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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인호 / 결의 미학과 하얀 상상력

김성호


결의 미학과 하얀 상상력

김성호(미술평론가)


꽃을 만드는 화가
작가 이인호는 꽃을 그린다. 아니 꽃을 만든다. 드라이비트(drivit)로 회화적 질료를 만들어 낸 패널 위에 그녀는 풀을 먹인 펄프죽을 하나둘 떼어 내 정성스럽게 꽃을 만들어 올린다. 하나, 둘, 셋, 넷... 그것은 마치 흐드러지게 피어난 안개꽃처럼 작디작은 꽃송이들을 무수히 많이 만들어서 한데 모아야만 비로소 꽃다운 꽃이 된다. 따라서 그녀의 회화에서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꽃이라고 부르기보다 차라리 거대한 군집화(群集花)를 이루는 최소한의 부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옥수수를 튀겨 낸 팝콘처럼 하얀 피부의 무수한 꽃송이들을 흐드러지게 피우기 위해서 작가 이인호는 펄프죽을 만들고 그것을 일일이 떼어 내어 붙이고 건조시키는 오랜 시간과 지난한 노동을 감내해야만 했다. 나무라는 자연으로부터 생성된 펄프를 다시 꽃나무라는 자연으로 되돌려 주려는 작가의 ‘신성한 노동에 대한 의지’와 더불어 ‘자연주의 미감’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인호, My pleasure - Watch the wind Ⅱ


생성소멸의 자연과 요철의 군집화 
‘꽃’이란 종자식물의 번식 기관으로서 생성(生成)이라는 자연 본성을 그 자체로 표상한다. 암술과 수술 그리고 그것을 품고 있는 꽃잎이나 꽃받침과 같은 '화피(花被)'가 서로 만나는 요철(凹凸)의 조형성, 프랙탈(fractal) 구조처럼 반복 생산되는 미묘한 꽃잎들의 대칭적 형태와 유선형의 폼(form) 등은 곧잘 꽃을 모태(母胎)의 여성으로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줄기와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만들어내는 통일감, 가느다란 줄기 위에 풍성한 꽃이 얹힌 비례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그리고 저마다 다른 화려하고 선명한 색은 ‘부귀, 미, 하모니, 사랑, 재생’ 등 이미지로 풀어내는 여러 상징들을 이끌어 낸다.
이러한 꽃의 상징들은 대개 생성의 미학에만 집중된다. 자연 본성은 생성만을 의미하는가?  생명력이 충만한 젊음의 꽃도 언젠가는 생기를 잃고 떨어지는 법. 자연 본성이란 생성소멸(生成消滅)의 자연 존재론과 더불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간 존재론에 다름 아니다. 생각해 보라! 꽃은 바람과 곤충들에게 꽃가루를 의탁하면서 자신의 분신들을 세상에 번식시키기 위해 잠시 동안의 삶을 살아간다. 나아가 그것은 자신이 죽어 타자를 살리는 삶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꽃은 꽃이로되, 화려한 자태를 선보이는 군집화라면 어떠한가? 한두 송이의 꽃보다 군집화는 생성소멸이라는 자연의 존재적 내러티브를 보다 더 효율적으로 극대화한다. 이인호의 군집화로서의 ‘꽃 그림’은 따라서 이내 ‘자연 그림’의 위상을 지닌다. ‘꽃’의 정수(精髓)이자 대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생성, 부귀, 미, 하모니, 사랑의 메시지들은 작품의 뒤편으로 숨고 자연의 생성소멸이라는 본질적 메시지들이 전면에 부상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인호의 군집화는 한 송이, 한 송이에 집중해서 꽃의 외형을 세밀하게 그려내기보다는 꽃의 군집 자체를 흐드러지게 표현함으로써 구체화된다. 이처럼 군집화로서의 복수의 이미지란 자연 존재에 관한 메시지를 보다 더 궁극적으로 드러내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그녀의 군집화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개별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이탈시켜 자연 일반의 품 안에 안기게 만든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무슨 꽃’이라는 개별체적 인식으로부터 '자연의 꽃'이라는 자연 보편성의 문제로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가 이인호에게 있어 군집화의 창작 의도를 ‘자연의 재현(representation)’으로부터 ‘자연의 현시(presentation)’라는 곳으로 이동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꽃을 꽃처럼' 그리려고 하는 재현의 회화적 장치를 물리치고 '꽃을 꽃답게' 담아내려고 하는 여러 실험을 고안하게 만든다.

결의 미학과 백색의 환영
그녀의 시리즈 작품 〈My Pleasure〉를 보자. 펄프죽이 만든 하얀색의 바탕 위에 요철(凹凸)의 안개꽃 형상으로 자리한 군집화는 개별체 꽃들의 경계 사이를 넘나든다. 펄프죽의 볼록(凸)을 통해 ‘패턴화’를 이룬 꽃송이들이 표현되었다면, 꽃들 사이의 경계는 오목(凹)의 공간을 통해 표현된다. 이처럼 이인호는 재현의 기술을 통해 꽃 한 송이 한 송이에 집중하기보다 군집화의 이미지를 통해 자연의 보편적 존재의 미학을 처음부터 담고자 한다. 즉 펄프죽을 활용한 '볼록(凸)'의 드로잉으로 ‘한 덩어리의 자연’을 마술처럼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유념할 것은 백색의 바탕 위에 군집의 요철화(凹凸花)를 표현하는 이인호의 마술적 활유법(活喩法)은 흥미롭게도 요철 사이에서 ‘결’의 미학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이 ‘결’이란 펄프죽으로 된 요철의 반복이 만드는 ‘겹’으로부터 비롯된 규칙적인 평정의 상태를 지칭한다. 즉 볼록(凸)이 형상화하는 ‘개별적 꽃송이들’이 무수히 밀집해 있는 군집화가 요철(凹凸)을 반복하여 만드는 균질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결’의 미학은 정신의 세계, 특히 원리, 섭리와 같은 동양 전통의 ‘리(理)’의 정신세계와 만난다. 한자 ‘리(理)’를 해체한다면 ‘옥(王=玉)’을 ‘단위체(里)’로 쪼개는 것이다. 따라서 단위체들이 중첩되어 이룬 ‘결’의 세계는 이러한 ‘리’의 세계를 실천한다. 마치 우리의 ‘마음결’이 한자로 ‘심리(心理)’인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그녀의 작품 제목은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My Pleasure〉이다. 이 작품의 메시지가 결국 작가 이인호의 마음의 ‘결(理)’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주지할 것은 우리의 ‘마음결’이 희로애락의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채기내며 싸우는 운동의 과정 속에서 평정의 상태를 찾는 것이듯이, 작품 표면에서 마치 선(禪)의 명상의 단계에서 선보이는 ‘심신일여(心身一如)’와 같은 평정의 상태를 드러내는 그녀의 작품은 실상 전투와도 같은 지난한 창작의 과정과 더불어 이질성들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싸웠던 치열한 어떠한 운동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결의 평정 상태는 하얀 꽃들이 야생화처럼 피어난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히 ‘백색의 환영과 상상’이라 할 만하다. 우리의 눈에 감지되는 하얀 색이란 “태양광선을 모든 파장(波長)에서 같은 세기와 모양으로 반사함으로써 보이는 색”이다. 따라서 백색(白色)에는 빛이 머무를 틈이 없다. 모든 가시(可視)광선을 지속적으로 반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색은 모든 색이 반사하고 남는 텅 빈 결여의 공간이다. 그것은 오염되지 않은 순결의 색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인호의 회화에서 백색은 색이 빠지고, 현실이 결여된 무엇이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이 싹트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투명한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연못이나 호수의 거울 효과와 닮아 있거나,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면서도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는 ‘하얀 달’의 반영(反映)의 정체성을 닮아 있다. 
실제로 또 다른 작품  〈Illusion〉에서는 펄프로 만든 나뭇잎 모양의 단위 모듈을 무수히 반복시켜 마치 나뭇잎이 호수 위에 떨어져 내린 듯한 풍경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그녀의 회화가 창출하는 일루전은 재현의 구체적 언어이기보다 외려 추상성의 조형 실험이 만드는 상상 가득한 환영이기에 더욱 유의미하다. 상상(imagination)이란 이미지(image)를 만드는(-ation) 사유가 아니던가? 
이인호 회화에서의 이와 같은 백색 환영은 다른 작품인 〈My Space〉에서 극대화된다. 분명 꽃잎들을 펼쳐 놓은 듯한 이미지임에도 마치 우주에 온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까닭이다. 그것의 출발은 화려한 색상을 지닌 배경 속 꽃 한 송이의 단위적 평면 모듈이 12번 변주하면서 반복되는 단순한 이미지이지만, 전시장의 한쪽 벽면에서 자신만의 의미심장한 소우주와 대우주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즉 우주(宇宙)의 한자어가 일깨우는 ‘집집’이라는 의미를 상기할 때, 그녀의 작품 속 모델을 소우주로,  〈My Space〉 시리즈 전체를 대우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물활론을 실험하는 마인드 스케이프
이인호의 작업에서 꽃이란 제유(提喩)로서의 자연을 은유한다. ‘꽃’이라는 일견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소재를 파피에 콜레(Papier colle)' 혹은 콜라주의 변형으로 접근하는 이인호의 작업이 단순히 부조적 질료감에 호소하는 흔한 정물화로 그치지 않는 까닭은 그녀가 물활적 접근을 심상적 차원에서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녀는 펄프죽, 드라이비트, 아크릴 등 재료의 물활론(物活論, hylozoism, animism)적 실험을 재현이라는 조형 언어에 구속시키기보다 자유로운 추상적 상상 안에서 실현시킨다. 달리 말해, 실재와 똑같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회화적 속임수인 환영(illusion)을 더 이상 시각적 재현(representation)의 틀 안에서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심정적 상상(sentimental imagination)의 틀 안에서 작동시키는 것이 다. 이곳에서는 음과 양, 흑과 백과 같은 상극(相剋)을 새하얀 밑바탕에서 상생(相生)의 힘으로 포용하는 포지티브의 면모마저 지닌다. 그곳 혹은 그것은 하얀 상상력과 가능성을 마음으로 맞이하는 세계, 달리 말해 ‘마인드 스케이프(mindscape)’의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출전/ 

김성호,「결의 미학과 하얀 상상력, (이인호 전, 2016. 3. 9-14, 가나인사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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