 기존의 공간 구조를 자신의 작업 안으로 가져오는 실험을 감행했다. 즉 그녀는 이번 전시를 오직 ‘프로젝트갤러리’만을 위한 전시로 기획한 것이다.  
홍란은 기존의 자신의 작업에서 평면으로만 표현되었던 일명 ‘악어 산수’를 페인팅과 설치 조형물로 제시한다. 동양화의 2차원 전통의 공간을 3차원으로 이동하려는 시도라고도 풀이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악어의 무리들이 2차원 평면으로 전시장을 가득 메운 작품 〈크리스털 섬(Crystal Island)〉이나 3차원 입체의 형상으로 기둥을 타고 내려오는 작품 〈무제(Untitled)〉는 매체를 확장하려는 작가의 실험 의욕을 여실히 드러낸다. 
한편, 윈도우 전시장을 가득 메운 〈크리스털 섬(Crystal Island)〉은 보석으로 가득한 3차원 조각이지만, 관객들은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서 그 밑에 아크릴 거울로 만들어진 악어 모양의 2차원 그림자를 맞닥뜨리게 된다. 2차원의 3차원 변형, 그리고 3차원의 2차원 변형은 물론이고 2차원/3차원이 맞물린 그녀의 조형 변주는 동양화의 정중동의 공간을 더욱 활력 있게 만든다. 
작가 홍란의 이번 전시에서 섹션 별 작품들로 거대 서사를 구성하는 주체들은 단연 악어 집단이다. 전시 공간 3면을 에워싸고 있는 악어 떼들도 그러하지만, 3차원 보석 산수 아래 수면 아래 가득한 2차원 평면의 악어 무리도 그렇다. 
악어라는 생물체의 공간적 집합체인 악어 무리는 생태학적 의미에서 동종생물의 집단적 개체군에 불과하지만 이 전시에서는 집단역학(集團力學)이라는 사회학적 의미마저 함유한다. 주지하듯이, 집단역학이란 개인 단위를 넘어선 집단 성원 내부에서 발생되는 상호 작용과 상호 의존성을 연구함으로써 구성원들 간의 세력 관계를 분석하는 학문적 지향을 말한다. 이 안에는 집단 특유의 운동 법칙이 존재한다. 한 집단의 장(長)의 지도력을 추종하거나 반발하면서, 변하는 사회의 장(場) 속에서, 재통제와 재설계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변모되어 간다. 
그러니까 작가 홍란이 선보이는 ‘무리지어 엉켜 있는 상태’란 악어 집단을 통해서 오늘날 인간 사회를 은유하는 작업이 된다. 지배자의 이름 아래 모이는 국가 제도와 사회 규범 그리고 일탈을 방지하기 위한 통제의 규칙들이 악어 집단의 운동을 재설계를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즉 사회적 인간의 욕망과 그 허상에 대한 자기 비판적 성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녀의 이번 전시는 동물 집단을 통해 인간 사회를 고찰하는 은유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까닭에, 비교의 수사학이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흥미로운 것은 2차원 평면/3차원 입체, 화려한 미적 대상/공포와 추미의 대상, 동물성/식물성, 악어 집단/인간 사회와 같은 다양한 대비적인 관계들이 그녀가 펼치는 마술적 조형 언어 속에 서로 겹쳐지고 양자 간 스며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보석과 같은 신비롭고 영롱한 이미지는 으스스한 공포의 분위기 속 괴물처럼 자리한 악어 군집체와 맞물려 그로테스크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해 준다. 이탈리아 원어 그로테스코(grotesco)가 ‘보통의 그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를 장식한 색다른 의장(意匠)’을 지칭하는 것처럼, 그녀의 전시에서 그로테스크 미학은 악어와 보석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괴이한 조합을 보여 준다. 그것은 극도로 부자연스럽고, 괴이하고 흉측할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경외로움 가득한 고귀한 숭고의 개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공포감은 오늘날 비주류 문화들이 선보이는 천박과 경박의 모습을 껴안으면서 숭고의 개념을 어지럽게 이 땅 위에 확장한다. 그것은 더럽거나 추하고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것이지만, 때로는 마술적이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결국 그것은 오늘날 되새겨 성찰할 우리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홍란의 전시는 집단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오늘날 욕망이 가득한 인간 사회에 대한 그녀만의 기이하고도 진지한 해석을 선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홍란 Ideal Island 장지에 먹,점토 115x300x10 2015 (디테일)


홍란 Ideal Island 점토,가변설치 2015



4. 편대식의 《현존(existence)》
퀀텀 점프의 마지막 릴레이 전시인 편대식 전(경기도미술관 프로젝트갤러리, 2016. 2. 18 - 3. 13)은 ‘현존(existence)’이라는 주제 아래 피날레를 장식했다.  
편대식은 전시장 입구에 구조물을 세워 이전 릴레이 작가들의 공간 연출 방식보다 한 걸음 더 나간 전시를 선보였다. 자신의 이전 작업이 견지한 개념적인 회화의 연장선으로 읽히는 이 구조물은 이번 전시에서 의미심장한 위치를 차지한다. 애초의 계획으로는 이 구조물의 입구에 도달한 관객들이 고개와 허리를 숙여 간신히 입장하게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등신대 크기 이상으로 입구를 만들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하던 애초의 계획을 백지화시켰는데 그 이유는 전시의 형식의 내용 사이에서의 고민이 만든 결과였다. 즉 제도권의 전시라는 형식을 대면하는 편대식의 작품에 관한 성찰의 결과였다.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전시라는 제도를 통해서 자신의 작품들과 관객 사이에서 고민한다. 생각해 보자! ‘전시’란 예술계 속에서 자존을 확인하려는 예술가의 초대 행사이며, ‘관객’은 예술가의 초대를 수용해 전시장을 방문하고 일련의 감동과 공감을 얻고자 하는 주체이다. 이 사이에서 작가는 온전한 커뮤니케이션과 상호작용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 어느 하나 허투루 놓을 수가 없다. 한지 위에 요철의 환영을 실재화하기 위해서 연필로 꼼꼼하게 시간을 들인 편대식의 회화 역시 다르지 않다. 선과 면을 보듯, 작품과 관객의 반응을 함께 고민해야 할 필요 역시 제기되는 것이다. 
작가 편대식은 한지 위에 각인의 방식으로 선을 그려 나가면서 그것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집중한다. 오목하게 눌려진 선의 골을 따라 하얀 바탕 위를 연필로 검게 칠해 나가는 쉽지 않은 그의 작업은 지난한 신체적 노동력이 요구되는 쉽지 않은 명상 회화라 할 것이다. 이처럼 무수한 선들과 그 선들 주변을 균일한 방식으로 구축해 나가는 편대식의 검은색 회화는 밀집해 있는 많은 선들로 인해 마치 빅토르 바사렐리(Victor Vasarely)나 브리지트 라일리(Bridget Riley)의 1960년대를 짧게 풍미했던 ‘옵아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편대식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운동의 일루전을 창출하는 시각성은 작품의 결과적 측면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요체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는 시각성과 관련된 존재의 미학이 주요한 미의식이 된다. 보이는 것에 따라 존재적 위상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 각인된 선의 깊은 골을 보라! 그것은 분명 얕긴 하지만 골의 네거티브 공간 때문에 빛의 방향에 따라 마치 연필로 그려진 것처럼 어두워 보인다. 그렇지만 골을 따라 여백을 연필로 그려 채운 완성 작품을 보라! 이전의 어두워 보였던 골의 선은 거짓말처럼 하얀 선으로 보인다. 색을 통한 밝음/어둠의 대비가 이전보다 더 명확해진 때문이다. 이처럼 감각의 주관화와 상대화의 세계 속에 들어선 오늘날의 시각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감각기관들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시각은 맹점이 있어서 ‘눈을 뜨고 있어도 늘 보지 못하는 곳’이 있고 청각은 가청 주파수에 못 미치거나 넘어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그렇다! 불분명한 감각이 야기하는 왜곡에 대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정성을 들여 반듯하게 선을 긋고자 시도했음에도 선의 실재는 비뚤비뚤한 채 흔적을 남긴다. 다만 우리의 무딘 감각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아니 아예 한지 위에 칠해진 검은 흑연의 층을 날카로운 철선으로 긁어 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 눈에 보이는 흰 선들을 종이의 섬유질이 벗겨져 만들어낸 것으로 오인할 수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실재의 차별적 변별성, 편대식은 그 앞에서 회화의 언어로 철학을 한다. 연필에 힘을 실은 지난한 신체적 노동이 한지의 뻑뻑한 질감들과 맞닿으면서 만드는 회화적 생산물들을 직접 체험하면서 존재의 미학을 탐구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을 가져와 자신의 작품 안에 모두 올려놓으면서 말이다. 그의 진술을 들어보자: “(...) 그 선들을 따라 완벽하고 곧은 흔적을 각인하며 지나가려고 무진히 애를 쓴다. 그렇게 남겨진 흔적은 또다시 주변의 검은 연필로 칠해진 부분에 의해 더욱 부각되어 보이며 곧지 않음이 드러난다. 또한 검은 연필로 칠해지는 면들도 연필로 덮여 종이가 보이지 않게 칠하려 애쓰지만 결과적으로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칠해지지 않은 종이의 희끗희끗함은 날 불쾌하게 만든다.”(작가 편대식의 작업 노트)
그렇다. 의도하는 바와 결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삶과 같다. 우리의 실재는 계획 대비 언제나 차이를 지닌다. 그것이 큰지 작은지의 차이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누군가의 모습과 실재는 엄연한 차이를 지닌다. 감각의 환영과 실재 사이의 차이인 것이다. 편대식은 과거를 흔적으로 붙들어 둔다. 그래서 그의 완성된 작품들은 모두 ‘그때, 거기’의 시공간을 흔적으로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울러 그의 회화는 존재를 흔적으로 재맥락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보라! 회화의 연장으로 야심차게 실천했던 경기창작센터 인근의 서해 갯벌에서의 퍼포먼스 영상은 그의 작업들을 재맥락화한다. 그는 갯벌 속에서 자신이 지나간 통로의 흔적을 통해서 거대한 회화를 만든다. 그런 면에서 갯벌에서의 행위는 자신의 회화를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증명하면서 존재론의 차원에서 재맥락화하는 작업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Untitled(the horizon), 한지에 연필, 184 x 184cm, 2014





V. 나오는 글 : 퀀텀 점프와 네트워킹의 미래적 비전
경기창작센터와 경기도미술관이 상호 협력하는 프로그램인 퀀텀 점프는 반의 성공이라 하겠다. 협상을 통해 콜라보레이션이 좌초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대상과의 협업도 아니고 실상 경기문화재단 소속의 다른 기관들이라는 점에서 이미 반의 성공을 전제한다. 레지던시 고유의 역할과 미술관 고유의 역할을 존중하고 극대화하면서 이루어진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향후 네트워크와 콜라보레이션에 관한 보다 더 발전적인 모델을 그려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편, 경기창작센터의 레지던시 작가 중 퀀텀 점프 전시에 참여할 작가를 선정하는 심사 당시의 기준을 살펴보자. 심사평을 검토하면 심의 기준은 다음의 3가지였다: 첫째, 개인전을 통해 보여 주려는 작가로서의 미학적 의도, 즉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개인적 등 다양한 층위를 망라하면서도 그것이 최종적으로 자신만의 미학적 의도로 귀결된다는 의미에서의 미학적 의도가 분명한가, 둘째, 지원서에 제출한 전시 계획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가, 마지막으로 기존의 개인전들에서 보여 주지 않았던 신작이나 미발표 작품들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경기창작센터는 4인의 선정 작가들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경기도미술관에서 선보일 수 있었던 사건 자체가 매우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미술관은 레지던시 소속 청년 작가들의 개인전을 선뜻 지원하고 널리 선보인다는 뿌듯한 사명감마저 가졌을 것이다. 이어지는 4인의 개인전으로 마련된 ‘퀀텀 점프’ 전은 양 기관의 네트워킹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었다. 
경기창작센터와 경기도미술관이 협력하여 만드는 거시적 이야기 구조 속에 2015년에 4인의 선정 작가들이 그렸던 미시적 이야기들이 2016년에는 어떠한 선정 작가들에 의해서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질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이야기들이 2015년의 시행착오들을 재점검하고 발전적 미래를 그리는 커다란 그림 속에서 ‘확장하는 네트워킹과 효율적인 콜라보레이션’의 전략을 통해서 튼실한 구조를 갖추고 전개되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퀀텀 점프’라는 전시명과도 같이 다채롭고도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서 말이다.  ●
 


출전 / 김성호, 

「퀀텀 점프 - 약동하는 청년 작가와 전시 지원 모델」, 카탈로그 서문, (퀀텀 점프 프리뷰 전, 2015. 8. 1-8. 24, / 민성홍 전, 2015. 11. 20-12. 13, / 고우리 전, 2015. 12. 18 -1. 10, / 홍란 전, 2016. 1. 15-2. 10, / 편대식 전, 2016. 2. 18-3. 13, 경기도미술관 1층 프로젝트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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