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마 - 자기 점검으로서의 쉼과 미적 가치 창출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I. 쉼과 자기 점검으로서의 콤마
유리섬 맥아트미술관의 2019년 상반기 기획전인 《Comma, 가치 창조 展》은 유리 공예,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다루는 10인의 참여 작가들과 함께 재충전과 자기 점검으로서의 콤마(comma)의 의미를 성찰한다.
주지하듯이, ‘콤마’는 “어구를 나열하거나 문장의 연결 관계를 나타낼 때, 문장에서 끊어 읽을 부분임을 나타낼 때 쓰는 ‘,’ 형태의 문장 부호를 지칭”한다. 흔히 ‘반점(半點)’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것은 1988년 ‘한글 맞춤법’에서 반점(,), 모점(、), 가운뎃점(·), 쌍점( : ), 빗금(/) 등과 함께 ‘쉼표’ 또는 ‘휴지부(休止符)’로 규정된 바 있다. 그러던 것이 2015년 ‘한글 맞춤법 일부 개정안’에서부터 반점(,)만을 쉼표로 규정하게 되면서 오늘날 말이나 글에서 ‘쉴 때’를 지시하는 대표 문장 부호로 사용되고 있다. 국어에서 이 ‘콤마 혹은 쉼표’는 어구와 어절 그리고 문장 사이에서 나열, 구분, 강조, 추가, 부연, 도치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영어에서도 콤마는 이러한 표현을 위해서 ‘접속사(and, or, but)’의 중복 사용을 피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콤마의 쓰임새는 각국의 언어마다 상이하지만, 이것은 대다수 언어에서 ‘쉼(休, rest, pause)’을 지시하고 표시한다. 가히 ‘쉼’을 의미하는 세계 공용 문장 부호인 셈이다. 글쓰기와 말하기에서 “연속의 시간을 잠시 중지하고 짧게나마 휴식하라”고 강제하는 이 콤마는 보다 완전한 문장과 보다 명확한 소통을 위해서 요청하는 찰나와 같은 여백의 시간이다.
이번 기획전에서 사용된 콤마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글쓰기와 말하기에서의 ‘잠시 멈춤 혹은 잠시 쉼’과 같이 예술 실천의 달음질 속에서 잠시 숨을 멈추고 여백의 시간을 요청하는 일이다. 그 여백은 쉼의 영어 포즈(pause)처럼 마치 기계와 같이 관성적으로 작동하는 예술을 하기를 잠시 정지하는 일이며, 쉼의 한자어 ‘휴(休)’처럼 예술 창작으로 달려가는 시간을 멈추고 나무 옆에서 휴식을 취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콤마는 지속을 위해 필요한 여백이다. 새로운 미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재충전과 자기 점검을 위한 쉼의 시간이기도 하다.
전시란 그간 온 힘을 다해 온 자신의 창작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중간 점검하는 장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기획전은 참여 예술가들에게 콤마의 시간을 제안한다. 특히 이번 기획전은 주제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전시라는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인 미술가들이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갖고 나와 타자의 예술 세계를 비교, 고찰하면서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거나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모색하는 절호의 장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이번 전시에 초대된 10인의 참여 작가들이 천착하고 있는 그간의 예술 세계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이들이 잠시 숨을 고르고 찾아갈 새로운 미적 가치와 그 향방이 무엇인지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II. 새로운 미적 가치 창출을 고민하는 십인십색
조현성은 유리 공예의 바탕 위에 회화를 접목한다. 에나멜 처리된 유리병의 매끈한 표면 위에 산뜻한 수묵 담채 느낌의 도시 풍경을 선보인다. 그것은 거리의 신호등과 가로등 그리고 도로의 건물들과 달리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스냅 사진으로 포착한 듯한 일상 속 도시 풍경이다. 지극히 평범하고도 익숙한 도시 풍경을 잔잔한 필치로 담백하게 시각화하는 작가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미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 소소한 기쁨을 관객과 공유한다.
조현상, The day at the Manhattan(좌), On my way home(우), 2018
김가빈은 도자기의 표면 위에 유리, 골드, 분채, 석채, 아크릴 및 칠보 기법에 이르는 복합적인 조형 기법을 한데 올림으로써 도예와 회화 그리고 만들어진 오브제의 접목을 시도한다. 특히 일일이 불에 담금질하는 방식으로 완성되는 칠보의 수공적 제작 방식은 지난한 노동과 수고로움을 요청함으로써 작품의 세밀한 장식성을 끌어낸다. 꽃잎, 나뭇잎, 열매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상상의 나무 한 그루와 어두운 배경에 세밀하고도 아름다운 금빛 꽃들을 피워 올린 화려한 항아리는 중앙 집중식의 구도만큼이나 매우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김가빈, Queen's vase 19gb02, 칠보,골드,분채,아크릴, 2019
정길영은 도자판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만화 혹은 아동화 같은 친근감 넘치는 이미지들을 올림으로써 도예와 회화의 접목을 시도한다. 1360도의 온도에서 환원 소성한 도자판의 단단한 표면 위에 올라선 자유분방한 필치의 숫자와 유머러스한 표정의 사람들 형상은 정겹기 그지없다. 숫자들 위 앙증스러운 작은 새나 동심원 문양 위 강아지는 도자판 위에 부조 형식으로 부착됨으로써 도자, 회화, 오브제의 만남을 도모한다. 선글라스를 낀 채 좌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비장한 표정의 한 인물은 해학적인 면모를 더한다.
정길영, Suspicious ceramic2
이동수의 작업은 도자기를 그린 회화 작품이다. 짙은 검은 바탕 위에 희뿌옇게 떠오르는 유려한 곡선 혹은 각이 진 도자기 그릇은 빠른 붓질감이 느껴지는 두꺼운 마티에르와 더불어 사물과 배경이 상호 침투하는 그의 조형 언어로 인해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선보인다. 일견 전형적인 정물화의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도, 클로즈업된 화면, 단색조의 분위기, 붓질의 흔적과 같은 독특한 조형 언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생명력 가득한 무엇으로 탈바꿈한다. 명상이 요청되는 제의적 형상과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동수, 무제, 2017
노춘석은 캔버스 위 아크릴 회화를 선보인다. 대개 회색, 노랑, 파랑 등의 단색조 분위기의 색감 위에 역동적 포즈의 인물이나 동물을 선보인다. 구형이나 원통형의 조합으로 치환하는 짧게 반복하는 붓질이나 짙은 선묘를 타고 흐르는 그러데이션 기법은 꿈틀거리는 근육이나 해부학적 구조를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아날로그 붓질의 손맛이나 색상의 에너지, 대상의 역동적인 형세에 주목하는 그의 작품은 재현적 회화의 바탕 위에 숫자들과 다양한 기호들을 접목함으로써 회화가 지닌 풍부한 변용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노춘석, 빛의 노래-달리는 말, 2019
최숙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화풍의 알레고리 회화를 선보인다. 작품 속 이미지는 푸르른 화면 위에 우주를 부유하는 돌멩이나 풍뎅잇과의 곤충 혹은 알 수 없는 곤충의 투명한 허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하찮게 여겨지는 자연 속 미물의 세계를 통해서 투사되는 광대한 대우주를 경이롭게 바라본다. 그녀의 작품은, 미시와 거시 사이의 경계는 그저 수많은 변곡점이 있는 것일 뿐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깊은 사유를 통해 회화의 얇은 층 안에서 현실과 이상의 만남을 시도한다.
최숙, 무엇을 보고 있는가1, 2019
최정윤은 스테인리스 스틸, 레진을 주재료로 삼은 조각적 몸체 위에 실을 촘촘히 묶어 표현하는 독특한 조각적 설치를 선보인다. ‘세라믹 검(刀)’으로부터 ‘소금 검’으로 변해온 그의 작품들이 도달한 최근작은 ‘꽃’이라는 유기체에 관한 탐구이다. 피상적으로 그의 작품 소재는 문명과 권력으로부터 자연과 생명으로 변모했으나, 욕망이라는 근본적 주제 의식은 동일하다. 그런 면에서 좌우 대칭의 꽃줄기 위에서 비대칭 꽃의 변주를 탐구하는 그의 심상적 꽃은 인간의 욕망을 은유하고 탐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최정윤, The Flesh of passage, 2019
이상섭은 색의 조각을 선보인다. 오동나무나 백일홍 나무의 자연목을 집적하고 털실을 더해서 만든 동물의 형상은 자연물의 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반면, 레진이나 FRP라는 인공의 재료로 만든 인물상은 선명한 색 조각이다. 바람을 맞으며 비눗물 풍선을 불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나,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상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이웃의 정겨운 모습이다. 그의 조각은 평이한 재현의 언어를 통해서 삶의 시간을 여러 색으로 물들이며 가꾸어가는 소박한 우리의 일상을 친근한 언어로 시각화한다.
이상섭, 바람아 불어라(좌), 흐르는 음악처럼(우), 2018
전용환이 선보이는 색 조각은 알루미늄 소재 위에 덧입히는 우레탄 도장으로 완성된다. 이차원의 알루미늄판으로부터 오려 내어진 선들이 마치 헝클어진 실뭉치처럼 삼차원화되는 그의 뛰어난 변환의 기술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알루미늄 재료의 가벼운 성질을 극대화하는 ‘선(線) 조각’ 위에 색상환과 같은 화려한 색 배치를 통해서 복잡한 단백질 구조를 이미지화한다. 그의 투과체의 덩어리 조각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지속적인 순환과 변형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외부의 환경과 끝없이 교류하는 ‘관계적 회화 조각’이라 칭할 만하다.
전용환, Transforming Cycles - Aluminum,Paint, 2008
신한철은 스테인리스 스틸 위에 투명한 색상을 도장하는 색의 조각을 선보인다. 가느다란 지지대를 잇고 있는 푸른 구(球)의 집적은 마치 한 아름의 파란 풍선들처럼 보이고, 분리된 구형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작품들은 마치 개화한 꽃잎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구’를 기조로 증식과 분열 또는 확산을 시도하는 유기체를 탐구할 뿐만 아니라, 거울 효과를 지닌 ‘구’를 통해 우주로 열린 장소성과 더불어 이질적 공간이 맺는 관계의 미학을 긴밀하게 탐구한다.
신한철, 작품1-꿈무리, 2019
III. 새로운 미적 가치 창출을 위한 콤마
이번 전시에서 10인의 참여 작가들의 콤마는 어떠하고, 또 어떠할지를 가늠하는 일은 매우 유의미하다. 콤마란 ‘스스로 자기 점검을 위한 짧은 시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타자와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서 향후 미래의 비전을 고민하는 장으로 넉넉하게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예술가들에겐 간혹 채움 대신 비움, 충만 대신 여백과 같은 쉼이 필요하다. ‘쉼’이라는 재충전의 시간을 보낸 이후, 맞이하게 될 ‘새로운 가치 창출’이라는 사건은 모든 예술가가 기대하는 미래이다. 특히 그것이 ‘미적 가치’의 새로운 발견을 도모하거나, 독창성, 인지적 가치, 미술사적 가치 등의 다양한 가치를 포함하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일련의 성취를 이루게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번 기획전은, 미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의 새로운 성취를 도모하기 위한 첫 발걸음으로, ‘미술시장의 현황’을 살펴보고 그것을 대면하는 ‘미술가의 역할’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포럼 행사를 개최한다. 모든 예술가가 미술시장과 담을 쌓고 순수한 예술 정신만을 되뇌며 고단한 이 시대를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영민하게 시장의 흐름을 인식하고 자신의 작업을 향한 미래 비전의 좌표를 늘 새롭게 설정하며 예술 활동을 펼쳐야 할 당면한 과제가 작가들에게 남겨져 있다. 고집스럽게 달리는 예술 창작을 잠시 멈추고 내가 걸어온 길이 제대로 달려온 길이었는지를 점검하는 ‘잠시 쉼’의 시간, 즉 ‘콤마의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유념할 것이 있다. 콤마는 언제나, 예술가에게 재성찰과 재충전 그리고 자기 점검을 위한 장으로만 남지 않는다. 이 콤마는 예술가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트리는 ‘빈틈’의 함정으로도 변질될 수 있는 시공간이다. 따라서 ‘잠시 쉼’의 순간을 마냥 연장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예를 들어, 글쓰기에서 접속사(그리고) 앞에 쉼표를 쓰지 않고, 줄임표(……) 앞뒤로 쉼표를 쓰지 않듯이, 쉼에 쉼을 거듭 보태는 일은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콤마란 정말 필요한 순간에 잠시 쉬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한국의 무라노’라고 일컫는 대부도 유리섬 맥아트미술관의 이번 기획전이, 지역 문화 공간의 발전을 도모하고 현대 미술의 발전적 전개를 도모하는데 있어서 콤마의 미학과 관련한 주요한 의미를 다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더불어 참여 예술가들뿐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많은 관객에게 새로운 예술의 미적 가치 창출을 위한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콤마의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콤마 - 자기 점검으로서의 쉼과 미적 가치 창출」, 『Comma, 가치창조』, 전시 카탈로그, 2019. (Comma, 가치창조 展, 2019. 5. 21~8. 25, 유리섬미술관)